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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신윤복 조선 후기 의식주 그림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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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조선 후기 의식주 그림

신윤복이 남긴 풍속화 덕분에 조선의 문화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의식주가 어떠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신윤복의 화첩으로 조선 후기 상류 사회의 의식주를 정확히 고증하고 있다.

 

 

<쌍륙삼매> 쌍륙놀이에 빠지다

 

오른쪽 남자는 알상투차림이며 머리에 쓰는 탕건이 옆에 있다. 탕건은 집에서 쓰는 것으로 오늘 모임의 주최자이다. 돗자리 세 장을 차곡차곡 포개서 깔았다. 선비 한 명이 서서 구경하고 있다. 모두 돗자리에 앉으면 그림이 무거워진다.

 

 

기녀와 선비가 한 팔 놀고 있는 놀이는 '쌍륙'이라는 전통 놀이이다. 주사위 한 쌍을 던져 말들을 모두 가장 먼저 옮겨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놀이의 승패는 놀이자의 얼굴에 드러난다. 아마도 지고 있는 선비가 화딱지가 나서 탕건을 확 쳐버린 것일 것이다. 몸에는 땀이 삐질삐질 흐르니 양팔을 걷었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니 담배를 물었고 얼굴빛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앞에 있는 기녀의 얼굴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임하투호> 숲 속의 투호 놀이

 

수묵 톤이 강하고 색은 아꼈다. 나뭇잎에 수분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여름날의 모습이다. 산속 그늘 진곳에 놀이 한 판 벌였다. 화살을 항아리에 던지는 놀이 '투호'를 하고 있다. 

왼쪽에 갓을 벗은 선비와 오른쪽의 화살을 들고 있는 기녀가 대결하고 있다. 선비 얼굴은 짜증이 가득하다. 기녀는 여유로운 승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오른쪽의 선비는 기다란 담뱃대를 물고 있다. 실제 있었던 흡연법이다. 

 

 

<납량만호> 무더운 여름, 흥에 취하다

 

바위 절벽 그늘에 돗자리를 폈다. 긴 돗자리에는 춤추는 사람과 악공들이 같이 올라가 있고 작은 돗자리에는 관객들이 앉았다. 관객, 춤추는 사람, 악공 모두 같은 높이에서 놀이를 즐기고 있다. 조선 시대 춤은 마주 보고 췄다. '대무對舞'라고 부른다. 중요한 한국 춤의 특징은 상체 위주였다. 선비들의 도포 자락이 풍성하고 팔만 잘 움직여도 춤사위는 도포 자락 끝에서 일어난다. 기녀는 저고리가 딱 달라붙어 몸매가 드러나지만 풍성한 치마와 어울려 춤사위는 나풀거린다. 네 명의 악공들이 출장 연주 하러 왔다. 장구, 피리가 두 개, 해금이 있다. 조선 시대 악공들 가운데 유일하게 얼굴이 자유로웠건 것이 해금 주자였고 해금 주자만 고개를 돌리고 있다. 해금 주자 얼굴이 화가 났다. 왜 화가 났을 까 상상력을 자극한다. 

 

 

 

<정변야화> 우물가에서 나누는 야밤의 대화 

 

복숭아꽃이 만개한 나뭇가지 끝에 보름달이 걸려있다. 여인들이 우물가에 물 길러 왔다. 오른쪽에서 지그시 지켜보던 선비는 사방관을 쓰고 있다. 돌담 안은 선비집 마당이다. 

선비는 저녁 먹고 글공부를 하려고 서재에서 책을 펼쳤다. 달빛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책을 덮고 달 구경하러 마당을 거닐던 그때 돌담 너머로 소곤소곤 아낙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지그시 돌담에 손을 얹고 아낙네를 지켜보고 있다. 아낙네들은 선비 출혈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두 명의 여인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오른쪽 여인의 머리에는 수건이 돌돌 말려있다. 물동이를 이고 가려고 한다. 우물가에서 여인들이 달밤의 이야기꽃을 피운 장면을 담아냈다. 

 

 

<무녀신무> 무녀가 신들린 춤을 추다

 

초가집과 낮은 돌담 영락없는 어염집이다.

여염집은 일반 백성의 살림집이다. 돗자리가 세 장이 깔려 있고 굿을 펼치고 있다. 이 집에 뭔가 우환이 있다. 시어머니가 무녀를 불러 굿판을 펼친 것이다. 무녀는 '덜렁'이라는 옷을 입고 있다.

'덜렁'이는 무예청 별감의 옷이며 무예별감武藝別監은 왕의 측근에서 호위하던 무사들이다. 

조선시대 무녀들이 군복을 입고 춤을 췄다. 부채에는 겸재 정선의 수묵화. <금강전도>가 그려져 있다. 

겸재 정선의 부채는 당대 한양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모두 갖고 싶어 했다. 천민 무녀는 진품 금강산 부채는 아니고 모조  작품을 들고 있을 것이다. 

 

 

정선의 금강산 부채는 조선 팔도에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조선 시대 굿판에는 남성은 출입금지였다. 굿을 돕는 장구와 피리재비인 무녀일행을 제외하고 그림에도 온통 아낙네뿐이다.  시어머니 첫째 딸, 둘째 딸일 것 같고 뒤에 장옷을 입은 여인은 며느리일 것이다. 신성한 굿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며느리는 고개를 돌려 지나가는 행인과 눈을 맞닥뜨렸다. 

피리재배는 피리 불 때 갓 끈이 걸리적거릴까 봐 갓 끈을 위로 올려서 감아놓았다. 신윤복은 조선 시대 풍속을 오늘날 우리에게 정확하게 고증해 주고 있다. 

 

 

 

<문종심사> 종소리 들으며 절을 찾아가다

 

조랑말 타고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여인은 사대부 여인이다. 조선시대 왕릉을 지키는 절 입구에 세우는 홍살문이 오른쪽 위에 보인다. 홍살문이 보이므로 사대부 여인이 찾아가는 곳은 왕릉 원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찰願刹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한 사찰이다. 

오솔길 중간에 고깔을 쓴 스님 한 분이 두 손을 합장하고 허리를 굽히고 있다. 머리에 쓰고 있는 기다란 옷은 '너울'이다. 사대부 여인들의 외출용 머리쓰개이다. 양쪽에 불룩하게 매듭을 지어서 동그랗게 말았다. '어여머리'라고 한다. 흰 치마를 위로 올려서 묶었다. 속살이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에 이중으로 입는 방식이다. 

 

복식을 통해 여인의 신분을 알 수 있다. 여인이 타고 있는 말은 명품 조랑말이고 마부가 앞에서 고삐를 잡고 있다. 조선 시대 마부들은 반드시 오른쪽에 선다. 부처님 전에 놓을 물건은 바로 뒤에 몸종이 주황색 보따리에 넣어서 왼쪽 옆구리에 끼고 오는 모습이다. 세 명 모두 수심이 가득하다. 집안에 우환이 있는가 보다. 남편이 과거 급제에 낙방하거나 자식이 생기지 않거나 집에 환자가 생기면 사대부 여인들은 절에 불공을 드리러 다녔다.  그림 위에 멋들어진 시구가 적혀있다. 호리병 도장을 장식을 위해 찍었다. 

호리병 도장은 시의 시작점을 알린다.

 

"소나무 우거져서 절은 보이지 않고 

속세에 들리느니 종소리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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