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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김성곤의 중국 한시 기행, 왕소군, 영회고적

by 소시민스토리 2024.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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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의 중국 한시 기행, 왕소군, 영회고적

황하黃河는 청장고원에서 시작해서 청해성, 사천성, 감숙성, 영하회족자치구, 내몽고, 섬서, 산서, 하남 산동 9개 성 5,464킬로미터를 흘러서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중국에서 두 번째 긴 강이다. 산지 위주의 상류, 황토 고원 위주의 중류, 평원과 구릉 위주의 하류로 구분된다. 중류의 황토 고원지대를 지나면서 대량의 황토를 함유해 누런색의 탁한 강물이 된다. 황하 상류는 황하원 발원지부터 내몽고까지 3,471.6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구간이다. 상류는 정통적으로 중국의 변방 지역이었다.

 

변방 지역의 거점 도시 난주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평화로운 시기 상인과 여행객들이 모여들어 다채로운 문화가 꽃피운 곳이었지만 이민족과 갈등이 고조된 시기에는 군대의 살기와 전마의 울음소리가 가득한 곳이었다. 당나라 때 특히 이민족과 전쟁이 빈번했는데 시대 상황을 반영해서 변새시邊璽詩가 탄생한다. 변새시는 전쟁터에 끌려온 병사들의 고충과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적은 시이다. 변새시邊璽詩 중 양주사를 읇어본다. 양주 사는 당나라 왕지환이 지었다. 비단길이 지나는 감수성 일대를 예전에는 양주라고 불렀다. 양주사는 그 지역에서 부르는 곡에 가사를 붙였다. 

 

 

<양주사凉州詞>

 

"황하는 멀리 흰 구름 사이로 오르고 

한 조각 외로운 성은 만 길 높은 산 위로다

강족의 피리는 하필 원통한 이별의 버들 노래더냐

봄바람은 아직도 옥문관을 넘지도 못했거늘"

 

사막을 흐르는 황하에 지평선에서 피어오르는 구름, 만길 높은 산과 위에 우뚝 성 외로운 성, 광막하고 장엄한 변새의 풍경을 담은 거폭의 그림이다. 호연하고 씩씩한 기상을 느끼게 해 준 그림이다. 

변경을 지키는 병사들 역시 변새 풍광처럼 거칠고 씩씩한 용사들이다.

강족姜族은 감숙성 사천성 일대에 사는 이민족이다. 이들이 부는 뿌리가 한족의 문화에 유입되면서 당나라 때 군대에서 많이 쓰였다.

 

한 병사가 절양류折楊柳라는 이별 노래를 피리로 불고 있었다. 절양루는 버들가지를 꺾는다는 의미이다. 버들가지를 꺾는 이유는 이별할 때 상대방이 가지 않고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피리를 부는 병사가 이별의 노래 곡조로 자신의 그리운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천리만리 가족과 연인을 떠나 언제 갈지 기약도 없는 곳에 있으니 마음이 처량하고 그립기만 하다. 변방의 병사들은 그리움이 담긴 양주사를 노래했다. 

 

 

내몽고의 중심 도시 후허와우터에는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사람인 왕소군의 자취가 있다. 왕소군의 무덤 청총이 있다. 한시의 광활한 영토 속에 왕소군은 자주 등장한다. 시인들은 아름답고 슬픈, 극적인 그녀의 생애를 시적 소재로 자주 활용했다. 왕소군은 한나라 황제 원제 후궁이었다. 황제는 궁중 화가인 모연수가 그린 후궁들의 초상을 보고 여인을 선택했다.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후궁들은 화가에게 뇌물을 주며 미색이 돋보이게 그려 달라고 요청했다. 오직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았다. 미색이 뛰어났지만 화가의 농단으로 눈 밑에 큼지막한 점이 그려지며 황제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북방의 근심거리였던 흉노족의 왕 선우가 화친을 청하며 공주를 요구했다. 공주를 주면 한나라의 사위로서 의무를 다하겠다고 하니 한나라는 이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친생 공주를 보낼 수는 없는터라 후궁 중 한 명을 골라 보내게 되는데 왕소군이었다. 추한 왕소군 그림을 보고 흉노로 보내도 안깝지 않았을 것이다. 왕소군이 한 나라를 떠나는 마지막 환송자리에서 왕소군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된 황제는 빼어난 미색에 깜짝 놀라 화첩을 가져오라 명한다. 그림과 왕소군을 대조하던 황제는 분노하여 왕소군을 추녀로 그린 모연수를  참할 것을 명령한다. 

중국 최고의 미녀를 오랑캐에게 보낼 수 없다는 황제를 대신들이 간신히 말려서 왕소군을 궁궐을 떠날 수가 있었다. 왕소군은 우여곡절 끝에 흉노로 떠나고 한나라에서 흉노 땅으로 들어갈 때 왕소군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며 슬픈 곡조로 비파를 탄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처연하고 아름다웠는지 마침 계절은 깊어서 북에서 남으로 날아가고 있던 기러기들이 그 모습을 보다가는 날개짓을 잃는 바람에 하나둘 땅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생긴 왕소군의 별명은 기러기가 떨어진다는 뜻의 낙안落雁이다. 

왕소군이 흉노의 왕비로 있는 동안 한나라와 흉노 사이는 평화가 지속되었으므로 왕소군은 백만대군으로도 얻지 못한 평화를 여인 한 몸으로 일궈낸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왕 선우가 세상을 뜨고도 한나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왕소군은 마음의 병이 깊어져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왕소군을 사랑했던 흉노의 백성들이 너도 나도 자신들이 사는 마을의 흙을 가져와서 거대한 봉분을 만든다. 가을이 깊어져서 온 초원에 풀들이 노랗게 시들어도 무덤 풀 반은 내내 푸르렀다.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왕소군의 한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무덤 이름을 청총靑塚이라 불렀다.

 

시인들이 왕소군을 시로 많이 표현한것은 중국 시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회재불우를 담아내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회재불우懷才不遇는 뛰어난 인재가 환경을 잘못 만난 탓에 재주를 펼 기회가 없다는 뜻이다. 

재색이 뛰어난 왕소군은 덕망과 재능이 출중한 충신과 인재를 비유한다. 왕소군을 추하게 그린 모연수 화공은 충신과 인재의 길을 막는 조정의 간신들이다. 그림만을 믿고 미인을 방치해 버린 황제는 조정 간신배들의 참언을 믿고 충신과 인재를 멀리하는 어리석은 혼군昏君이 된다. 돌아가지 못한 미인의 한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황제의 무능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고 엉터리 그림을 그린 화가의 초점을 맞추기도 하면서 

왕소군의 삶은 다양한 형태와 색깔로  작품화 되어서 문학과 예술사의 한복판을 흘러간다. 

 

<영회고적詠懷古跡>

 

"온 산과 골짜기 형문으로 달리느니

왕소군이 자란 마을이 아직 있구나

한번 궁궐을 떠나 사막으로 갔더니

홀로 푸른 무덤으로 남아 황혼을 향하누나

그림으로 어찌 봄바람 같은 얼굴 알까

옥패소리 짤랑거리며 돌아오는 달밤의 혼이여

천년 세월 비파로 전해지는 오랑캐 노래

노랫 속에 또렷한 원한이여 원한이여!?

 

안록산 반란군이 천지를 휩쓸던 시절 가족들을 데리고 전란의 땅을 피해서 감숙성 사천성 곳곳을 헤매고 다니던 두보가 왕소군의 고향이 있는 호북성 자귀현을 지나면서 지은 시, 영회고적 시이다.  왕조의 멸망이 가까운 시절 자신을 몰라 내쳐버린 숙종 황제를 향한 서운한 마음이 일생의 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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