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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亂中日記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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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난중일기亂中日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조선 침공을 명령한다. 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20 여 만 명의 왜군 앞에 낙엽처럼 스러지는 조선군이었다. 조선 육군은 연전연패를 당하며 순식간에 온 나라가 유린당한다. 하지만 조선의 바다는 달랐다.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의 지휘아래 조선 수군은 23전 23승을 거둔다. 결국 일본은 조선 침략에 실패하고 만다.

 

불패 신화 이순신 장군은 1592년부터 눈을 감기 이틀 전까지 2,539일간의 기록, 난중일기를 남겼다. 7년이나 이어진 전쟁을 치른 장군 이순신의 모습부터 한없이 약했던 인간 이순신의 모습까지 남겼다. 이순신 장군이 남긴 13만여 자의 진솔한 기록, 난중일기는 조선 수군을 이끈 한 장군의 개인적인 기록을 넘어 세계가 함께 보전해야 할 기록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1597년 9월 15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훼손되거나 소멸할 위기에 처한 귀중한 기록물을 보존. 이용하기 위해 선정한다.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난중일기가 등재되었다. 난중일기는 1962년 국보 76호로 지정되었다.

세계기록유산 선정 기준은 중요한 역사적 시기 이해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며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임진왜란의 난중일기는 동북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일본의 침략전쟁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과 명나라. 일본이 참전해서 아시아 최초의 세계 대전이었다. 

 

전 세계인들이 함께 보존해야 할 기록, 세계기록유산은 Memory of the World로 표시한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한국의 세계기록유산은 16개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쓴 이순신 장군은 또 하나의 기록을 남겼다. 임진장초壬辰將草이다. 국보 76호로 난중일기와 함께 지정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하루의 일정과 공. 사적 만남. 개인적 일과 감정을 담았다. 글씨체는 빠르게 쓴 초서체로 되어있다. 임진장초壬辰將草는 선조에게 보고하기 위해 쓴 공식 문서이다. 

 

초서체는 많은 획수를 빠르게 적을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글자 해독에 어려움이 따른다. 전혀 다른 글자로 오독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난중일기 속 원균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30회 이상이 된다. 

"원균의 말은 극히 흉측하여 거짓되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다" (1593년 7월 21일)

 

"원균이 술을 마시자고 하여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하여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지껄이니 매우 해괴하다"(1593년8월26일)

 

"원흉(원균)은 곤장 40대를, 장흥 부사는 20대를 맞았다고 했다".(1593년 3월 12일 )

지금과 마찬가지로 축약 표현을 좋아했던 당시 사람들은 원균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줄여서 원균 경상우수사, 원수사라고 썼다. 

 

 

난중일기는 이충무공전서를 간행될 때  이순신의 일기 친필 초고를 해독한  편찬자 윤행임과 검서관 유득공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충무공전서는 정조 19년에 간행한 이순신 전집으로 이순신의 행적.일화. 인품. 전언 등을 망라한 책이다. 

 

 

이순신 장군은 일기를 쓰면서 그해 간지를 따서 표지 제목을 붙였었다. 임진 계사 갑오 을미(미발견) 병신 정유 무술을 따서 임진일기, 계사일기, 갑오일기, 을미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무술일기로 이름을 붙였었다.

7년간의 기록에 진심이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진 1592년 5월 초까지 일기가 이어지고 1592년 6월 11일~8월 23일까지 비어있다. 한산도대첩이 이 시기에 있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였던 1594년부터 1596년까지 기록이 빼곡하다. 1595년 을미년 일기는 원본(친필 일기)이 미발견 상태다. 정조 시절 <이충무공전서> 편찬 시 근거 자료가 남아있었다는 뜻이다. 

※문화재 발견 시, 문화재청(1600~0064)으로 신고한다.

 

1597년 정유년 1월 ~3월 석 달이 비어있다. 정유년 초반에는 이례적으로 기록이 비워져 있다. 이순신이 출병 명령을 따르지 않자 대노한 선조는 명령 불복종으로 이순신을 파직한다. 다행히 사형만은 면하고 백의종군하게 된다. 감옥에 갇혀있어서 일기를 쓸 수 없었다. 백의종군과 함께 이순신의 난중일기가 다시 이어진다. 

 

"맑음, 옥문을 나왔다

조카와 아들...(중략) 같이 앉아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이날 저녁 주변 사람들이 술을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기로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했다"

-1597년 4월 1일 

 

난중일기 어디에도 자신을 투옥시킨 선조에 대한 원망을 단 한 구절도 적지 않았다. 

 

 

 

1597년 8월 ~10월은 일기를 두 번씩 쓴다. 7년의 기록 중 명량대첩 당일이 가장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전쟁 상황을 두 권의 정유일기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첫 번째는 자세히 썼고 두 번째는 보완적인 내용을 추가하여 썼다. 내용을 보완해 주는 두 권의 정유일기이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역사, 명량대첩鳴梁大捷 전날, 1597년 9월 15일 백의종군에서 돌아온 이순신 앞에는 궤멸직전의 조선 수군만이 남아있었다. 장군은 병사들에게 외쳤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오, 죽고자 하면 살것이니 목숨과 바꿔서라도 조국을 지키고 싶은 자는 나를 따르라"

-1597년 9월 15일 

 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조선의 수군은 배는 단 13척, 일본군은 330여 척에 이른다. 

제장들을 스스로 중과부적이라고 헤아려 피하고 도망갈 궁리만 하였다.(1597년 9월 16일)

"안위야,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네가 군법에 죽으려 하느냐?

도망가면 어디서 살 것이냐?"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독려하자 "전 함대가 일시에 쩌렁쩌렁 북을 치면서 일제히 전진했고 각 지자총통, 현자총통을 쏘아대고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니 그 소리가 강산을 진동하게 하였다. 적선  삼십 척을 쳐 부수자 적 함대가 물러나 달아났으며 다시는 감히 우리 군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은 실로 천행이었다".(1597년 9월 16일)

 

 

첫 번째 정유일기에는 정찰부대의 보고부터 전쟁의 승리까지 쓰였다. 정찰부대가 적이 출현했다고 보고한다. 출전해 나가는 과정, 전세가 위험해졌다가 다시 역전하는 순간, 값진 승리를 거두고 그날 당사도까지 후퇴하는 모습을 시간순으로 상세히 기록했다. 두 번째 정유일기에는 적장을 참수한 후 적의 사기가 꺾였다, 지자총통, 현자총통을 쏴서 31척을 격파했다 등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명량대첩에서 장수들은 겁을 먹었다. 앞서 두 달 전 칠천량 해전(1597년 7월 14일)이 있었는데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참패하여 원균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었다. 

조선 수군은 큰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먼저 목을 베어서 효시하고자 했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중략) 사세가 낭패되었을 것이다".(1597년 9월 16일)

대장선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장수들을 독려해 전투에 나서게 했다. 

 

"방답의 병선 담당 군관과 아전들이 병선을 수선하지 않았기에 곤장을 때렸다". (1592년 1월 16일)

"도망간 군사 8명을 잡아왔기에 주모자 3명은 처형하고 나머지는 곤장을 쳤다". (1594년 7월 26일)

 

1594년 갑오년 5월 9일부터 시작해서 13일 잠시 소강상태가 되다가 14일부터 다시 장맛비가 이어진다. 장마는 5월 말에 끝난다. 난중일기에 진짜 날씨를 세세히 기록했다. 1594년 음력 5월 9일은 양력 6월 26일 경이다. 

현재 장마기간과 유사하다. 일기를 쓴 날 중 42일만 제외하고 날씨를 기록했다. 16세기 18~33일 동안의 장마기간은 지금과 비슷하다. 주로 밤에 찾아오는 게릴라성 폭우가 16세기에도 주로 오후. 밤에 많이 내렸다. 

난중일기의 세세한 날씨 기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날씨 연구 자료이다. 조선 왕조실록에도 기상 이변. 재해 기록은 있지만 난중일기처럼 해안 지역 날씨 변화 기록은 거의 없다. 

 

"더위가 쇠라도 녹일 것 같다".(1594년 6월 11일)

"큰 섬이 찌는 듯하다".(1594년 6월 22일)

'추워서 살을 도리는 것 같았다"(1596년 1월 9일)

"추위가 갑절이나 심했다"(1597년 11월 26일)

 

일기로 당시 날씨가 실감 날 정도로 기록되어 있다. 일기 첫머리에 무조건 날씨를 기록했다. '맑음', '비가 왔다"라고 간단하게 쓸 때도 있지만 자세하게 쓰기도 했다.

"새벽 2시께 비가 오다 눈이 오다 했다, 오전 8시부터는 바람과 눈이 크게 불어쳤다"(1597년 10월 21일)

 

1597년 정유년은 이순신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해였다. 억울한 옥살이를 마친 후 백의종군에 나선 이순신을 기다리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아흔의 어머니가 아들의 투옥 소식을 듣고 급히 여수에서 아산까지 배를 타고 올라오다 돌아가신 것이다.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 조차 캄캄해 보였다, 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함은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으랴, 오직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1597년 4월 13일)

 

"어이하랴, 어이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으랴, 빨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1597년4월 19일)

아버지의 임종도 못 지킨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더 큰 고통이 되었다. 

 

"어머니를 떠나서 다시 남쪽에서 설을 보내니 지극한 회한을 이길 수가 없다"(1592년 1월 1일 난중일기 첫 기록)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1594년 1월 1일)

"어머니의 안부를 알지 못하니 걱정이 되고 눈물이 난다"(1595년 6월 4일)

난중일기에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표현할 때 '천지'를 자주 사용했다. 천지天只 '유일한 하늘'이라는 의미이다. 

이순신 장군은 4형제 중 셋째였는데 첫째 희신, 둘째 요신이 일찍 사망했다. 형님들을 대신해서 극진히 모시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아내의 병세가 아주 위중하다는 것이었으니 벌써 생사 간 결말이 났을지도 모른다"(1594년 8월 30일)

"아들 염의 병이 차도가 없다 하니, 매우 걱정이다"(1593년 7월 29일)

 

"감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천지가 어둡고 밝은 해 조차 빛이 바랬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

(1597년 10월 14일)

어머니를 잃고 나서 아들 면을 잃었을 때 쓴 일기이다. 어머니와 아들을 잃고도 전투에 나서야 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도야여년度夜如年' 하룻밤 지나기가 1년 같구나(1597년 10월 14일)로 기록했다. 

아들 면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날 고통을 절절하게 썼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점占을 쳤다. 

17번 기록이 나온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칠 일이 길한지 점을 쳤다"

(1594년 9월 28일)

 

"홀로 앉아 면의 병세가 어떤가를 생각하고 글자를 짚어 점을 쳐보니 아주 좋았다. 조금 마음이 놓였다"(1594년 7월 13일)

 

난중일기에 몸이 불편하다는 기록이 90회 이상이다. 기록 가운데 눈에 띈 증상은 식은땀이었다.

"식은땀이 때도 없이 흘러 옷을 적시어"(1593년 8월 12일)

"몸이 불편하여 밤새도록 식은땀을 흘렸다"(1596년 2월 30일)

"식은땀이 등을 적셔서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불도 젖었다"(1596년 3월 17일)

자한증(다한증)은 비정상적으로 땀을 흘리는 증상으로 지나친 정신적 긴장 등으로 유발한다. 

난중일기 기록을 분석한 결과 소음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소음인은 내성적이고 세심한 성향을 가지고 있고 속이 냉하다. 

 

다른 증상 관락癨亂이 있었다. 구토하고 설사하는 것이다.

"새벽 두 시 경에 곽란이 일어났다

인사불성이 되어 거의 깨어나지 못 할 뻔했다

토하기를 십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했다"(1597년 8월 21일)

"곽락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1597년 8월 22일)

 

"몸이 몹시 불편하여 온백원 네 알을 먹었다"(1593년 5월 18일)

이순신 장군은 온백원을 처방 받은 기록이 있다. 온백원은 천초초, 후박, 인삼, 파두삼 등 약재를 갈아서  꿀로 버무려 환으로 먹는 약이다. 

 

이순신 장군은 술을 많이 드셨다. 과하주, 여름을 지나는 술을 드셨다. 

술과 관련된 기록이 무려 90회 이상이다. 만취. 주취로 인한 실수가 여러 번 기록되었다. 

"크게 취해 돌아와서 밤새도록 토했다'(1594년 7월 25일)

"경상좌수사가 와서 이별주를 마시고 전송하고는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1596년 3월 9일)

"위로연을 베풀어 종일 술을 마시고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1598년 11월 8일)

 

부하들과 술잔을 나누면서 의논했다는 내용이 많다. 부하들과 소통하려고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왜군은 1598년 11월 패색이 짙어지자 명과의 밀약을 통해 탈출을 도모한다. 난중일기에는 왜군이 명에 바친 물품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왜선 3척이 말 한 필과 창, 칼 등을 가져와 도독에게 바쳤다"

(1598년 11월 16일)

 

하지만 이순신은 왜군에게 퇴로를 내어줄 수 없었다. 왜적의 중간 배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하였다.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1598년 11월 17일 난중일기 마지막 기록)

그리고 이틀 뒤 1598년 11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마지막 말은 남겼다.

 

"戰方急愼勿言我死 전방급신물언아사,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전쟁 중 부하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남긴 말이었다. 돌아가는 왜선 500여 척 중 200여 척을 격파하고 온전하게 돌아간 왜선은 불과 50여 척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마지막 전쟁을 일기에 남기지 못한 채 성웅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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