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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빼앗긴 비둘기 최씨 정권의 시작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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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비둘기 최씨 정권의 시작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26년 후 1196년, 고려 무신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가 비둘기를 강탈당한다.

비둘기 강탈사건으로 무신 정권의 일인자가 바뀌게 된다. 

 

1196년 당대 최고 권력자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수가 기르던 비둘기를 빼앗아갔다. 이에 분노한 최충수는 이지영의 집을 찾아가서 돌려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수모를 당한다. 수모를 당한 최충헌 형제는 이의민 세력 제거를 도모한다.

군사를 일으켜 이의민을 급습한다. 무방비 상태의 이의민 세력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결국 이의민은 최충헌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4대 62년간의 최씨 정권의 서막이 올랐다. 

 

최충헌의 권력은 고려 역사상 가장 강했다. 최충헌은 무신 출신으로 상장군 최원호의 아들이었다. 아버지에 힘입어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다. 

최충헌은 종4품 섭장군이었고 동생 최충수는 종8품 동부녹사였다. 최충헌은 평가가 좋은 반면 동생 최충수는 용맹하면서 사나웠다.

 

'공은 젊어서부터 남에게 얽매이지 않으면서 기상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고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었다'

-최충헌 묘지명 

 

'그의 동생 최충수는 시기심과 음험함이 있고 용맹함과 사나움이 있었다.'

-고려사절요 명종 26년 

 

 

 

이의민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13년간 행사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이의민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인사권을 제멋대로 휘두르고 백성들의 거주지를 대거 점탈해 저택을 짓고 남의 토지를 약탈하는 등 온갖 탐학을 저지르니 온 나라가 두려움에 떨었다. 아들 이지영, 이지광은 똑같이 행동한다. 살인과 겁탈을 일삼아 '쌍도자'라고 불렸다. 이의민은 출신은 천민이어서 천민 출신 권력자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서 모든 사람이 이의민이 죽기를 바랐다. 최충헌이 이의민 일가를 죽이고 목을 저잣거리에 내걸었을 때 모든 백성들이 기뻐했다. 

이의민은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믿고 왕좌를 넘봤기 때문에 반감을 더 불러왔다. 

 

 

 

이지영은 이의민의 아들이면서 '쌍도자'라고 불린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최충수가 기르는 비둘기는 '전서구'이며 편지를 보내는 데 쓸 수 있게 훈련된 통신용 비둘기이다. 

고려사에는 전서구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고려 시대에 비둘기를 키웠다는 기록은 있다.

'민간에서 비둘기와 매 기르는 것을 금지하였다, 관직에 있는 자들이 공무를 돌보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려사 세가 고종 14년 

 

'공민왕이 기르던 비둘기가 대궐에 있었는데 신우(우왕)가 항상 아끼고 사랑하였다'

-고려사 열전 이무방

 

아마 최충수의 비둘기도 전서구가 아니라 관상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충헌은 이전 정권을 잡은 무신들과 달랐다. 명종에게 정치 개혁안 '봉사 10조'를 올린다. 

봉사 10조

제1조 왕은 정전正殿, 연경궁(延慶宮)으로 환어할 것

제2조 필요 이상의 관원 용관冗官을 도태시킬 것 

제3조 토지 점유를 시정할 것

제4조 조부組賦를 공평히 할 

제5조 왕실에 공상供上을 금지할 것

제6조 승려를 단속하고 왕실의 고리대업을 금할 것

제7조 청렴한 주.군의 관리를 등용할 것

제8조 백관으로 하여금 사치를 금하고 검약을 숭상케 할 것

제9조 비보裨補 이외의 사찰을 도태시킬 것 

제10조 관리등용에서 인물을 가려 등용할 것 

 

최충헌은 기존 무신과 달리 개혁안을 통해 비전을 제시한다. 봉사 10조 제시 후 지방의 민란은 진정 국면을 맞았다. 명종에게 청을 넣어 권세를 얻고 승진한 내시 50명을 궁에서 축출한다. 왕자로서 중이 된 소군 홍기.홍추 등이 궐내에 있었는데 정사에 관여한다 하여 사찰로 돌려보냈다가 섬으로 유배 보낸다. 명종의 측근들을 제거했고 명종은 손발이 묶여버린다.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쥔 최충헌, 최충수 형제, 1197년 최충수는 형 최충헌에게 고려 19대 왕 명종의 폐위를 제안했다.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하기로 결정하고 병력을 일으켜 궁궐을 장악하고 명종의 측근을 제거한다. 결국 격동의 무신 시대 28년간 권좌에 허울뿐인 왕으로 있었던 명종은 비참하게 폐위된다. 

 

19대 왕 명종은 무신정변 이후 정중부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까지 실세들을 다 겪은 왕이었는데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다.

'당시 태자 왕숙은 내원의 북궁에 있었는데 최충헌의 사자가 와서 다그치자 태자비와 함께 궁궐 문을 걸어 나와 비를 맞으면서 역마를 타고 강화도로 쫓겨갔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최충헌이 명종을 폐위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어처구니가 없다.

"지금의 임금은 왕위에 있은 지 28년이나 되어 늙은 데다 일에 염증을 내고 있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최충헌은 명종 폐위를 시작으로 신종. 희종. 강종. 고종까지 무려 네 명의 왕을 옹립한다. 

다른 정권과 달리 최충헌은 독자적으로 정치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왕도 바꿀 수 있는 권력을 가졌다. 

최충헌이 집권 시기  1196년은 무신정변 1170년 이후 26년 해이다.

 

무신란의 주역들이 은퇴를 하거나 죽거나 해서 자연스럽게 세대가 교체되고 있었다.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았다는 한계점을 넘을 수 있는 무신정권의 정통성을 옹립할 필요가 있었고 최충헌은 무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은 인물로 무신정권 재정립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최충헌이 명종을 폐위한 것은 무신정변의 흔적을 지워내는 것이었다. 

 

최충헌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가 운으로 따랐고 문객門客의 후원이 있었다. 

문객門客은 세력가의 집에 기거하면서 생활을 보장받고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무리이다. 

문객이 칼을 들면 사병이 되고 글을 읽고 조언을 하게 되면 참모가 된다. 문객의 존재는 무신 집권기에 독특한 현상이다. 

 

고려시대 무신들은 '가동.가노'라 불리는 사노비를 무장시켜 사병으로 양성했다. 문객들도 무장을 하고 사병 역할을 한다. 최충헌은 문객이 가장 많을 때 3천 명에 가까웠다. 

 

최충헌과 최충수가 옹립하려던 왕이 달랐다. 최충수는 명종의 종친 왕진을 추대했고 최충헌은 명종의 동생 왕민을 새임금으로 생각했다. 고려시대는 왕의 아들보다 동생을 후계자로 삼는 경향이 강했다. 최충수가 왕의 종친 왕진을 옹립하려 했던 이유는 왕진의 여종에게 최충수가 마음을 두고 있어서였다. 

최충헌은 금나라로부터 책봉 문제를 들어 최충수를 설득하여 왕민을 왕위에 앉힌다. 

고려 20대 왕 신종이며 즉위 당시 53세 였다. 형제 사이에 왕 옹립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얼마전 왕으로 즉위한 신종의 며느리, 고려의 태자비가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최충수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혼인시키기 위해 강제로 태자비를 몰아냈던 것이다. 최충헌이 최충수를 찾아가 혼인을 반대하며 갈등을 빚는다. 

 

'최충수가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왕에게 강요했으나 왕은 불쾌해했다.....

기다리다가 최충수가 나인더러 "주상께서 이미 태자비를 내보내시지 않았는가?" 떠보자 나인이 그 말을 왕에게 알렸고 왕도 어쩔 수 없이 태자비를 내보냈다'

-고려사 열전 최충헌 

 

최충헌은 반대 이유를 말한다.

"과거 이의방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가 결국 남의 손에 죽었네, 지금 그 패망한 전철을 밟는 것이 옳은 일인가?"

-고려사 열전 최충헌 

 

 

 

최충수는 형 최충헌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왕실과의 혼인을 추진하자 형제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최충헌은 대역죄인 최충수를 척살하라는 황명을 얻어내고 최충수에게 칼을 겨눈다. 최충헌 부대의 맹공에 최충수 부대는 참패한다. 최충수는 겨우 몸을 피해 파주까지 도망친다. 뒤 쫓아 온 최충헌 부대에게 붙잡혀 비참하게 생을 끝낸다. 동생 최충수가 제거되고 최충헌은 최고 권력자로 우뚝 선다. 

 

사건의 본질은 최충헌. 최충수 형제의 권력 다툼이다. 최충수가 최충헌의 말을 듣고 혼인을 그만 두려고 했을 때 최충수 문객들이 반대하고 나선다. 형에게 밀리게 되어 문객을 해산시키고 혼인을 포기하려고 한다. 그러자 문객들은 "저희들이 공의 문객이 된 것은 공께서 세상을 덮을만한 기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약해서 겁을 먹는 것은 저희들을 파멸시키는 것입니다, 한번 싸워서 승패를 결정짓도록 하십시오"라고 한다.

형제간의 권력 다툼은 최충수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따르고 있었던 문객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최충헌의 권력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임금 보기를 마치 흙으로 만든 인형처럼 여기어 왕을 페하고 세우는 것이 그의 손안에 있었다'

-동국통감 신종7년 

 

최충헌은 고려 후기 무신집권 최고 권력기관, 교정도감敎定都監을 만들어서 4대 62년 최 씨 정권을 수립한다. 훗날 최충헌은 강종의 서녀와 혼인을 하고 최충헌의 부인 임씨를 '수성택주'로 책봉한다. '택주'는 고려시대 왕녀에게만 붙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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