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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김성곤의 중국 한시기행 격양가, 남풍가

by 소시민스토리 2024.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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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의 중국 한시기행 격양가, 남풍가

산서성山西省 남부지역은 황하의 중류구간에 속해 있다. 황하로 흘러들어오는 지류 중에서 위수 다음으로 큰 강인 분하汾河가 산서성을 종단해서 산서성 서남단에서 합류한다. 분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중요한 몇몇의 여행지가 있다. 산서성의 중심 도시 태원이 있고 역사와 문화의 명성인 평요고성, 한식절의 인물인 개자추가 숨어든 면산綿山, 요임금의 수도 임분臨汾이 있다. 

 

요임금의 수도 임분은 '분하가 임해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설적인 성군으로 알려진 요임금이 수도로 삼은 곳이어서 흔히 중국의 첫번째 수도라는 뜻의 화하제일도華夏第一都라고 불린다.

4500년전 황하 문명이 시작된 곳으로 요임금 때는 평양으로 불렸다.

 

 

임분시 남쪽 요임금의 사당, 요묘가 있다. 사당의 맨 앞쪽에는  문명시조文明始祖라고 쓴 커다란 현판이 걸려있다. 요임금이 황하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 중류지역에 기반을 둔 부락연명의 수령으로 생긴 호칭이다. 광운전에는 2,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요임금이 황금색 도포를 걸치고 보좌에 위엄 있게 앉아있다.

요임금은 전설적인 중국 통치자 3대 황제 중 한 명이다. 황금 도포를 입은 요임금의 모습은 실제 모습이 아니었다.

 

한비자의 기록에 의하면 요는 초가집에 살았고 조미가 되지 않은 나물뿌리 요리를 먹었고 질그릇으로 물을 마셨다고 적고 있다. 여름에는 거친 베옷으로 겨우 몸만 가렸고 겨울에는 사슴가죽으로 추위를 막았다.

실제 요가 태어났다고 하는 요묘 남쪽마을, 이촌에는 요임금의 초가집과 흙으로 쌓은 계단이라는 뜻의 '요제모자토계'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름만 임금이었지 일반 백성들과 살아가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요임금 시절 불렸다고 전해지는 격양가가 있다. 격양은 돌멩이를 던져서 맞추는 놀이이다. 

요임금은 어느날 민정시찰을 나갔다. 마침 골목에서 나이 든 노인들이 흥얼거리면서 격양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평화롭게 놀고 있는 노인들을 바라보며 요임금은 태평한 세상을 만든 자신이 뿌듯했다. 반복해서 흥얼거리는 노인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묘임금의 표정은 묘해졌다가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바뀌면서 미소가 넘쳐흘렀다.

 

 

<擊壤歌격양가>

 

"해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쉰다네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서 밥을 먹나니

임금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작자 미상의 격양가

 

요임금의 덕정으로 태평한 세상이 왔지만 덕정조차 모르는 백성들은 자신의 힘으로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살고 있을 뿐이다. 요임금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백성을 가르치지도 않고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그저 백성들이 평안하게 일생을 영위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임금 자체도 모른다.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느지조차 모르는 사람이다.

그다음은 백성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이다

그다음은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이다

가장 좋지 못한 것은 백성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이다

신의가 모자라면 불신이 따르게 마련이다

훌륭한 지도자는 말을 삼가고 아낀다

지도자가 할 일을 다하여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면 백성들은 말한다

이 모두가 우리 스스로가 한 것일 뿐이라고"

-노자의 <도덕경>

 

요임금 시절 부르던 <격양가>는 노자가 말하는 정치의 최상급을 보여주는 노래이다. 

 

운성의 남풍가

순임금 시절 불렸던 남풍가의 창작현장은 임분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진  유서깊은 도시 운성에 있다. 

산서성 서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운성은 옛날에는 황하의 동쪽이라는 뜻의 하동으로 불렸다. 

역사의 명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삼국지의 명장 관우, 당나라 시인 유정원, 송나라 역사학자 사마광 등 걸출한 인물들이 이곳 출신이다. 운성에 속한 문희현의 배씨 가문은 59명의 재상과 59명의 대장군을 배출했다. 

땅이 신령하면 걸출한 인물이 나온다는 지령인걸의 길지이다. 그래서 운성은 중점 관광지로 지정된 곳이 매우 많아서  국가에서 관리하는 관광지가 90곳이다. 

 

순임금의 창작의 현장은 염호와 운성이 낳은 최고의 영웅 관우의 고향 해주이다.

운성 염호는 내륙에 자리한 소금 호수이며 중동의 사해와 염분 함량이 유사하다. 부표 없이 둥둥 떠다닐 수 있어서 중국의 사해라고 불린다. 염호는 남북의 폭은 약 3~5킬로미터이고 동서의 길이는 30킬로미터이며 총면적은 132평방 킬로미터이다.

 

기록에 따르면 염분 호수에서 식용 소금을 채취하기 시작한 것이 오천 년 전이라 한다. 항하 문명의 시작과 궤를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요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순양 받은 순임금은 염호에 도착해 노동 현장을 살피게 되었다. 한여름의 소금 호수는 강렬한 햇빛에 시달리고 있었고 역부들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면 노동을 하고 있었다. 인자한 순임금은 소금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와운강 높은 언덕에 올라가 다섯 줄 오현금을 펼쳤다. 맑은 오현금 가락을 타고 부드러운 음성이 구성지게 흘러나왔다. 

 

 

<南風歌남풍가>

 

"남풍이여 향기롭게 불어오소서

우리 백성들의 고초를 씻어줄 수 있으리니

남풍이여 때맞춰 불어오소서

우리 백성들의 재물을 늘려줄 수 있으리니"

-순임금의 남풍가

 

요순시절에는 정남품이 불어왔다. 오곡백과가 잘 여물어서 풍년이 들고 병든 사람도 병이 나아서 건강해졌다. 요순의 태평 시절에만 불어온 바람은 순임금이 염호에서 창작한 남풍가가 불러온 바람이다.

관우의 고향 해주는 염호에서 멀지 않은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최대 규모의 관우 사당, 관제묘는 염호에 기대어 중조산을 바라보고 있다. 수나라 개황 9년에 창간되었고 청, 명나라 때 관우를 숭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큰 규모로 확장되었다.

 

중국인들에게 관우는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다. 공자를 부르는 말, 문성(문화의 성인)이라 부르고 관우는 무인으로서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의 무성이라 부른다. 충성과 절의의 대명사 관우를 좋아하는 황제들 덕분에 관우의 신분은 계속 높아졌다. 송나라 때 충혜공, 숭년진군을 거쳐 무안왕으로 봉해졌다. 명나라 때는 협천대제로 봉해져 하늘을 도와 백성을 보호하는 위대한 황제가 되었다.

청나라 때는 성인과 황제를 겸하는 관성대제로 봉해져 지존의 지위에 오른다. 해주 관제묘에는 "사람으로서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의 만세인극萬世人極, "충의가 천지에 빛난다"는 뜻의 의병건곤義炳乾坤으로 칭송하고 있다. 모두 관우의 숭배자였던 황제들이 써서 붙인 것들이다.

 

민간 신앙의 관우는 재물을 보호하는 재신의 역할을 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상서지역 출신의 상인들 진상들의 역할이 컸다. 전국 각지에 상업활동을 하는 진상들이 자신들을 지켜줄 보호신으로 자기 지역 출신의 관우를 지목했다. 용맹한 관우가 낯선 곳으로 가는 자신들을 지켜줄 것을 기대하면서 장사에서 가장 필요한 신의를 표방하기에 관우가 제격이었다. 진상의 관우숭배는 그들의 상업활동을 통해서 전국으로 퍼져나가서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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