청나라 시작, 자금성에 입성한 도르곤과 소현세자
1644년 3월 19일 명나라의 수도 북경, 황제가 살던 자금성이 불탔다. 가뭄과 기근에 지친 농민 반란군이 명 왕조를 무너뜨렸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목을 메어 자결을 하고 주인을 잃은 자금성에는 청의 2인자 섭정왕 도르곤이 입성한다. 300여 년 가까이 중원을 장악한 신 제국 청이 탄생했다. 그날 도르곤 옆에서 새로운 청의 탄생을 목격한 사람은 조선의 2인자 소현세자였다.
도르곤 자금성 입성은 요동의 오랑캐(청)가 중원의 주인이 된 날이었다. 중국 최후의 왕조가 되었다.
조선은 평생을 부모의 나라로 여겼던 명나라가 멸망하고 오랑캐라고 무시했던 청나라가 시작되어 당혹스러웠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고 청은 조선에 항복 이행조건을 제시했다. 인조의 큰 아들 소현세자와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인질로 청의 수도인 심양으로 데려갔다.
볼모로 소현세자 일행을 데려갈 때 인솔 가이드가 도르곤이었다.
도르곤은 본명은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다. 만주어로 '도르곤'은 '오소리'라는 뜻이다. 1612년 11월 17일 출생했고 1650년 12월 31일 사망했다. 소현세자와는 동갑이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의 14번째 아들이다.
이복형이었던 홍타이지 휘하에서 눈부신 군공을 기록했다. 전략구성, 전쟁 지휘, 인질협상에 공을 세웠고 조카를 대신해 7년간 섭정왕으로 재위했다. 화려한 여성편력에도 자식은 딸 하나뿐이었다. 사후 묘가 파헤져서 부관참시 당했다.
도르곤은 17살때부터 몽골, 명의 정벌 출정을 해서 많은 전공을 쌓은 명장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공은 1635년 차하르 몽골의 항복을 받아내고 '대원전국 옥새'를 획득한 일이었다. 이복형 홍타이지에게 옥새를 바친다. 대원제국 옥세를 통해 원나라를 잇는다는 명분을 획득했고 후금에서 대청이 건립될 수 있었다.
칭기즈칸의 맥을 잇는 옥새를 홍타이지에게 바친 사람으로 도르곤은 청 건립의 일등공신이었다.
이복형 홍타이지는 '한'에 등극하고 난 후 능력이 출중한 어린 도르곤을 견제하기 위해서 도르곤을 낳은 생모를 청 태조 누르하치 묘에 순장한다. 도르곤이 누르하치의 총애를 받았고 훗날 자라서 홍타이지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을 견제해서 도르곤의 친어머니를 순장시켜 버린 것이다. 도르곤은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의 원수 홍타이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도르곤은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 등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를 포위해서 압박하기 위해 강화도를 공격했고 결국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는 항복 선언을 했다.
소현세자의 8년간의 기록, 심양일기
소현세자는 볼모로 심양으로 끌려가 8년간 생활을 했다. 8년 동안 생활을 기록한 사료, 심양일기가 있다.
심양일기는 병자호란으로 청의 심양에 볼모로 간 소현세자 일행의 상황을 세자시강원에서 정리한 일기이다.
내일의 일정, 날씨, 만나는 사람, 대화 등이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약 380년 전의 심양의 모습과 소현세자의 생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이다. 명. 청 교체시기 소현세자가 볼모 신분으로 조선. 청 관계, 청의 동향, 명과의 전쟁 등 다양한 압박을 받은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선 군사 1천 명을 뽑아...(중략) 징발해 쓰는 일과 군량을 운반하는 일을 밤늦도록 독촉하고 갔다'
-심양일기 1640년 7월 5일
'아침 일찍 황제의 명으로 온 관리가 조선에서 보낸 옻칠의 품질이 좋지 않다고 불평했다'
-심양일기 1640년 7월 7일
조선에서 심양으로 끌려갈 때 소현세자 일행은 약 180명이었다. 심양관에 머물면서 조선인은 계속 늘어났고 500명까지 증가했다. 심양관은 18칸으로 500명이 생활하기에는 작았다. 여름에는 비좁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청이 식량을 지급했지만 심양이 식량난에 시달리자 땅을 떼어줄 테니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라고 한다.
소현세자는 결심해야 했다. 심양관 근처에 병자호란 때 끌려왔던 조선인 포로를 사고 파는 속환시장이 있었다.
속환贖還은 두 차례 호란을 겪으면서 청에 끌려간 조선인들을 그 주인들에게 몸값을 치러주고 송환해 온 일이다.
소현세자는 속환시장에서 조선인들을 사들여 일꾼으로 고용했다. 조선인들이 심양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다. 벼농사 솜씨가 좋은 조선인들이 농사를 짓자 해가 갈수록 수확량이 증가했고 심양관의 경비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벼를 팔아서 이윤을 얻게 된다.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의 종이와 면포를 선호했다. 청 귀족들은 소현세자에게 청탁을 부탁했고 소규모 청탁에서 무역으로 발전했다.
'곡식을 쌓아두고는 그것으로 진귀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6월 27일
소현세자와 청의 관계는 돈독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패전국의 인질이며 볼모신세였다.
소현세자는 아무나 만날 수 없었고 일일이 허락을 받은 후에 문밖 출입이 가능했다. 일부 역관, 대신, 황족들만 일부 접촉할 수 있었다. 그중에 한 명이 도르곤이었다.
도르곤과 심양으로 동행했을 때 도르곤이 사냥에서 잡은 노루나 양을 소현세자에게 보내기도 했고 숙소에 초청해서 차를 마시기도 했다.
심양에서 소현세자에게 청은 무리한 요구를 했다. 청 황제의 사냥에 소현세자는 강제 동행을 해야 했고 전쟁터에 동행해야 했다. 소현세자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명나라 정벌 전쟁에 동행을 강요한 것이었다.
소현세자를 명 정벌에 동참시킨 청의 속내는 명을 숭배하던 조선 세자를 청이 데리고 있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명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소현세자의 전쟁 참여는 명과 조선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청은 조선에 대한 불만이나 요구사항도 소현세자를 통해서 전달했다. 조선에서의 세자는 결정권이 없다. 그래서 청의 요구를 조선에 그대로 전할수도 없었다. 청 입장에서는 세자에게 요구를 하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양쪽으로 압박을 받는 소현세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였다.
청은 인조를 압박하고 있었다. "만일 인조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면 인질로 삼은 아들을 왕으로 세울 것이다"-정축화약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도 틀어지고 있었다.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을 압박하려던 청과 소현세자로 압박을 완충하려던 조선의 사이에서 부자 관계에 금이 가고 있었다. 심양일기가 완성될 때마다 조선의 인조에게 보고했고 인조는 소현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었다.
청은 조선뿐만 아니라 다른 몽골 부족의 아들도 심양에 볼모로 잡아 두었다.
북경의 자금성
자금성은 현존하는 궁궐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명 태종 영락제의 명으로 15년간 20만 명이 동원되어 1420년 완공되었다. 총면적 72만 제곱미터로 축구장 약 72개 규모이다. 명. 청 시대 500년 동안 총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곳이다. 예로부터 중국에서는 천자가 사는 우주의 중심을 자미원紫微垣이라 했다. 자미원의 '자'와 금지할 '금'을 써서 자금성紫禁城이라 했다.
북경의 중심, 천하의 중심, 우주의 중심이 자금성이다. 자금성의 황금색 지붕은 황제만 쓸 수 있는 황제의 상징색이다. 영어로는 'Forbidden City 금지된 도시'라고 쓴다.
자금성에 모든 현판이 한자로 되어 있지는 않다. 자금성은 앞쪽 3개의 전각에는 황제의 업무 공간으로 한자만 편액 되어 있지만 뒤쪽 3개의 궁에는 황제의 거주 공간으로 한자와 만주어가 같이 편액되어 있다. 만주어가 새겨진 것은 자금성의 주인이 명을 거쳐 청이 되면서 만주 황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팔달령 장성은 사발팔방으로 길이 통한다는 뜻의 '사통팔달四通八達'에서 유래했고 명 대 1505년에 축조되어 만리장성 구간 중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천하제일관 산해관은 청군 사령관 도르곤이 소현세자와 함께 넘었다. 1643년 4월 9일 중원 약탈을 위해 출정했다. 명군이 지키는 산해관을 피해 우회경로를 계획했다. 도르곤은 소현세자를 전투에 동행을 시켰다.
가는 중에 깜짝 놀랄 소식을 듣는다.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에 의해 복경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자성의 난은 명나라 말기 정치 부패,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봉기이다.
산해관을 지키고 있었던 명나라 장수 오삼계의 서신이 도르곤에게 전달된다.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이 산해관으로 진격해 오고 있으니 자신을 도와서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을 함께 물리치자고 지원 요청을 했다.
도르곤은 산해관으로 직진을 한다. 4월 22일 고속 행군으로 산해관에 도착했다. 오삼계와 연합하여 반란군을 진압했다. 산해관 전투이다.
도르곤은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서둘러 북경으로 향해야 했다. 9일간 620리(약 310Km)를 행군하여 북경을 향해 직진했다. 하루에 100리, 50km 이상을 이동해야 하는 고난의 행군길이었다. 심양일기에는 행군의 긴박함과 다급함, 전쟁의 참상, 황폐한 모습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청 공식기록에는 없는 전쟁의 민낯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자금성에 입성한 소현세자
도르곤과 조선의 인질 소현세자는 자금성에 입성했다. 도르곤이 입성했을 때 소규모의 전각만 남기고 불타버린 자금성이 있었다. 산해관 전투에서 패배한 이자성이 북경으로 돌아와서 자금성을 불태워버렸다. 모든 보물을 싣고 북경을 빠져나갔다. 도르곤은 보물을 찾기 위해 이자성을 끝까지 추격한다.
소현세자는 조선과 자신이 평생 받들었던 명나라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허무함을 느낀다. 조선이 그토록 무시했던 오랑캐 청나라가 명 백성들의 환호를 받는 것을 보고 환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도르곤의 부하들은 더 이상 약탈을 할 것이 없으니 심양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하지만 도르곤은 명나라 백성을 귀순시키고 민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도르곤은 목을 메어 자살했던 명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준다. 청나라가 명의 원수를 대신 갚고 새로운 중국을 펼치겠다는 비전을 보여준다.
도르곤은 심양에서 북경으로 수도를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청 황제 6살 순치제는 북경으로 와서 자금성에서 두 번째 즉위식을 올린다.
소현세자는 중원의 주인이 바뀌는 역사적 현장을 목격했다. 도르곤은 소현세자에게 불타고 남은 전각 한 곳에서 머무르도록 한다. 아담 샬 신부와 만나서 천주교, 역법, 과학기술 등을 접하게 된다.
소현세자가 북경에 입성한 후 기록은 심양일기에 남아 있지 않다. 소현세자의 북경 체류 기간 포함 1644년 6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기록이 없다.
소현세자는 볼모 생활을 마치고 8년 만에 조선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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