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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광해군 조선군 파병, 명나라를 멸망시킨 사르후 전투

by 소시민스토리 2024.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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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조선군 파병, 명나라를 멸망시킨 사르후 전투

1618년 조선은 명으로부터 원군 요청을 받는다. 대신들은 임진왜란의 파병 은덕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파병을 요구하고 광해군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광해군일기>에는 파병을 하지 않으려는 광해군의 고민 흔적이 있다. 명나라에 보낸 답서에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만전의 계책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명의 원군 요청 절차 문제를 핑계로 시간을 끌면서 파병을 회피한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파천했고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광해군은 의병과 관군과 함께 전장을 지켰다. 몸소 전쟁의 참혹함을 뼈저리게 겪었기 때문에 백성들을 다시는 전쟁 속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임진왜란 참전 이후로 명은 세력이 다해가고 있었고 그 틈을 타서 신흥강자 압록강 북쪽의 여진족들이 후금을 건립하고 성장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러한 국제 정세를 듣고 있었다. 사신을 파견하여 북방의 정세를 지켜보고 있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약해진 군사력을 염려했고 집권 초부터 무비武備에 집중한다. 

무비武備는 전쟁을 대비해 군사 장비를 갖추는 것을 뜻한다.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의 주적은 여진이었다. 여진족을 상대하기 위해 총통을 사용했다. 철갑옷을 착용한 기마병에 대응하기 적절했던 것이 화포였다. 광해군은 총포를 제작하기 위하여 임시 관아, 화기도감을 설치했고 연병지남을  조선 광해군 4년 (1612)에 한교가 편찬했고 군사 훈련에 필요한 지침을 기록했다. 기록에 따르면 수레로 이동식 성벽을 세워 방어 및 공격을 했다. 그만큼 여진족의 기병은 두려운 존재였다. 

후금을 건립한 여진족

1616년 여진족은 후금을 건립했다. 1619년 명나라는 후금의 성장을 견제하고자 명.조선연합군이 후금 정벌을 위해 사르후(현재 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인근 지역)로  떠났다.

사르후는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 근처의 전장지 중 하나였다. 조선은 사르후 전투를 살이호 대전, 심하 전투라고 부른다. 동북아의 패권을 두고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소용돌이 중심에는 누르하치가 있었다.

 

한국어 사돈, 누룩, 안주는 만주어로 사둔, 누러, 안주이다. 한국어와 만주어 모두 발음과 뜻이 유사하다. 만주어의 특징은 위에서 아래로 쓰고 왼쪽 세로줄부터 오른쪽 방향으로 읽는다. 

여진족은 결혼을 통해 맺어진 인척 관계를 매우 중시했다. 만주문자는 누르하치가 만들었고 여진족을 통합하고 후금을 세웠다. 누르하치는 다양한 부족을 통합하기 위해 만주 문자를 창제했다. 후금은 장차 청나라로 이어진다. 

1618년 누르하치는 명과 정면충돌을 예고한다. 전쟁 선포를 한 것이다.

 

누르하치는 명과 전쟁을 앞두고 명분, 7대한을 발표한다.

 

<7대한>

 

1. 명나라에서 조부 기오창가와 타크시를 아무 이유 없이 죽인 것

2. 명나라가 건주부는 차별하고 여허부와 하다부의 편의만 보아준 것

3. 명나라가 누르하치와 맺은 영토협상을 파기하고 여진을 침공하여 사람을 살해한 것

4. 명나라가 여허부에 원병을 보내 건주여진을 막으려고 한 것

5. 여허부가 같은 여진인으로서 명나라와 내통하여 그 앞잡이가 되었으며 

누르하치 약혼녀를 강제로 몽골인과 혼인시킨 것

6. 명나라가 누르하치의 영토인 차이허, 산차와 푸안을 강탈한 것

7. 명의 요동총독인 소백지가 권한을 남용하여 건주여진을 비롯한 여진백성들을 마구 괴롭힌 것 

 

1583년 한 여진족 추장이 명에 반란을 일으켰다. 누르하치의 아버지 타크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가 추장을 설득하기 위해 성에 들어갔다. 그때 마침 성을 기습공격했던 명나라 군에게 반란군으로 오해받아서 억울하게 살해당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아버지와 관계가 돈독하지 않았다.

10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계모에게 구박을 받아 독립했다. 독립 후 요동 지역 명문가의 도움을 받아 생활했다. 누르하치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죽음으로 명으로부터 벼슬과 교역권을 받았다.  아버지가 이끌던 부족을 이끌게 되었다. 누르하치의 병력은 약 100명. 갑옷 13벌로 열악한 상황이었다.

 

열악한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5년 만에 건주여진을 통일했다. 군사를 일으킨 지 33년 만에 후금을 건국하고 한(최고지도자)에 등극했다. 

누르하치를 거두었던 사람은 이성량이다. 이성량의  아들은 임진왜란 참전한 이여송 장군이다. 

어릴 때부터 출중했던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는데 훗날 누르하치는 명을 무너뜨렸고 이성량은 호랑이새끼를 키운 셈이다. 

 

북방의 강자였던 여진족 금나라 멸망

금나라는 북방의 강자였다. 금은 1115~1234년 동안 여진족이 지금이 지린성, 헤이룽장성에 세웠던 나라였으며 건국 후 120년 만에 원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여진족들은 멸망 뒤 흩어져 살았다. 기근이 들거나 사냥이 잘 되지 않으면 보호받을 나라가 없어 약탈을 일삼거나 조선과 명에 의존하고 있었다. 나라 없는 설움은 누르하치를 강건하게 만들었다. 여진족이 고려, 조선시대에 한때는 부모의 나라로 여기기도 했다.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운 후 여진족만 우대하지는 않았다. 누르하치에게 큰 도움을 준 세력은 결혼으로 맺어진 사둔이었다. 누르하치 자신도 물론이고 자식들도 몽골 세력과 결혼해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누르하치가 아버지, 할아버지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으로 명에게 전쟁을 선포했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명은 만력삼대정으로 기력을 소진하고 있었다. 

만력삼대정은 명나라 신종 만력제 시기에 있었던 3번의 큰 전쟁 보바이의 난, 임진왜란, 양응룡의 난을 뜻한다. 명이 쇠약한 틈을 타서 여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다. 명나라가 준 교역권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고분고분하지 않고 필요한 살길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1618년 후금군은 무순성의 항복을 받아냈다.  무순은 여진족이 명 상인들과 교역을 하는 요충지였다. 

무순성의 성주는 누르하치의 기세를 보고 바로 투항했고 누르하치 사람이 된다. 훗날을 대비해 무순성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명나라는 반격을 준비한다. 네 개로 나뉜 명의 부대는 후금의 수도 허투알라로 진격한다. 북로군은 개원, 서로군은 무순, 남로군은 청하, 동로군은 관전에서 출발한다. 이 상황에서 명은 광해군에게 지원 요청을 한 것이다. 광해군은 고민을 거듭하다 도원수 강홍립을 선두로 군대를 1만 3천명을 파병한다.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은 방도를 강구하는데에 힘을 써라'

-<광해군일기> 광해군 11년 2월 3일 

약 10만 명의 조.명 연합군은 3만 명의 후금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누르하치에게 패배한다.

누르하치에게는 팔기군이 있었다. 여러 부족 사람들을 여덟 개의 깃발로 분류했다. 팔기군의 기동력을 이용해서 사로군이 연합하기 전에 각 군대를 섬멸했다.

 

사르후 전투

조. 명 연합군은 동서남북 네 개 부대로 나눠 수도 허투 알라를 포위하려고 했다. 우세한 화력으로 공성전을 할 생각이었다. 후금의 성들은 견고한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화력에 취약한 나무로 된 성벽이었다. 주력이었던 서로군은 명나라 장수 두 송이 이끌고 있었다. 총사령관의 지시를 무시하고 진격했다. 사르후에서 후금이 성을 쌓고 있었고 기병 400명이 지키고 있었다.  성이 완성되기 전에 가야된다고 판단했다.  두송은 몽골과 많은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는 맹장이었다. 자만심이 충만하고 군사 지휘 능력을 과시하고자 했다. 

공격에 성공해서 사르후성을 차지했다. 사르후성에 화기 병력을 남기고 근처 계범성으로 공격부대를 이끌고 간다. 이때 누르하치는 사르후성에 남아있는 화기 부대를 먼저 습격하고 계범성을 잇달아 습격하여 서로군을 섬멸했다. 

북로군을 이끌던 마림은 서로군 두송이 출발하는 것을 보고 마림마저 독단적으로 출발했다. 허투알라로 가는 길목 산악에 진지를 구축한다. 누르하치는 새로운 전술로 말에서 내려 기어서 접근한다. 명의 방패를 뒤집어 공격하고 뒤에서 따라가던 기마부대가 급습했다. 결국 마림이 이끌던 북로군도 전멸한다. 

 

 

북로군과 서로군의 전멸 소식을 들은 남로군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고 일단 후퇴한다. 하지만 조선군 포함 동로군에게는 퇴각 명령이 닿지 않았다.  누루하치는 빠른 속도로 동로군을 향해 달려갔다. 1619년 3월 2일 심하에서 조. 명 연합군이 소규모 후금군과 전투를 벌였고 조선군이 총기를 사용해 격퇴시켰다.

 

 

1619년 3월 4일 부차들판에서 조선군 진영에 급보가 날아온다. 명군 선봉이 전멸했고 유정 제독은 전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서둘러 전투 진영을 재정비하는 사이 후금군이 기습 공격을 했다.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에도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았고 팽팽한 전투가 이어졌다. 후금군은 후퇴했다. 하지만 곧이어 후금군의 3만 팔기군이 다시 나타났고 압도적인 팔기군의 기세에 조선군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일촉즉발의 순간 부차 들판에 모래 바람이 불었다. 바람 앞에 조선군의 조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조총부대가 재장전할 틈도 없이 팔기군은 달려들었다. 먼지와 모래로 뒤덮인 들판에서 맨몸으로 후금군에게 맞섰다.

 

조선군 9천 명이 전사했고 조. 명연합군은 참패로 끝났다. 4일만에 명의 세 개 부대가 괴멸된다. 사르후 전투는 조.명 연합군에게 막대한 전력 손실을 입혔다. 사망자 중 지휘관급이 300명이 넘고 병졸은 4만 6000며 명이 사망했다. 반면 후금군은 사망자가 거의 없었다. 생존한 조선군은 후금에 투항했다. 누르하치가  명의 군대를 대파한 사루후 전투 승리는 신제국 청나라 탄생의 서막이 된다. 

 

조선에게도 사르후 전투는 큰 타격이었다. 조선은 누르하치가 보복해 올까 봐 걱정을 했다. 하지만 사르후 전투 이후 조선에 서신을 보낸다. 조선군은 자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명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일본의 침공을 막아준 은혜를 갚기 위해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누르하치는 조선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다. 

사르후 전투는 만주족에게도 중요한 역사였다. 사르후 전투 후 150년 후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건륭제는 청의 억 만년의 기초는 사르후 전투에서 시작되었다고 평가했다.

사르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누르하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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