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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조선을 공격한 홍타이지 신무기 홍이포

by 소시민스토리 2024.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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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공격한 홍타이지 신무기 홍이포

1636년 12월 조선의 역사를 뒤흔든 사건이 벌어졌다. 오랑캐라 부르던 청나라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한양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결국 47일 만에 청나라에 굴복했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의 비장의 무기는 홍이포라는 대포이며 명군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남한산성을 향한 청군의 포격이 시작되고 홍이포는 엄청난 폭음과 함께 위력을 자랑했다.  조선의 성벽은 무너져 내리고 성벽을 넘어 성 깊은 곳까지 떨어진 포탄에 조선군은 혼비백산하며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인조는 홍이포의 위력 앞에 굴복하고 만다.  

 

홍이포의 위력을 대단했다. 최대 사거리가 9km였다.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남한산성이 멀리 보이는 곳에 포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인조가 항복하기를 기다렸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조선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홍이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추운 날씨에도 잘 버티던 조선과 인조는 홍이포 포격 후 약 열흘 만에 결국 항복한다. 홍이포의 위력을 나타내는 기록이 있다. 

 

'오랑캐가 성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탄환이 거위알만 했으며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인조실록 1637년 1월 19일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했다'

-인조실록 1637년 1월 25일

 

홍이포는 명나라가 먼저 보유했다. 홍이포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홍이포는 붉은 머리와 수염을 가진 오랑캐가 쓰는 대포라는 뜻이다. 홍이는 네덜란드인을 지칭한다. 당시 천주교로 개종했던 명나라 몇몇 대신들이 후금을 제압하기 위해 서양식 화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들의 노력으로 포르투칼인 들을 통해서 네덜란드의 컬버린 포가 들어오면서 홍이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다.

청은 홍이포를 가진 명에 밀리다가 우여곡절 끝에 홍이포를 손에 넣고 승기를 잡았다. 

 

명나라 천혜의 요세, 산해관

후금이 만리장성을 넘어 더 넓은 중원으로 가기 위해서 넘어야 했던 관문은 산해관이었다. 

만리장성 가장 동쪽 끝에 있는 관문으로 산해관은 천하제일관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천혜의 요세였다. 산해관 서쪽은 높은 산맥이 있어 통과하기 쉽지 않았다. 후금은 무조건 산해관을 통과해야 했고 명은 최후의 마지노선이 산해관이었다. 산해관이 뚫리면 북경이 위험해진다. 

 

 

원숭환 장군은 송나라 악비장군과 함께 한족에게는 최고 명장이었다. 담대한 원칙주의자였던 원숭환은 산해관 200리 밖 영원성을 축조했다. 영원성은 성벽 높이가 10m, 두께는 6m였다. 

원숭환은 영원성에 홍이포 11문을 배치했다. 후금에게는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러나 후금은 사르후 전투에서 기동성을 이용해 명에 대승을 거두어서 사기가 기세등등했다. 

1626년 1월 23일 후금군 20만 대군은 영원성에 도착했다. 영원성의 병력은 1~2만 명이었다. 원숭환을 제외하고 나머지 명군은 모두 산해관으로 철수했다. 명은 산해관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것에 반대한 원숭환은 영원성에 남았다.  

 

누르하치가 이끄는 대규모의 후금군은 영원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1626년 1월 24일 영원성을 향한 대공세가 시작됐다. 하지만 영원성에서 쏟아지는 포탄에 후금군의 전열은 무너졌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홍이포의 위력이 증명되었다. 누르하치는 패배했고 나흘 만에 영원성에서 퇴각하며 최악의 전투를 경험했다. 이 전쟁은 후금을 상대로 명의 첫 승리이자 기적과 같은 것이었다. 중심에는 명나라 장수 원숭환이 있었다. 

 

후금은 홍이포를 처음 보았다. 기존 대포와 사정거리를 비교할 수가 없었다. 후금의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 이후 사망했다. 후금군은 위기에 처했다. 사망원인은 알 수 없다. 영원성 전투에서 승리한 원숭환은 공로를 인정받아 요서 지역 방어 총책임자가 된다. 누르하치가 사망하면서 세명의 아들과 한 명의 조카에게 대권을 넘겼다. 네 명의 후계자가 공동통치한다. 일단은 나이와 서열이 가장 낮은 홍타이지를 한으로 추대했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이다. 홍타이지는 몽골어 만주어로 '훌륭한 아들'이라는 뜻이다. 누르하치는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다.

홍타이지는 병자호란을 일으켰고 청 황제로는 유일하게 조선에 와서 삼전도에서 인조를 무릎 꿇렸던 인물이었다. 홍타이지의 묘호는 태종이다. 형제를 죽이고 골육상쟁을 일으키고 창업자 아버지보다 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었다. 4명이 공동 섭정에 오르게 되고 그중에서 서열 4위로 시작했지만 결국 황제가 되었다. 

 

조선을 공격한 홍타이지

권력을 잡은 홍타이지는 조선을 공격했다. 1627년 음력 1월 8일 정묘호란이다. 영원성에는 홍이포가 있었기 때문에 명을 함부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홍타이지가 조선을 공격한 이유가 더 있었다.

17세기는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였다. 평균기온이 낮아지고 강수량이 적어져 기근, 전염병이 창궐했다. 명나라와 전쟁 중이어서 교역이 끊긴 상태로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였다. 물자 확보가 절실한 후금은 조선 침략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당시 후금은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인육을 먹을 정도였다. 명보다 만만한 조선을 침략했고 조선에 시장을 열도록 강요한다. 시장에서 일본, 중국 물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선을 통한 중계무역으로 물자를 확보한다. 이때 조선의 물품이 후금에 전파되었다. 홍타이지는 조선의 감을 좋아해서 홍시, 곶감을 바치라고 했다. 일본을 통해 조선에 전파된 신대륙 작물 담배도 이 시기에 후금에 전파되었다. 

후금 사람들이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홍타이지가 나라 전체에 금연령을 내렸다.

 

조선을 친 후 보급을 확보한 상황에서 다시 영원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원숭환의 벽을 넘지 못했다. 오랑캐 침입에 맞서 싸운 최고의 장수로 꼽힌다. 홍타이지는 고민 끝에 다른 방향으로 우회해서 만리장성을 넘어서 북경으로 향한다. 부하들에게 영원성을 공격해서 원숭환의 시선을 유인했다. 1629년 10월 2일 주력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하여 내몽골 초원으로 우회해서 10월 27일 장성 관문을 통과했다. 예상치 못한 험난한 곳을 통해 북경을 침공했다.

 

몽골초원을 가려면 몽골 세력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사돈 관계 몽골세력을 길잡이로 세워 새 경로로 북경 침공이 가능했다. 몽골과 사돈 관계를 맺는 것은 누르하치 때부터 이어졌다. 만주에게 몽골은 전략적 파트너이자 잠재적 경쟁자였다. 

식량난에 처한 후금과 몽골은 힘을 합쳐 명을 약탈했다. 소식을 들은 원숭환 장군은 헐레벌떡 북경으로 향한다. 후금군은 북경에서 원숭환 장군에게 또다시 패했다. 

 

원숭환이 갑자기 사망했다. 명 황제에 의해서 처참하게 능지처참된다. 후금군이 만리장성을 넘어 명을 침략하자 백성들 사이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원숭환이 화친을 원했는데 황제가 거부하자 원숭환이 후금군을 불러들여 황제를 위협한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심상치 않은 명의 분위기를 눈치챈 홍타이지는 치밀한 계략을 꾸민다. 포로로 잡힌 명나라 환관에게 원숭환이 밀통한다는 거짓 정보를 일부러 흘리고 이를 엿들은 환관이 다시 궁으로 도망치게 놓아주었다. 계략에 빠진 줄 모르고 자신이 들은 것을 명 황제에게 고해바친다. 

홍타이지의 계략을 적중했고 명황제는 원숭환을 불신한다. 

 

명 황제 숭정제는 원래 의심이 많았다. 생사를 같이 했던 원숭환의 부대들은 원숭환이 억울하게 능지처참 당하자 충성심을 잃게 되었다. 원숭환의 죽음 이후 명나라 장수들은 후금에 투항한다. 

홍타이지는 아버지와 자신의 한을 풀었고 명을 약탈하면서 식량을 확보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줬다. 서열 4위에서 시작한 홍타이지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서열 1위가 되었다. 

 

홍타이지는 북경을 넘었을 때 홍이포 기술자들을 포로로 잡았다. 약 1년 만에 자체적으로 홍이포를 만들었다. 홍타이지는 포로로 잡혀온 홍이포 기술자들을  최고로 대접했고 홍이포를 만들자 벼슬과 보조금을 지원했다.

명나라 장수 공유덕, 경중명이 후금에 투항할 때 홍이포와 수군을 데리고 왔다. 홍타이지가 너무 기쁜 나머지 공유덕과 경중명을 왕에 봉해준다. 후금 만주족이 명 한족을 왕으로 봉한 것은 이때가 최초였다. 이때 공유덕. 경중명의 부대 이름을 '천우병(하늘이 도운 부대)'으로 지어준다. 자체 생산한 홍이대포 이름을 '천우조위대장군(하늘이 돕고 응원하는 대장군)이라 짓는다. 

 

홍이포를 손에 넣은 것은 하늘과 신이 도왔다고 믿을 만큼 홍이포에 진심이었다.

1631년 1월 홍이포 준비를 마쳤다. 1631년 8월에 요서 지역 대릉하성 포위 전에 자체 생산 홍이포를 첫 투입했다. 홍이포를 발사해서 성에 명군을 몰아넣고 말려 죽였다. 고도의 심리전과 회유로 명의 항복을 받아냈다. 

5년 후 조선의 남한산성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17세기 신무기 홍이포는 동아시아 판도를 흔들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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