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멸망을 앞당긴 임진왜란
1592년 4월 13일 12만의 일본군이 조선을 쳐들어왔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이 함락되었고 1592년 5월 3일 한양이 함락당했다. 바람 앞에 등불이 된 조선, 선조는 피난길에 올랐다. 1592년 6월 13일 일본군은 한양성에 입성했다.
'왜노가 상국(명나라)을 침범하고자 본국을 끌어들여 같은 편으로 삼으려 했으나 본국이 의리를 지킨 까닭에
되려 성을 내고 흉포를 부려 한양.개성. 평양이 함락되고 백성은 전쟁에 짓밟혔습니다'
-선조실록 선조25년 9월 2일
이 모든 일이 명과의 의리 때문에 벌어진 일이며 조선이 무너지면 명도 위험하다는 조선의 상소에 명나라 수도 북경에서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조선의 원군 요청에 조선을 도울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마침내 조선으로의 파병을 결정했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7년간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후 15~16세기 동아시아 최대 강국이었던 명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졌다.
17세기 중국은 명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제국 청나라가 부상한다. 명.청 교체를 불러온 주요 사건 중 하나가 임진왜란이었다. 명. 청의 흥망은 국제적인 돈의 흐름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을 '쩐의 전쟁'이라 부를 만큼 돈의 역할이 중요했다.
청나라 문화
청나라의 만주족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조선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태극권은 명 말.청 초 명인 '진왕전'이 척계광의 <기호신서>, 도교 경전 <황정경>을 토대로 창시한 무술이다. 변발과 치파오는 만주족 사람들의 상징이다.
중국의 북방지역은 산세가 험하고 춥다. 만주족은 이동을 빨리 하기 위해 말을 타고 다녔다. 말을 타기 위해 남녀 모두 옆이 트이게 고안된 디자인이 된 치파오를 입었다. 치파오의 '치'는 만주족의 고유 군사.행정조직 팔기에서 유래됐다. '파오'는 두루마기라는 뜻이다. 치파오는 '팔기 사람들이 입는 두루마기'라는 뜻이다.
원래 치파오는 남녀 구분이 없었다.
만주족은 전쟁이 잦았다. 갑옷과 투구를 자주 착용해야 했다. 그래서 머리 앞부분을 밀고 뒷부분만 남긴 것이다. 뒷머리를 남긴 이유는 만주족은 머리카락에 사후 영혼이 들어간다고 생각했다. 전쟁에서 사망하면 시신을 가지고 올 수 없어 머리를 잘라서 가져와서 장례를 치렀다.
'身體髮膚 受之父母 신체발부 수지부모' 몸과 머리털, 피부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
변발에 대한 한족의 반발은 거셌다.
'유두불유발 유발불유두, 머리를 남기려면 머리카락을 남기지 말고 머리카락을 남기려면 머리를 남기지 마라'
변발령을 어기면 머리가 남아 있을 수 없었다.
만주족이 이토록 변발령을 강력히 시행한 이유는 만주족은 소수의 정복자였다. 자기 인구의 100배가 넘는 한족들을 감시하고 통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변발은 청에 협조적임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만주족의 계보
여진족은 동북 만주 일대에 거주한 퉁구스 계통의 집단이다. 12세기 초 고려시대 때부터 여진은 성장하고 있었다. 여진 ~만주족 활동 지역은 과거 고구려가 지배하던 땅이었다. 고구려 민족은 한반도 민족과 북방의 기마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구성되었다. 말갈족이 여진족의 전신이다.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만주족이다.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으로 이어졌다.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1639년)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후 청 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이며 높이 5.7m, 너비 1.4m, 무게는 32톤에 달한다.
'본국이 상국에 죄를 얻은 지 오래되었다...본국이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매, 정묘년에 황제께서 장군을 보내 동쪽을 정벌하시니...'
-삼전도비 비문 中
삼전도비에는 하나의 비석에 같은 내용을 만주어, 몽골어, 한문 3가지를 문자로 기록했다. 삼전도비는 17세기 초 만주 문자가 몽골 문자, 한문과 함께 쓰여있어 초기 만주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만주어는 한국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한국어와 어순이 같다. 경상도 방언과 유사하게 들린다. 현재 중국에 남아있는 만주족은 약 천만 명 정도이고 만주어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수백 명뿐이다. 만주어를 모국어로 일상대화로 쓰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청나라는 약 300년의 긴 역사와 넓은 영토를 자랑했다. 하지만 현재 만주어가 사멸될 위기에 처해있다. 만주족은 말은 있었지만 글이 없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1599년 만주어를 창제했다. 만주어는 수많은 역사적인 자료로 남아있다. 만주어로 쓴 자료는 청나라에서 특히 중요한 문서나 대외 문서들이 만주어로만 작성이 되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1689년 동시베리아의 네르친스크에서 청과 러시아가 체결한 국경 확정 조약이다.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국경 조약이다. 청나라 측 조약 원문은 만주어로만 작성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일본군은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정명향도 정명가도, 명을 치러 가니 길을 안내하거나 내어놓아라'였다.
동아시아 강대국 명나라는 몽골, 여진(만주)등 북방 오랑캐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군사비용을 쓰고 있었다. 조선에 파병까지 해야 하는 상황에 명나라는 국고 손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군 요청에 명나라는 조선을 의심했다. 조선이 일본에 협조하여 길을 터주어 명을 치려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다.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진짜 조선임금이 맞는지 실물을 보고오라고 사신을 보냈다.
명과 조선의 경계는 요동 지역이다. 일본이 요동까지 점령하면 명 진출은 시간문제였다. 요동 지역 군사 5천 명을 선발대로 파병한다. 1592년 7월 17일 명의 조승훈 부대가 평양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조선의 지리와 일본군의 실체에 어두웠던 명나라군은 일본의 조총 부대의 기습을 받아 대패했다. 명나라는 패전 소식에 깜짝 놀랐다. 1592년 12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명나라는 이여송 부대 4만 3천 여 명을 파병한다.
이여송 부대는 당시 최정예 부대였다. 명나라는 건국 후 200여 년 동안 큰 전쟁이 없었다.
영하(보바이)의 난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1592년 2월에 몽골에서 귀순한 보바이가 영하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요동 지역에 있었던 최정예 이여송 부대를 파견했다. 영하(보바이)의 난은 명에 귀순한 몽골인 보바이가 세력이 커지자 독립하기 위해 일으킨 반란이었다. 1592년 9월 이여송은 몽골족의 근거지를 불태우고 영하성을 물에 잠기게 하여 진압했다. 보바이의 난 진압 이후 이여송 부대의 다음 행선지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조선이었다. 먼 거리를 행군해야 했고 기후가 변하였으며 기병중심의 부대에 말들이 만주 벌판을 달리다가 조선의 지형인 산악지대에서 비까지 내리면 말 들이 걷지를 못하였다. 이여송 부대는 결정적 착오를 한다.
무기, 식량, 생필품 등 전부 챙겨오기에는 역부적이어서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됐던 화폐, 은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조선은 은을 거래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명군 최고 사령관 경략 송응창은 답답한 속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무역도 통하지 않아 비록 은전이 있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많은 병사가 압록강을 건넌 이래 지금까지 채소와 고기, 장 같은 것을 입에 대보지도 못했습니다
말이 쓰러져 죽은 것만도 1만 6000필이니, 병사들의 피해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송응창의 <경략복국요편>
조선이 은을 거래하지 않은 이유
조선은 함경도 단천에 은광이 있었다.
연은분리법은 16세기 초 조선에서 발명된 기술이며 납과 은의 녹는점 차이를 이용해 은을 추출한다.
조선에서 개발해서 일본에 전파되었고 조선에서 전수받은 기술로 은 생산이 급증했다.
일본은 16세기 은광 개발 열풍이 불었고 세계 2위 은 생산국에 등극했다. 은을 통해 축적된 엄청난 부로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조총 무기를 조달했다. 조선침략의 발판이 된 은광 개발이었다.
조선은 오히려 은광을 폐쇄시켜 버린다. 조선과 명나라는 조공관계였다. 조선의 대표적인 조공품은 인삼이었다. 인삼을 많이 가져오라고 닦달을 하자 조선에서는 은광을 숨겨야겠다고 판단했다. 은광이 있다는 것을 알면 명나라가 요구할 것이므로 숨기기 위해 은광을 폐쇄했다.
명군 사령부는 두 가지 보급 해결책을 내놓았다. 요동, 산동 지역에서 명나라산 보급품을 매입하고 조선으로 배송했다.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보급로가 길고 복잡해졌고 전쟁 비용이 늘어났다.
조선에서 보급품을 책임지라고 한다. 실제 명군의 약탈이 심했다. 왜군에 의해 명군에게까지 약탈을 당하자 조선 백성들은 곡식을 땅에 묻고 도망가기도 했다.
"왜적은 얼레빗 같고 명나라 군사는 참빗같다"
-유성룡 <징비록>
임진왜란. 정유재란까지 7년 전쟁하면서 명군이 쓴 전쟁비용은 당시 은 기준으로 780만 냥을 썼다.
은 1냥은 쌀 2석을 살 수 있고 현재 쌀 가격으로 72만 원 정도이다. 명군의 전쟁으로 지불한 비용은 단순히 계산해 보면 약 5조 6천억 정도이다.
명의 화폐, 은자는 말발굽 모양으로 마제은馬蹄恩으로 불렀다. 당시에는 화폐가 규격화되지 않았다. 무게로 가치를 판단해서 은을 작게 조각내어 사용했다.
명나라 시대 16세기 유럽은 대항해시대였다. 아메리카에서 은 채굴 열풍이 불어 채굴된 은의 최종 목적지는 명나라였다. 유럽은 은으로 명에서 나는 비단, 도자기, 차 등을 구입해 갔다. 무역을 통해 명나라는 연간 은 200톤의 무역 흑자를 누리고 있었다.
은이 풍부해지자 명에서는 은이 결제기능을 하는 화폐역할을 했고 세금까지 은으로 냈다.
명은 세계 은의 무덤으로 불릴 정도로 은이 넘쳐났다. 명 중기 이후부터 상품경제. 유통망 발전으로 부를 쌓는 상인이 증가했다. 중국 강남 양저우 소금 상인들은 엽기적인 사치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은 만 냥을 위세 있게 쓰고 싶어서 얇은 금박을 사서 탑 위에 올라가서 바람에 날렸다.
그런데 은이 없어서 살 수 없는 상황이 닥쳤다. 아메리카에서 넘어오는 은의 유입에 차질이 생겼다. 아메리카에서 은을 채굴하던 유럽국가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패권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다. 전쟁비용을 은으로 충당했고 명으로 가는 은의 양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은도 명나라로 유입되었는데 일본의 은도 임진왜란으로 유입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명나라는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디플레이션은 경제 전반적으로 상품과 서비스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이다.
양응룡의 난
양응룡의 난이 일어났다. 양응룡의 난은 1597년 명의 파주지역 토사에서 양응룡이 일으킨 묘족의 반란이다. 이여송부대와 임진왜란에 참전한 유정 부대도 함께 진압했다. 양응룡의 난 진압에 은 200만 냥을 탕진했다. 당시 명 조정의 1년 예산은 은 400만 냥이 었다.
보바이의 난은 180만 냥, 임진왜란 780만 냥, 양응룡의 난은 200만 냥을 탕진해서 총 천만 냥이 넘는 비용이 들었다. 이 모든 사건이 명 황제 만력제 시기에 발생했고 '만력삼대정'이라 부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50년 만에 강대했던 명은 멸망한다.
은때문에 명나라가 군사력, 경제력으로 국운을 다하고 있었을 때 만주족이 등장한다. 명 말기 은은 유통이 잘 되지 않았다. 겉어 들인 세금의 종착지는 북쪽 오랑캐와 남쪽 왜구를 막는 국방비로 사용했다. 직접 중앙에서 지방으로 군대를 보내기보다는 그 지역의 실력자들에게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만주지역)은 여진으로 불리고 있었다. 통일 전 여진은 각각의 독립 부족으로 존재했다. 명은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협조적이고 순종적인 부족들에게는 교역권을 제공했다. 협조적이면 교역권을 많이 주어 은이 축적되었고 비협조적이면 교역권을 줄였다. 상호견제를 통해 오랑캐를 오랑캐로 통제했다.
오랑캐를 쥐락펴락 했던 중국인은 이성량이었다. 임진왜란 때 파병 온 명 장수 이여송의 아버지가 이성량이었다. 이성량에게 순종하며 교역권을 받은 여진족 가문은 청을 건국한 가문 중의 하나, 누르하치 가문이었다.
명이 오랑캐를 관리하기 위해 교역권을 준 것이 결국 명을 망하게 하는 세력을 키운 셈이다.
누르하치 세력은 세력을 점점 키워나가면서 주변 지역을 통합했다. 명나라도 누르하치가 신경 쓰였지만 당시에는 변방의 오랑캐에 불과했다. 청을 건국하고 중원을 차지할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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