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무신 정권 5번째 무소불위의 집권자, 최충헌 암살 시도
1211년 고려 희종 7년 최충헌이 왕을 알현하기 위해 입궁한다. 환관은 술과 음식을 준비했다며 사병들을 곁채로 안내한다. 이때 갑자기 10여 명의 무사들이 나타나 격투가 벌어지고 최충헌은 황급히 희종에게 도움을 청한다. 하지만 희종은 최충헌을 외면했고 최충헌은 다급히 장지문 사이로 몸을 숨겼다. 최충헌이 숨자 어떤 승려가 세 차례나 뒤졌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최충헌의 암살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동생 최충수를 죽이고 최고 권력자가 됐지만 이미 수차례 최충헌 암살 시도가 있었다.
최충헌 암살 시도 대표 사건
신종 원년 (1198) 5월 사노 만적의 난
신종 2년 (1199) 8월 황주목사 김준거 등의 반란 모의
신종 7년 (1204) 7월 장군 이광실 등 30여 명의 암살 모의
희종 5년 (1209) 4월 청교역리들의 암살 모의
만적이 봉기할 때 최충헌이 첫번째 목표였다.
'사노私奴 만적 등 여섯 명이..."먼저 최충헌 등을 죽인 후 각자 자기 주인들을 때려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리자"
-고려사 열전 최충헌
황주 목사 김준거는 개경으로 잠입해서 최충헌을 암살하려고 했다. 장군 이광실은 최충헌의 친구이다. 이광실은 친구 최충헌을 죽이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청교역은 개경과 장단 사이의 역으로 거기의 역리들이 최충헌을 죽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암살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오히려 최충헌은 자신을 위협할 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최충헌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세력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연루되거나 동조한 사람과 친속들까지 예외 없이 강력한 처벌을 한다.
외조카 박진재는 자신의 문객들이 관직에 오른 사람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술만 취하면 최충헌의 나쁜 점을 입에 올리고 다녔다. 최충헌은 조카 박진재의 다리 힘줄을 끊는 형벌을 내리고 백령진(백령도)으로 유배 보냈고 얼마 안 돼 사망한다.
교정도감敎定都監이 만들어진 계기는 청교역리 사건이었다. 사건이 벌어지자 최충헌은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성문을 폐쇄하고 청교역리 사건의 가담자들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였다. 교정도감은 청교역리 사건 이후에도 최충헌 반발 세력을 색출, 처벌하는 역할을 했다. 도감은 임시 기구였지만 교정도감은 향후 최씨 정권의 무신 정권의 핵심 기구로 정착된다.
교정도감을 통해서 반대파들을 숙청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교정도감은 처음에 정보기관으로 시작되었는데 교정도감의 우두머리 교정별감을 최충헌이 오래 겸하게 되면서 최충헌의 의지를 정치에 반영하는 통로가 된다.
'최충헌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모든 명령은 반드시 도감을 통해 나오게 했으며...'
-고려사 지 제사도감각색 교정도감
교정별감의 관직은 최씨 가문의 권력으로 4대 62년간 대대로 최충헌의 자손들이 맡는다. 도감은 위원회라는 관청의 이름이고 별감은 도감의 장長이 되는 관칙의 이름이다. 최충헌이 모았던 사병 집단의 이름을 도방都房이라고 했다.
도방都房은 고려 시대 무신정권의 사병집단이다. 도방을 처음 창설한 사람은 경대승이었다. 경대승의 도방을 최충헌이 부활시켰다. 도방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힘이 있어야 했다. 최충헌을 경호해야 하는 사병집단으로 힘이 센 자들을 고용해서 여섯 번番으로 나누어 각자 맡은 날에 최충헌 집에 숙직하게 하고 이를 도방이라 불렀다. 초충헌이 외출을 할 때는 모든 번番들이 호위하게 하였는데 마치 전쟁에 나가는 것처럼 삼엄히 무장했다.
최충헌 암살 시도 사건의 주모자. 희종
희종은 20살에 태자에 책봉되어 24세에 고려 제21대 왕으로 즉위했다. 희종은 아버지 신종과 차이가 있었다. 20대에 혈기왕성한 나이에 왕이 되었고 태자 시절을 4년 동안 거치면서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무신란 이후 무신 집권자들에 의해 옹립되었던 명종, 신종과 달리 희종은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왕위를 계승받았다. 그러나 희종의 즉위에 최충헌이 영향을 미쳤다. 아버지 신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등창이 심해져서 왕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204년에 신종은 병이 깊어지자 태자에게 양위할 뜻을 밝혔다.
최충헌이 문병 온 자리에서 최충헌에게 이야기 했다. 희종 즉위 직후 최충헌에게 우호적이었다. 즉위 직후 최충헌을 파격 승진시켰다.
최충헌의 암살 시도가 있었지만 간신히 생사 고비를 넘겼다. 한편 급보를 받은 최충헌의 사병들이 궁밖에 집결한다. 하지만 최충헌의 생사를 몰라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때 노영의라는 사람이 지붕 위에 올라가서 최충헌이 무사하다고 고함을 지르자 사병들을 곧바로 궁궐로 진격해서 치열한 전투 끝에 최충헌을 구해냈다. 암살 위기에서 살아난 최충헌은 주모자를 색출하기 위해 국문을 시작한다. 환관을 잡아 이들을 국문하니 내시랑중 왕준명이 주모자가 되고 왕의 측근 대부분이 가담한 것이 밝혀진다. 최충헌의 암살 시도 사건의 배후는 희종이었다.
최충헌의 권력이 지나치게 왕권을 위협하던 시기였다.
'최충헌의 권세가 임금과 다툴정도가 되고 위세가 온 나라에 떨치게 되자 자기의 비위를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처형해 버렸기 때문에 다들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못 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기록에 의하면 왕이 거처하는 궁궐은 왕의 사저, 개인집이 되버렸고 나랏일을 논의하는 장소는 최충헌의 집이었다.
'최충헌이 사저에 머문 채 문.무관의 인사를 결정하여 왕에게 아뢰면 왕은 머리를 끄덕이고 최충헌은 궁궐에 출입할 때 평복을 입고 일산을 썼으며...'
-고려사 열전 최충헌
최충헌의 권력은 왕을 넘어서고 있었다. 당시 최충헌에 대한 괴소문이 나라 안에 퍼졌다. 최충헌의 집에 웅장하고 화려한 별당을 지으면서 안 좋은 기운을 제거하기 위해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를 몰래 붙잡아 오색 옷을 입혀서 네 모퉁이에 묻어 토목 공사의 해로운 기운을 물리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숨기거나 도망가기도 했다. 이 틈을 타서 불한당들이 아이들을 납치해서 부모에게 돈을 뜯어내고 풀어주기도 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최충헌은 소문을 극구부인하며 범인들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최충헌에 대한 민심을 알 수 있는 사건이다.
무소불위의 최충헌 절대 권력은 부패한다.
고려 시대에는 12월달에 관리 인사이동을 하는데 뇌물이 너무 적다며 관리 인사를 늦추기도 했다.
축적한 재산으로 관리들을 불러 잔치를 열거나 나라 살림에 보태라고 내놓기도 했다.
희종은 왜 최충헌 암살을 시도했을까?
왕숙은 명종의 맡아들이며 1173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1197년 최충헌에 의해 명종 폐위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1210년 희종 6년 12월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무려 13년 만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명종의 맡아들 왕숙은 강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다. 고려의 왕 희종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희종의 최충헌 암살 시도 사건 1년 전 갑자기 개경에 등장했던 것이다.
왕숙은 1211년 정월이 되면 수사공. 상주국. 한남공으로 책봉된다. 왕숙이 왕족으로 다시 복권되었다는 의미이다. 최충헌은 명종이 죽었을 때 맏아들을 문상도 못하게 한다. 유배지에서 개경으로 오지 못했었다.
최충헌은 갑자기 왕숙을 개경으로 불러들이고 왕족으로 복권시킨다.
희종과 최충헌 사이에 뭔가 암투가 있었고 위협을 받은 희종이 급하게 최충헌 암살을 모의한 것이다.
최충헌은 희종을 왕에서 폐위시키고 강화현(지금 강화도)으로 유배 보내고 조금 있다가 자란도(지금의 영종도)로 옮긴다. 태자 왕지는 인주로 내쫓으며 나머지 아들들도 내쫓았다.
무신정권에 유일하게 맞섰던 왕 희종은 한순간에 몰락했다. 최충헌은 희종을 살해하겠다는 부하를 말렸다.
"내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었던들 왕의 부자가 지금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고려사 열전 최충헌
희종을 폐위시킨 최충헌은 강종을 옹립했다. 강종은 명종의 맡아들 왕숙이었다. 강종은 즉위 당시 60세였다. 고려 왕 중 최고령으로 즉위한 왕이다. 강종에게는 19살 아들이 있었고 태자로 책봉한다. 강종 다음 왕 고종이 된다. 고종은 강종의 아들로 고려 최장기 46년간 재위한 왕이다. 최충헌 집권기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 폐위시킨 희종, 강종, 고종까지 5명의 왕을 쥐락펴락했다.
고종 3년 1216년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한다. 고려 정부는 거란군을 막을 방법을 전혀 세우지 않고 있다.
단오에 최충헌이 백정동의 궁궐에서 그네 놀이를 열고 4품 이상의 문.무관에게 사흘 동안 잔치를 베풀어주었다. 변방에서 거란군이 침입했다는 급보를 날리자 최충헌은 사소한 일로 역마를 귀찮게 하고 조정을 놀라게 한다고 역정을 내었다. 꾸짖으며 보고를 한 사람을 유배 보냈다.
거란족의 처들어 왔는데 거란과 대적할 만한 고려군이 없었다. 능력 있는 병사들은 모두 최충헌 사병 소속이었다. 최충헌은 자기 집에서 전투 연습을 검열했는데 문의 섬돌이 가팔라 말이 올라가지 못하자 사람으로 말 모습을 하게 하고서 진격하고 후퇴하며 서로 싸우게 하였다. 또한 거란의 장군들이 금패를 차고 있는 인형을 만들었다가 이것을 사로잡아 죽이게 한 다음 개가를 올리면서 귀환하게 꾸미기도 하고 기생들을 시켜 봉래산 선녀와 와서 축하하는 춤을 추게도 했다.
1200년대 13세기 초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에 변화가 찾아온다.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 되는 몽골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몽골이 강성해지자 금나라 치하에 있던 거란족 중 일부가 몽골군에게 쫓기는 상황이 된다. 쫓기던 거란족이 고려로 들어오게 되었다. 거란군의 규모는 컸다. 고려 측 기록에는 수만, 원나라 측 기록에는 9만이라고 되어 있다. 거란은 고려를 침략하려는 것이 아니라 몽골에 쫓겨 들어온 것이다. 쫓겨 와서 군량미가 없었기 때문에 고려에 와서 약탈했다. 그래서 압록강을 건넌 지 한 달 만에 지금의 평안북도 일대를 유린했다.
고려는 거란과 3년 동안 전쟁을 치른다. 고려의 위기 상황에서 최충헌은 자신을 경호하는 사병집단 양성에 집착한다. 거란군에 맞서 장수들을 파견하려고 했는데 용맹한 자들은 모두 최충헌 부자의 문객들인 반면 관군은 약골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 최충헌의 사병은 수만 명이었으며 창 자루에 은병을 서너개 씩 매달고서 나라 사람들에게 과시하며 군사를 모집하였다.
사병들 중에 관군으로 종군하겠다고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바로 먼 바다 섬으로 유배 보냈다.
거란과의 전쟁 중 최충헌 암살 시도가 발생했다. 흥왕사, 홍원사, 경복사, 왕륜사, 안양사, 수리사 등에서 종군한 승려들이 최충헌을 죽이기로 모의한 후 반란을 일으켰다.
최충헌이 공사를 일으키면서 절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므로 승려들의 불만은 컸다. 고려의 불교는 정치권력과 밀착되어 있었다. 무신란 이후에도 불교계와 문벌귀족의 관계는 유지되고 있었다. 최충헌은 집권 이후 불교계 탄압을 강행하였다. 통치에 도움이 되는 사찰 이외에는 남김없이 없애버림으로써 후대의 사람들이 불칙한 마음을 내지 못하게 했다. 불교계는 최충헌 정부의 반감을 가졌고 공격까지 하게 되었다. 최충헌 사병들과의 전투에서 결국 패배하게 되고 모두 죽임을 당한다.
최충헌의 군사들이 추격해 3백 여 명의 승려를 죽인 후 성분을 폐쇄하고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가담자들을 모두 죽였다. 8백 여 명의 승려들이 처형된다. 시체들이 흘러내린 피가 내를 이루었다. 산처럼 쌓인 시체 때문에 사람들이 몇 달 동안이나 지나다니지 못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이긴 승전 장수들을 경쟁자로 여겼다. 조충은 최충헌의 측근으로 관직에 나갔다. 1218년 서북면 원수로 거란군을 대파했다. 최충헌은 1219년 조충 부대의 개선 행사를 취소했다. 거란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는데도 뇌물을 바치지 않아서 벼슬을 얻지 못했다고 탄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불평하자 술자리에 있던 자가 밀고하여 그들을 체포하고 그 일당 백여 명을 보정문 밖에서 참수했다.
조충은 고려군을 이끌고 개경에서 부터 압박하며 밀고 올라가서 평양성 근처의 강동성까지 몰아넣었다. 동북에서 거란을 쫓아온 몽골군이 강동성으로 몰고 있었다. 몽골. 동진과 함께 고려는 연합하여 거란군을 물리쳤다. 고려에서 거란군을 물리쳤지만 몽골과 동진은 고려의 적이었다. 여우를 몰아내려다 호랑이를 만난 셈이었다. 이후 고려는 이로 인해 더 큰 시련을 겪게 된다.
무신 정권 집권자로 23년의 최장 기간 최고의 권력을 누린 최충헌은 말년에 첫째 아들 최우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자신이 아프더라도 문병을 오지 말라고 말한다. 최충헌의 후계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은 첫째 아들 최우에게 넘겨주고 싶었으나 측근 세력이 최우의 동생 최향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최우를 해칠 것을 우려해서 자신의 병문안을 오지 못하게 했다. 예상대로 최충헌 사후 후계 자리를 놓고 형제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최충헌의 바람대로 최우는 권력을 세습받았다.
1219년 9월 최충헌은 천수를 누리고 일흔 하나에 세상을 떠났다.
임자일에 달이 형혹성을 범하였다, 일관이 아뢰기를 "귀인이 죽겠습니다"하니...."
악공 수십명이 음악을 연주하고 자정쯤 최충헌은 숨을 거둔다.
-고려사절요 고종 6년 9월
백관이 흰옷을 입고 모두 참석하여 왕의 죽음과 같이 성대했다.
최충헌은 자신이 폐위시킨 왕의 딸과 자신의 자손을 혼인시켰다. 강종의 서녀를 자신의 셋째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종실 수춘후의 딸은 아들 최향과 혼인시켰으며 희종의 딸 덕창궁주는 아들 최성과 혼인시켰다.
'최충헌은 미천한 데서 몸을 일으켜 나라의 정사를 전권하였다,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며 벼슬을 팔고 옥사를 흥정하였으며... 심지어 두 왕을 내쫓고 조신을 많이 죽이기까지 하여서 크나큰 악이 위로 하늘에까지 통하였는데도 목숨을 잘 보존하여 방 안에서 죽었으니 천도를 알 수 없음이 이와 같은가"하였다'
-고려사절요 고종 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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