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의 치욕 병자호란, 인조와 홍타이지
1636년 병자년 12월 최정예 기병으로 구성된 청의 선봉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조선을 향해 질풍처럼 내려온 그들은 불과 6일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인조는 시신이나 오물을 내보내던 수구문을 통해 내시에게 업혀 가까스로 도성을 탈출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뒤쫓아 온 청군에 의해 강화도 파천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고립된다.
병자호란은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청 태종 홍타이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조선을 침략했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전쟁이면서 청의 전쟁이었다.
홍타이지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 전쟁에 총력을 기우렸다.
병자년(1636년) 음력 12월 8일 시작된 병자호란은 정월 30일, 53일 만에 끝났다. 조선은 굴욕적으로 참패했다. 병자호란의 참패는 개전 초기 홍타이지의 '직도直擣' 전략 때문이었다. 직도直擣는 가장 빠른 길로 한양을 기습해서 인조의 강화도 파천을 저지하여 도성 안에 가두어 두는 전략이었다. 광해군 대에 이미 예상했던 전략이었다.
<장구직도 長驅直擣 멀리 말을 달려 곧바로 찌르다>
"강물이 얼어붙어 적의 기마병이 곧장 쳐들어온다면...(중략) 내 말을 잘 명심하고 한시바삐 논의하여 처리하라"-광해군일기 광해 11년 9월 29일
홍타이지는 300명의 정예기병을 선발했다. 300명을 선출하고 2명의 장수에게 지휘를 맡긴다. 그 중 한 명인 '마푸타(마부다)'는 청의 전신인 후금 때부터 사신으로 여러 차례 조선을 왕래해서 길을 잘 알고 있었다.
300명은 청군 중에서도 가장 최정예기병으로 기동력과 전투력이 강했다. 선봉대는 압록강을 음력 12월 8일날 건너서 음력 12월 14일 인조가 있는 한양(홍제원도착, 지금의 홍제동)에 도착했다. 단 6일 만이었다.
당시 압록강에서 한양까지 거리가 당시 1200리 (550Km~600Km 정도)였으며 하루 약 90km를 이동했다.
압록강에 있던 조선 파발마가 청군이 처들어 온다고 전하기 위해 한양으로 달려왔는데 12일 날 도착했다.
불과 2일 후 청군은 한양에 도착했다. 조선 파발마를 청군 선봉대가 맹렬히 추격했다.
조선 조정은 청군 선봉대의 침략 소식을 14일 오전에 들었다. 14일 오전 당일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실의 가족들은 겨우 강화도로 피신했다. 하지만 인조와 소현세자는 피신하기 위해 숭례문으로 나오려다 청군이 홍제동에 당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남한산성으로 부랴부랴 피신했다.
조선 조정은 전쟁을 대비해서 조정에서는 '청야입보 淸野入保'라고 해서 모든 병사와 백성들을 성안에 있게 했다.
'청야입보 淸野入保 들판을 깨끗이 비우고 성에 들어가 지킨다'
그런데 청군의 병자호란은 정묘호란 때와는 달랐다. 정묘호란 당시 진군하면서 곳곳에서 벌어진 공성전과 약탈이 있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는 성을 지나쳐 빠르게 한양을 기습했다. 성안의 조선 군사가 청군이 공격하지 않고 빠르게 지나치자 막을 수가 없었다.
또한 선봉대는 상인처럼 복장을 갖추어 상인을 가장하여 밤낮으로 달렸다. 당시 무역까지 겸했던 후금의 외교사절단이어서 상인이 외교사절단과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조선 백성들은 사신이 왔나 보다 하고 무심코 지나갔다.
조선 왕 인조를 한양성에 가두지는 못했지만 인조의 강화도 피신은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선봉대에 이어서 청나라 본진이 압록강을 건너서 남한산성을 겹겹히 에워싸고 있었다.
조선군의 핵심 방어 전략
당시 조선군의 핵심 방어 전략은 적이 침략하면 일단 산성안으로 대피하는 것이었다.
청군의 팔기군은 기동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평지에서 강한 팔기군을 무력화할 수 있는 합리적 방법이었다.
하지만 평지길이 뚫려서 한양까지 성을 지나쳐 가버리는 청군을 제지할 수 없었다.
청군의 정규 병력 약 2만 2천명과 동맹군 몽골 병력이 약 1만 2천 명이었다. 3만 4천 명 정도의 본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게 되었다.
3만 4천 명은 청나라 총병력에서 동원 가능한 70%가 투입되었다. 새로 황제가 된 홍타이지가 직접 출정했다. 황제가 된 후 적국까지 직접 정벌 온 것은 병자호란이 유일무이하다.
황제 홍타이지
병자년 4월 11일 병자호란 발발 8개월 전에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꾸고 스스로 대청지국의 황제가 됐음을 선포한다. 황제의 즉위식에서 만주와 몽골인, 투항한 명나라 출신 신료들까지 모두 홍타이지를 향해 삼궤구고두의 예를 갖췄다.
하지만 조선에서 온 사신 두 사람만은 즉위식에서 끝까지 절하지 않고 꼿꼿이 서서 버텼다. 조선 사신의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것을 본 홍타이지는 분노했고 조선 정벌을 결심한다. 병자호란의 시발점이었다.
홍타이지는 새로운 존호를 신하들에게서 받는 자리였다. 홍타이지는 여진의 최고 지도가 '한', 몽골을 통치하는 '칸', 한족을 통치하는 '황제'로서 추대를 받는 자리였다.
누르하치가 세웠던 후금이 여진으로만 구성된 민족국가였다면 홍타이지가 세운 대청은 몽골과 한족까지 아우르는 다국적 국가였다. 지금까지 불렀던 '여진'을 '만주'라고 부르라고 한다.
여진족이 만주족이 되고 후금이 청으로 바뀐것이다.
절을 하지 않는 조선 사신
홍타이지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은 나덕헌과 이확이었다. 홍타이지는 하늘을 보고 '삼궤구고두(삼배구고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를 한 다음 신하들이 황제에게 삼궤구고두를 한다.
모두 삼궤구고두를 하고 있는데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그냥 서 있었다.
나덕헌과 이확은 즉위식에 초청받은 사람은 아니었고 춘신사였다. 춘신사는 정묘호란 후 매년 봄마다 조선이 후금에 보내던 사신이었다. 나덕헌과 이확이 심양에 온 이유는 춘신사로 파견되었고 인조 왕비 인열왕후 조문에 대한 회답으로 파견되었다. 나덕헌과 이확은 즉위식에 가서 자신들의 임무가 아니어서 당황했을 것이다.
조선은 청의 국제적인 지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 사신들이 절을 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홍타이지가 하늘을 향해 삼궤구고두를 한 다음 축문을 읽는다.
"...조선을 정복했고 몽골을 통일하였으며 원나라 옥새를 획득했다..."
-청 태종실록 1636년 4월 11일
조선을 정복했다는 축문의 내용은 조선 사신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청과 조선은 정묘화약으로 형제 관계를 맺었을 뿐이었다. 조선 사신이 삼궤구고두를 한다면 홍타이지를 황제로 인정하는 것이며 군신관계가 인정된다. 조선 사신이 삼궤구고두를 해도 문제가 되고 안 해도 문제가 되는 상황이었다.
홍타이지는 명나라가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조선과 군신관계라고 선포했고 이것은 조선과 아무런 조율이 없었으니 조선 사신으로서도 절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홍타이지가 무리하게 조선을 정복했다고 축문에 넣은 이유는 명의 최대 조공국 조선에게 황제로서 인정을 받으려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사신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선 사신은 그 자리에서 배례를 거부했고 홍타이지가 생각했던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고 자신의 위신도 깎이게 되었다. 장엄한 즉위식에서 한 칸 황제로서 성대한 즉위식을 꿈꿨는데 조선 사신이 예를 올리지 않으니까 모두에게 조선 정복이 거짓말이라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다. 청이 형제관계의 조약을 어긴 것이다.
마음을 숨기는 홍타이지
홍타이지는 그 자리에서 조선 사신을 죽이지 않는다. 사신을 죽이면 청이 먼저 형제 맹약을 깨는 셈이 된다.
죽여야 된다는 부하들을 말리고 조선 사신을 그대로 돌려보낸다. 대신 이 상황을 꾸짖는 편지를 들려서 보낸다. 홍타이지는 조용히 전쟁을 준비하다가 즉위식 8개월 후 조선을 침공했다.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남한산성에는 만 명이 넘는 병력이 있었고 남한산성 밖에는 청군이 약 3만 4천 명이 있었다. 전국의 근왕병들이 왕을 구하러 몰려온다. 하지만 청군이 너무나 강해서 청군을 뚫고 산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청군은 남한산성 안과 밖의 정보를 차단하여 산성을 고립시킨다. 청은 공성전을 준비한다. 홍이포를 34문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다. 성안에 고립된 조선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홍타이지는 성안의 식량이 부족할 것을 예상했다. 2월 하순까지 머무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선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홍타이지는 조선에 머무를 생각이었다. 홍타이지는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조선을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고 하고 비웃기도 하면서 인조의 목숨을 조여왔다. 조선의 백성은 전쟁 고통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었다.
이때 성안의 조선 조정은 친명 척화파와 친청 주화파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철저했다. 병자호란 발발 5개월 전에 명나라의 지원을 끓기 위해서 명나라 북경 인근 지역을 유린했고 대대적인 약탈전을 전개했다. 청의 공격을 받은 명은 조선을 돕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1월 17일 느긋한 청의 태도가 돌변하여 갑자스럽게 한밤중에 사신을 청하였다. 홍타이지 계획은 남한산성을 압박하고 2월 중순 이후 강화도를 함락하여 인조를 압박할 목적이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배를 20척 만들고 2월 15일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런데 강화도 공격을 한 달간 앞당겨 정월 20일에 진행시켰다.
호환虎患은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이다. 매마媽媽는 천연두이다. 만주인들은 천연두를 '마마'라고 불렀다.
만주어로 '마마'는 원래 뜻은 나이 든 여성의 존칭이었다. 만주인들은 샤머니즘을 믿었고 천연두를 극도로 두려워했기 때문에 천연두에 걸리는 것을 '무서운 여신의 노여움을 샀다'라고 생각해서 '마마'라고 이름을 붙였다.
전쟁의 판도를 바꾼 천연두
천연두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질병이다. 과거에는 '두창'이라 불렀다. 두창은 발열, 오한, 구토 증상을 거쳐 피부에 발전이 나타나서 콩과 같은 종기가 일어나서 두창痘瘡이라 불렀다.
고열과 함께 종기가 부풀어 고름이 지면 딱지가 생긴다. 긁어서 딱지 흉터가 생긴다. '곰보 자국'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초상화에는 천연두 자국이 있는 사람의 얼굴을 그대로 그렸다. 천연두는 공기로 전파되는 질병으로 전파력이 심각했다. 천연두의 당시 치사율은 30%였다. 무시무시한 천연두는 병자호란의 흐름을 바꾸었다.
느긋했던 홍타이지가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이유가 천연두가 원인이라고 입증됐다.
청의 기록에 따르면 병자호란 이후 홍타이지는 죄를 지은 부하들을 처벌하는 내용이 나온다. '청군 진영에서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는데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명을 붙였고 심지어 홍타이지가 머물던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천연두 환자를 두었다는 죄를 물었다. 결정적인 증거로 홍타이지가 부하들과 나눴던 대화 중에서 본인이 일찍 귀국한 것을 두고 '피두선귀避逗先歸 천연두를 피해 먼저 돌아옴'라는 직접적인 증언이 남아있다.
천연두에 한 번 걸리면 면역력을 가진다. 숙신熟身이라 한다. 하지만 전혀 천연두를 앓지 않은 사람은 생신生身이라 한다. 아마도 홍타이지는 생신生身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15세기 무렵 중국 명나라에서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한 인두법이 개발된다.
인두법은 천연두 환자의 고름이나 딱지 등을 피부에 문지르거나 코로 흡입해서 면역을 획득하는 예방법이다.
16~17세기 명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한 방법이었다. 1608년 허준의 <원해두창집요>에 기술된다. <원해두창집요>는 조선시대 의학자 허준이 왕명으로 두창에 관해 기술하여 간행한 의서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는 조선과 명나라와는 달리 천연두 치료법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홍타이지의 아들 순치제는 24세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19세기 후반 청 10대 황제 '동치제'도 20세에 천연두로 사망했다. 천연두는 만주족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청은 전쟁에 나설 때 천연두 발병 위험 지역은 천연두를 한 번 앓았었던 숙신熟身 장수만 출정했다.
천연두 때문에 시간이 촉박한 청은 조선에 압박을 가했고 전쟁의 종결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배를 만들어 가장 수심이 얇고 해협이 좁은 곳으로 배를 띄워 강화도를 공격했다. 청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게 된다. 강화도 함락 소식을 인조에게 통보하자 결국 인조는 항복 의사를 밝힌다.
조선 입장에서 완전히 둘러싸여 고사 직전이어서 협상을 마다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정축년 1637년 정월 30일 조선의 임금 인조는 왕의 옷이 아닌 하급 관리의 옷을 입고 남한산성을 나선다. 이어서 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삼궤구고도 의식을 거행한다.
홍타이지는 집요했다. 자신의 즉위식에서 삼궤구고도를 거부했던 조선 사신들 때문에 조선에 와서 직접 조선 왕, 인조의 삼궤구고도를 받아야 했다. 협상과정에서 홍타이지는 인조의 출성出城을 강조했고 인조는 여러 번 간청한다. 백성들이 무릎을 꿇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왕의로서의 위신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했지만 홍타이지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 홍타이지 목표는 인조의 삼궤구고도를 받는 것이었다. 삼전도 항복 의례는 9개월 전의 황제 즉위식을 간소화해 재현한 것이었다.
인조의 항복 이후 볼모로 소현세자는 심양에 끌려갔다. 홍타이지는 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를 한 달 동안 만나지 않았다. 공기로 전염되는 천연두를 홍타이지는 두려워했다.
삼전도비 三田渡碑는 1639년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청 태종(홍타이지)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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