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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문신의 멸망, 무신정변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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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의 멸망, 무신정변

1170년 음력 8월 30일 첫째 날 사치와 향락에 빠진 고려 18대 왕 의종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문신들과 놀음판을 벌인 지 벌써 여려 해였다. 궁 밖으로 나도는 왕과 무신들을 호위하는 무신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의종이 연회를 위해 보현원으로 향한다. 어가보다 먼저 들어간 무신들이 병력을 장악하고 수많은 문신들을 살육한다.

 

1170년 음력 9월 1일 둘째 날 의종을 모시던 환관들이 무신들을 막기 위해 모의한다. 그러나 밀고를 받은 무신들은 20여 명의 환관들도 무참히 살해한다. 

 

1170년 음력 9월 2일 셋째 날 정변 삼일 째 보현원에 억류되어 있던 의종은 폐위된다. 의종의 동생을 고려의 새로운 왕 제19대 명종으로 내세운 무신들은 의기양양하며 향후 100년간 집권하는 고려의 새로운 지배층이 되었다. 

 

'이고.이의방 등이 사람을 시켜 길에서 외치기를 "모든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비록 서리일지라도 씨를 남기지 말게 하라" -고려사절요 의종 24년(1170)

 

사흘동안 진행된 무신정변은 고려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문벌 귀족에서 무신으로 집권 세력이 교체되는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서 무신정변이 일어난 1170년은 고려 왕조 5백 년의 중간으로 고려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기점으로 나뉜다. 

 

무신 정변의 원인은 사치와 향락에 빠진 의종의 실정이다. 

 

'불행하게도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가 좌우에 나열되어 정치에 부지런해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에 돌렸으며

풍월을 읊는 것으로써 신하와의 정치에 대한 의논을 대신하였으니 점차 무인의 노여움이 쌓여 화가 장차 이르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 (1170)

 

사치와 향락이 도가 넘쳐 왕이 잔치에 쓸 배를 만드는데 3년이상 걸렸고 배 50여 척에다 비단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정자를 짓고 연복정이라 이름 지었는데 물이 얕아서 배를 띄울 수 없으므로 제방을 막고 호수를 만들었다.

 

'그 땅이 흰 모래로 되어 있고 물결이 세차서 비만 오면 무너지고 무너질 때마다 보수하니 백성들이 주야로 쉬지 못해 매우 괴로워하였다'

-고려사절요 의종 21년 (1167)

 

의종은 매번 술판을 벌이고 잔치를 했다. 심지어 고려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기록이 웃긴다.

"가을 7월. 또 어제처럼 술판을 벌였다'

-고려사 세가 의종 24년 (1170)

 

술판을 벌이다가 왕실의 막대한 재정이 고갈되었고 신하들의 집을 빼앗았다. 일반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왕실 소유로 했다.

'또 개인의 집을 많이 빼앗아 별궁으로 삼았으며 백성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 환관을 시켜 관리하게 하니'

-고려사 세가 의종 16년 (1162)

 

제17대 왕 인종의 장자로 태어나서 어릴 적 7살에  태자로 책봉된  제18대 왕 의종은 왕이 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하지만 왕과 왕비가 보기에도 원자가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할 정도로 문제가 있었다. 어머니 공예왕후는 둘째 아들을 사랑하여 그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동생과 비교되어 의종은 상처를 받는다. 

아버지 인종은 1126년 이자겸의 난과 1135년 묘청의 난을 겪었다. 장자 의종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장자이므로 함부로 폐위시킬 수 없었다.

 

어렵게 왕위에 오른 의종은 문신들과 어울려 호화로운 연회를 즐겼다. 반면 무신들은 연회장을 호위하며 갖은 고생을 한다. 정변이 일어난 그날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고구려 무용총 수박도

 

의종은 오병수박희를 좋아했다. 오병수박희는 무기를 들지 않고 맨손으로 상대를 공격,제압하는 무예이다. 

무예에서 파생된 일종의 놀이이다. 의종은 수박을 잘하면 큰 사랑을 베풀거나 승진을 시켜주기도 했다.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를 하라고 하였다 이는 왕이 무신들의 불평을 알고 후하게 상품을 내림으로써 이들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 (1170)

 

종3품 대장군 이소응은 젊은 장수와 맞붙게 된다. 이소응은 나이가 50이 넘었고 젊은 장수를 상대하기 버거웠다. 이소응이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갑자기 문신 한뢰가 앞으로 나가더니 이소응의 뺨을 쳤다.

이때 의종은 여러 신하와 더불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정중부가 소리를 높여 한뢰를 꾸짖기를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모욕을 이다지 심하게 주느냐'

-고려사절요 의종 24년 (1170)

 

고려 시대 관직 체계 

정3품
종3품 
정4품
종4품
정5품
종5품 
정6품 

 

정중부는 한뢰를 무섭게 꾸짖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된다. 대장군 이소응은 종3품이며 뺨을 때린 문신 기거주 한뢰는 종5품이다. 한참 아래 벼슬이다. 하극상 중에 하극상이며 얼마나 무신들이 무시받는지 보여준다. 

 

오병수박희가 끝난지 몇 시간 뒤에 이의방과 이고가 정변을 일으켰다. 왕이 궁궐 밖에 나올 때는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군사들로 이루어진 친위군이 왕을 보호한다. 

친위군親衛軍은 왕의 신변을 지키기 위한 군대이며 일정한 지역에 상주하면서 왕을 호위하는 순검군과 왕이 출타할 때마다 왕을 호종하며 보호하는 견룡군 등으로 편성되었다. 

 

정변의 핵심인물, 이의방과 이고는 친위군의 하급 무신 견룡군 지휘관이었다. 친위군은 현장에서 유일하게 가장 강력한 부대로 이들에 대적할 수 있는 고려군 주력 부대는 개경에 있었다. 이의방과 이고의 계급은 정8품 산원이다. 

무신들이 천대 받는 고려 분위기 속에 비교적 고위급 무신들은 안정적인 지위와 경제력을 누렸지만 하급 무신이나 군졸들은 생계조차 어려웠다. 고려시대는 군인전이 있었는데 제대로 지급을 받지 못하거나 부당하게 빼앗겼다.

※군인전軍人田은 고려 시대 군인이 군역에 복무하는 대가로 국가가 지급하는 토지이다. 

이 무렵 각종 국가 토목 사업에 동원된다. 할 일은 많고 보수는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자 불만이 계속 쌓여갔다. 

 

정변 성공을 위해 고위급 무신을 포섭을 미리 했다. 정변 발생 4개월 전 종3품 대장군 정중부를 이의방과 이고가  찾아갔다.

 

'이의방과 이고가 뒤따라가 은밀히 정중부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문신들은 득의양양하여 취하도록 마시며 배부르도록 먹고 있는데 무신들은 모두 굶주리고 피곤하니 이 어찌 참을 수 있소"

-고려사절요 의종 24년 (1170)

 

정중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실어준다. 정중부를 찾아가기 전에 종3품 대장군 우학유를 이의방과 이고가 찾아갔다. 대대로 무신가문이었던 우학유는 거절했다.

 

'우학유는 거절했다, "나의 선고께서 항시 나더러 ...문관을 없애는 건 썩은 나무토막을 부러뜨리는 것처럼 쉬우나 문관이 해를 당하면 그 재앙이 우리에게 즉시 들이닥칠 것이니 마땅히 조심해야 한다'라고 경계하셨소...죽는다 해도 공들의 말을 따르지 못하겠소"

-고려사 열전 우학유

 

정중부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젊은 날 군에 입대를 해서 승승장구했고 왕실의 호위부대 권룡군 출신이었다. 의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다. 처음에 격구로 인하여 정중부를 가까이하였다. 어사대가 왕의 지시에 따라 수창군의 북쪽 문을 폐쇄하고 소인배들의 출입을 금지했으나 정중부는 제멋대로 문을 열고 출입했다. 어사대에서 법사에 회부해 문초하도록 건의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럴정도로 왕은 정중부를 총애했다.

 

그런데 정중부는 대부분의 무신은 지위를 세습 받았느나 지방 출신 정중부는 자신의 힘으로 종3품 대장군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인종 때 정중부는 문신들에게 앙심을 품게 되는 사건에 휘말렸다. 

정중부는 용모가 웅장하고 뛰어나며 눈동자가 네모났고 이마가 넓었다. 살결이 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신장이 7척이나 되어 그를 바라보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어느 날 연회가 열렸고 정중부는 임금의 호위무사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새파랗게 젊은 문신 김돈중이 술에 취해 촛불로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웠다. 화가 난 정중부가 김돈중을 때리고 욕을 보였다. 김돈중의 아버지는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었다. 김부식은 화가 나서 왕에게 정중부를 처벌하자고 아뢰서 정중부는 곤욕을 치른다. 

 

정변 첫날부터 무신들은 기세를 잡았다. 오병수박희가 끝나자마자 움직였다.

'어가가 보현원 근처에 당도하자 이고와 이의방이 먼저 가서 왕의 명령이라 둘러대며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고려사열전 정중부 

 

 

왕이 막 문에 들어서고 신하들이 물러나는 순간 이고 등이 문에서 직접 임종식과 이복기를 살해했다.

무신 이소응의 뺨을 때린 문신 한뢰는 친한 환관의 도움으로 왕의 탁자 아래 숨어 들어갔다.

정중부는 "화의 근원인 한뢰가 아직도 주상의 곁에 있으니 내보내어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한다. 

한뢰는 왕의 옷을 잡고 나오지 않았다. 이고가 또 칼을 빼 위협하니 그제야 나왔고 즉시 죽여 버린다. 

 

지유 김석재가 이의방에게 말하기를 "이고가 감히 어전에서 칼을 뺀단 말인가"하며 질책한다.

이에 이의방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김석재가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이의방과 이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살육한다. 개경의 궁궐에서만 50여 명의 문신들이 살육을 당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른다. 

 

과거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던 김돈중은 정변이 일어나자마자 도망간다. 

이고와 이의방은 김돈중이 태자에게 정변 사실을 알려서 개경 궁궐의 방어를 강화할 것을 염려했다. 만약 태자가 군대를 동원해 개경을 방어하면 정변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빠른 걸음의 사람을 보내서 김돈중의 소재지를 살폈더니 보현원에서 아직 안 왔다고 말한다. 김돈중이 숨었다는 것이다.

이의방과 이고는 안심을 하고 순검군을 거느리고 밤에 태경궁으로 처들어가 태자는 진도현으로 추방하고 태손太孫은 죽였다. 도망가버린 김돈중의 비겁함으로 인해 무신정변을 막을 마지막 기회를 날렸다. 

 

1170년 음력 8월 30일 보현원에 역류되어 있던 의종은 갑자기 정변 세력에게 칼을 하사한다. 왕이 여러 장수에게 칼을 하사하니 무신들은 더욱 교만. 횡포하였다.

왕이 더욱 두려워 정중부를 불러 난동을 종식할 계책을 의논하니 정중부는 건성으로 "네"만 반복할 뿐 대답하지 않는다.

 

의종은 무신 정변 핵심 세력을 파격적으로 승진시킨다. 의종은 무신들을 회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정중부가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의종의 신임과 지원 때문이었다. 의종은 즉위 때부터 친위 부대를 양성하며 왕권 강화를 했다. 의종이 후원한 대표적 무신이 정중부였다. 

의종은 자신이 양성한 무신들을 회유해 무신 정변이라는 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1170년 음력 9월 1일 정변 다음날, 개경 궁궐에서 환관 왕광취가 무신들에게 반격을 시도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밀고로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환관들의 모의에 분노한 무신들은 내시 왕광취를 비롯해 임금의 행차를 따르는 내시 10여 명과 환관 10명을 살해한다.

 

환관과 내시 차이점

환관宦官은 고려. 조선 시대 궁궐 안에서 일하는 거세한 남성이다. 조선시대에는 환관과 내시가 같은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는 환관과 내시는 다른 의미였다.

고려시대 내시內侍는 거세한 남성인 환관이 아니라 국왕의 총애를 받는 젊고 유능한 문신관료로 국왕 측근에서 시종을 들었다. 고려의 내시는 문벌 귀족의 자제이기도 했고 과거에 급제한 젊은 관료들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내시가 되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고려시대 환관과 내시가 다르다. 의종은 친위부대뿐만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해 환관의 권력을 키웠다.  의종의 측근 정치로 환관, 친위군 등 최측근을 정치 세력으로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우리 역사에서 환관이 권력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의종 시대 측근 정치로 환관들이 권세를 누렸다. 

 

'듣는 이가 모두 탄식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권세가 환관에게 있다니' 하였다'

-고려사절요 의종 13년 (1159)

 

'내시들은 환관들과 밀접히 지내면서 서로 의형제를 맺었으며 

백성들의 재물을 탈취해 임금에게 아첨하는 짓을 일삼았다'

-고려사 세가 의종 23년 (1169)

 

권세를 누렸던 대표적인 환관은 정함이었다. 의종의 신임을 얻어 권력을 남용했다.

'환관 정함의 집은...모두 2백여 칸에다 우뚝 솟은 누각을 찬란하게 채색해 왕궁과 흡사하니...'

-고려사 열전 정함 

 

의종이 환관들의 세력을 키워 준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 인종 대 외척 세력의 이자겸의 난이 있었고 문벌 귀족 묘청의 난으로 왕실 권위가 흔들렸다. 가까이 지켜봤던 의종은 외척과 문벌 귀족에 대한 반감이 컸다. 의종은 선대 왕들과 달리 비교적 한미한 가문에서 부인을 맞이했다. 

1168년 의종이 서경에 행차한 적이 있었다. 묘청의 난 때문에 내가 행차하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행차하게 됐다면서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롭게 해야 한다며 9조의 신령新令을 반포한다. 

 

<의종의 신령 新令>

음양의 이치를 존중하고 따른다.

불사를 숭배하고 중히 여긴다.

승려에게 존경을 바친다.

도교를 따르고 숭상한다.

 

의종의 신령에는 유교를 배척하고 불교, 도교, 음양 사상을 중시했다. 신령에는 유교적 사상이 없다. 이것은 유학자 문신들에 대한 반감을 나타낸 것이다. 의종이 문신들과 어울렸지만 일부 측근들만 선택했고 그들만 권력을 키워줬다. 의종은 의도적으로 즉위초부터 문벌 귀족과 유학자 관료를 배척했다. 의도적으로 환관, 내시, 친위 군을 정치적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것이다. 의종의 측근 세력들은 개인적으로 왕과 연결되어 있고 아첨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였다.

 

의종의 측근 정치의 대표적 인물은 환관 정암이었다. 정암은 의종의 유모의 남편이었다. 정함에게 7품 문반직 벼슬을 내리고자 했다. 고려 시대 환관은 제도적으로 7품 문반직에 오를 수 없었고 대간臺諫들의 7년 동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7품 문반직을 하사했다. 측근들의 권력 강화하는데 의종은 집착했다. 

 

"경들이 고신에 서명하지 않으니 이는 실로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다

만약 서명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을 모두 죽여 젓갈을 담글 것이니"하니...

-고려사절요 의종 12년 (1158)

 

대간을 무시한 의종의 전횡으로 고려 정치 체제는 붕괴되고 있었다. 

※대간臺諫은 고려. 조선 시대, 관료를 감찰하고 탄핵하는 임무를 맡은 대관과 국왕에 대한 간쟁 임무를 맡은 간관을 합쳐 부른 말로 왕과 관료들의 권력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졌다. 

의종은 재위 기간 24년 내내 대간을 탄압하고 협박했다. 대간 들 중에는 뜻있는 문신들은 관직을 버리거나 침묵한다. 결국 의종에게 아첨하는 무리만 곁에 남았다. 간신들은 의종에게 앞다투어 아첨한다. 

 

"신하들이 성덕을 칭찬하기를 '태평세월에 글을 좋아하는 임금'이라 하였다"라고 쓰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 (1170)

정치에서 소외된 뜻있는 문신들의 의종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환관 왕광취는 의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며 무신을 치려고 하자 무신들은 의종이 사주했다고 생각한다. 

 

 

1170년 음력 9월 2일 정변 셋째 날 무신들은 의종을 강제로 폐위시킨다. 궁궐에서 끌려 나와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이날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동생, 익양공 왕호를 데려다가 왕위에 앉혔다. 

무신들에 의해 새로운 왕으로 추대된 고려 제19대 왕 명종이었다. 그러나 허울뿐인 왕의 자리였고 실질적인 권력은 모두 무신들이 쥐고 있었다.

 

고려는 무신들의 시대가 열린다. 무신 정변으로 희생당한 문신의 수는 무신 정변 3일 동안 140~150명으로 추정된다. 

'호종하던 문신과 대소 신료. 환관들 모두가 죽임을 당하였는데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고려사절요 의종 24년 (1170)

 

무신, 문신 모두 두려움에 떨며 살길을 찾아 나선다. 정변을 함께 하자는 이의방과 이고의 청을 거절했던 우학유는 두려움을 느끼고 이의방의 누이와 혼인을 한다. 

명종은 이름뿐인 왕이었고 실질적 권력은 무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무신 정변 이후 중방의 기능이 강화된다. 

※중방重房은 고려 시대 최고위급 무신인 상장군과 대장군으로 구성된 회의 기관이다. 

 

정변 성공 후 무신들은 논공행상으로 내분이 벌어진다. 이의방은 반대 세력 숙청에 나선다. 무신정변의 동지였던 이고가 살해당한다.이고는 먼저 이의방의 권력 집중이 못마땅해서 반격을 가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밀고자가 있었고 이의방은 이고를 쳤다. 

 

'이고는 ...불량배들을 법운사 승려 수혜의 방으로 불러 모아...각자 칼을 소매 속에 품고서...난을 일으키려 했다, 이의방은 평소 이고가 자신을 윽박지르는 것에 원한을 품었으므로... 이고 등이 궁문 밖에 당도하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오자마자 쇠몽둥이로 쳐 죽였다'

-고려사 열전 이의방

 

 

 

1173년 음력 8월 동북면병마사 문신 김보당은 동계에서 군사를 일으킨다. 김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고 다시 폐위된 의종을 복위시키려 한다. 그러나 이의방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고 김보당의 난은 한 달 만에 진압되고 만다. 

 

'9월 안북도호부에서 김보당 등을 잡아 서울로 보내니 이의방이 영은관에서 그들을 심문하고 저자에서 죽였다'

-고려사절요 명종 3년 (1173)

 

김보당은 죽음이 임박하자 고려 모두 문신들과 모의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1173년의 김보당의 난은 문신들이 일으킨 대표적 반反무신란이었다. 1170년 김보당은 당시 무신 정변에 협조했던 인물이다. 

문신들은 무신들의 정권을 3년 정도 지켜보면서 불만이 쌓여갔던 것이다. 김보당의 난으로 인해서 무신과 문신들의 대립은 다시 한번 드러난다. 김보당이 죽으면서 모든 문신들이 가담했다는 말로 인해 후폭풍이 심했다. 모든 문신들을 이의방이 처형했다. 김보당의 마지막 말을 빌미로 남은 문신들마저 학살을 했고 오히려 무신들의 권력 독점 계기가 되었다. 

 

김보당의 난은 폐위된 의종을 복위시키려 했기 때문에 무신들은 의종이 살아있는 한 반란이 계속될 것이라 판단한다. 결국 김보당의 난은 의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결정적 사건이 된다. 

무신 이의민에 의해 의종은 죽음을 맞게 된다.

 

'이의민은 곤원사의 북쪽 연못가로 의종을 끌어내어 술 몇 잔을 올리고는 그의 척추를 꺾어 버렸는데 손놀림에 따라 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껄껄 웃기까지 했다'

-고려사 열전 이의민

 

의종의 나이는 47세였으며 끔찍하고 초라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의민에게 의종 시해를 명령한 인물은 이의방이었다. 이후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왕실에 시집보낸다. 태자의 장인이 되어 명실상부 고려의 일인자가 되었다. 

 

무신정변을 일으킨 하급 무사들은 중하층 지배층인 지방 향리 출신이며 그들이 무신 정변을 통해 권력의 정점에 다다른다. 무신 정변은 하층인 무신이 상층의 문신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은 것이다. 권력과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열어준 사건이다. 무신으로 진입한 지방 향리층이 고려 후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된다. 무신 정변은 폭력과 살육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지만 문벌 귀족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을 분산시켜 다양한 계층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었고 권력 이동의 가능성으로 역동적인 사회를 만들어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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