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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이의방과 정중부의 권력의 끝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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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방과 정중부의 권력의 끝

명종 4년 9월 서경에서 난이 일어난다. 서경 유수 조위총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 이의방을 치려고 도모했다.

이의방은 난을 진압하기 위해 토벌군을 보낸다. 하지만 토벌군은 서경군(반란군)에 크게 패하고 만다. 이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의방이 직접 출정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지독한 추위로 이의방은 군대를 철수한다. 집권한 지 불과 4년, 이의방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이의방은 정변의 동지였던 이고를 제거하고 의종을 폐위했으며 이의민을 보내 의종을 시해했다. 

조의총이 난을 일으킨 이유가 있었다.

김보당의 난이 실패로 끝났다. 김보당의 난은 명종 3년 8월, 문신 김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고 의종을 다시 세우고자 일으킨 반란이다. 김보당은 난을 진압 후 이의방은 의종을 시해했다.

 

의종 시해를 명분으로 서경에서  조위총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서경을 비롯한 북계. 동계 백성들의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을 이용했고 절령 이북 40여 개 성이 호응을 하면서 조의총의 난이 크게 번져갔다. 이의방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있었지만 지지 기반이 약했다. 이의방은 권력을 잡은 후 국정 정상화에 힘쓰기보다는 사리사욕 채우기에 바빴다.

이의방은 의종이 죽고 난 후 의종이 사랑한 애첩을 취하고 태후의 여동생을 겁박해서 정을 통한다.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여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한다. 

 

"이의방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들이면서 더욱 권세를 제멋대로 부려 조정을 혼탁하게 만드는 통에 모든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고려사 열전 이의방

 

이의방은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이었다.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사찰의 승군을 포함해서 군대를 재편성하고 반란군 토벌 계획을 세운다. 

 

명종 4년 12월 정중부의 아들 정균은 승려 종참과 함께 이의방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때마침 토벌군 훈련장을 찾은 이의방이 방심한 틈을 타 정균과 종참이 이의방을 제거한다. 한때는 최고의 권력 자리에 올랐던 이의방은 정균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이의방이 죽고 나자 정중부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 

 

정중부와 이의방은 같은 무신이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정변 당시 정중부는 종3품 대장군이었고 이고와 이의방은 정8품 산원이었다. 이고와 이의방은 실력으로 전면에 나섰지만 점차 고위급 무신들은 이의방과 이고 같은 하위급 무신들의 집권에 반감을 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한 배경에는 무신정변에 참여했던 고위급 무신들의 합의가 있었을 것이다. 

 

조위총은 1년 뒤 잡혀서 처형된다. 하지만 동북면에서 계속해서 난이 일어난다. 조위총의 난이 막바지로 가는 무렵에 공주에서 명종 6년 1월, 망이. 망소이의 난이 발생한다. 집권 무신들 사이의 권력 싸움이나 무신에 반대하는 문신들의 저항이 아니라 백성들이 저항을 일으켜서 국정이 혼란된다. 최고 권력자 정중부는 이런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마땅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 

 

"정중부는 성질이 본래 탐욕스러워 끊임없이 재물을 탐했다"

-고려사 열전 정중부 

 

정중부는 탐욕스러워 정3품 판대부사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였으며 70세가 넘어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 

신라 때부터 관례로 정년은 없지만 70세가 되면 치사致仕라고 해서 관직에서 물러났다. 

치사致仕는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을 뜻한다. 정중부는 관직을 유지하기 위해 왕에게 궤장을 하사 받는다.  궤장은 관직을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궤장几杖은 왕이 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에게 하사한 안석과 지팡이다. 기록에 보면 신라시대 문무왕 때 김유신 장군이 최초로 궤장을 하사 받았다. 고려시대에도 전통이 이어져 70세가 넘어서도 관직에 머무르게 할 때는 궤장을 하사하였다. 궤장을 하사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강감찬 장군이었다. 조선시대 세종대왕으로부터 궤장을 하사 받은 황희 정승은 80세가 넘어서도 일을 하면서 쉬고 싶어 했지만 세종은 의자에 앉아만 있었다고 했다. 

 

정중부는 궤장을 받기 위해 예관에게 넌지시 말했고 궤장을 하사 받는다. 국사는 정중부의 손에 처결되었고 때로 중방에 앉아서 형벌의 판결을 내렸고 백관들은 그의 집을 찾아가 하례를 올렸다. 

 

각 부대에 익명의 방榜이 나붙었다. 방榜에는 과격한 내용이 담겼다. 

'시중 정중부와 그의 아들 승선 정균과 사위인 복야 송유인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러 방자한데 남적이 일어난 것은 남적이 일어난 것은 그 근원이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만약 군사를 내어 토벌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들을 제거한 연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방榜은 정중부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저잣거리가 아니라 군대 내에 방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군의 민심도 상당히 정중부 정권에서 돌아선 듯하다. 얼마 전 정중부가 몸이 안 좋아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고 발표하자마자 부대에 방이 나붙었다. 익명의 방에 정중부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접한 정중부의 아들 정균은 겁을 먹고 관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후에 아예 출근을 하지 않고 있다. 

 

방은 망이.망소이의 난의 원인으로 정중부를 지적하고 있다. 방이 붙자 정중부는 위협을 느끼고 관직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2년 후 관직에서 물러나기는 하지만 권력은 내놓지 않는다. 정중부가 안하무인 권력을 휘두르자 그 집 노비까지 주인의 권세를 믿고 법을 어긴다. 노비가 자주색 비단옷을 입고 다니다. 고려에서 자주색은 가장 높은 신분의 색이다.  고위 관료의 관복색이 자색이다. 자주색 비단옷을 입은 노비는 어사대 관원에게 적발되어 잡혀갔다가 도망을 간다. 노비가 정중부 집까지 가자 쫓아가서 잡았더니 정중부가 어사대까지 가서 관원을 죽이겠다고 난동을 피웠다. 어사대 관리를 죽이겠다고 하는 것을 아들 정균이 말린다. 

 

아들 정균도 아버지 못지 않게 횡포를 부렸다. 광덕리에 옛 태후의 별궁이 있었는데 탐이 나서 사저로 하고 싶다고 요청한다. 태후는 할 수 없어 정균에게 하사한다. 또한 명종을 난처하게 했다. 정균은 공주에게 장가 들 생각까지 했다.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았고 정균은 공주와 혼인해서 부마가 되겠다고 한다. 

명종의 근심은 깊어만 갔다.

 

왕자와 혼인하는 태자비가 되는 것과 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고려 시대 왕실의 근친혼, 족내혼으로 이뤄지다가 현종 이후 국왕의 족내혼은 뜸해졌다. 하지만 공주의 혼인은 태조 이래로 한 번도 족내혼을 벗어 난 적이 없었다. 정균과 공주가 혼인한다면 고려 왕실 최초의 족외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균의 부마 시도는 고려 왕실의 공분을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명종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정균의 요구였다. 명종 대에 고려 왕실의 전통이 깨지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은 무신이었다. 송나라의 거상의 부인과 결혼을 했다.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송유인은 본처를 섬으로 내쫓고 정중부의 딸을 처로 삼았다. 정중부가 권력을 잡자 수덕궁을 달라고 해서 처소로 삼고 부귀와 사치가 왕실 못지않았다. 

 

명종 9년 9월 정중부의 아들 정균은 동료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는다. 정균 제거의 배후는 청년 장군 경대승이었다. 경대승과 그의 결사대는 궁궐안의 정균 세력을 모두 제거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정중부는 민가로 몸을 피한다. 경대승은 명종에게 정중부와 송유인을 체포할 것을 청한다. 

결국 정중부는 금군에 체포당해 척살당한다. 동지였던 이의방을 제거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은 지 5년만이었다. 

 

 

경대승이 권력을 잡았다. 무신정변일 때 경대승은 17세였고 참여하지 않았다. 경대승은 청주 사람으로 부친 경진은 고려 시대 정 2품 관직, 중서시랑평장사를 지냈다. 고위 관리의 아들이며 15세에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2년 전에 음서로 관직에 올라서 교위가 된다. 

격구는 말을 타고 격구체로 공을 치던 경기이며 페르시아에서 시작되어 중국과 한반도로 전해졌다. 고려시대 매우 성행했던 스포츠였다.  명종 4년 경대승이 격구 시범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경대승이 왕 가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격구를 하는 것은 왕과 집권세력의 새로운 무신을 발굴하고 세력을 과시하기 위함이다. 참가하는 무사 입장에서는 왕에게 자신의 기량과 자질을 선보일 기회가 되었다. 고려시대에 격구는 출세에 도움이 되었다. 

격구는 사람과 말이 동시에 집단 전투를 훈련할 수 있는 놀이이면서 수단이다. 마상 무예 기량 향상에 효과적이기도 했다.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한 명분은 복고復古였다.

자신도 한때는 정중부와 가까운 사이였고 무신들이 권력을 잡았지만 무신들의 횡포가 지나쳐 무신 정변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신들은 경대승이 정중부를 제거한 후 경대승에 대한 반감을 품는다.

경대승은 겁이 나 결사대 백수십여 명을 모아 자기 집에 두고 변란에 대비해 훈련시키며 이를 도방都房이라고 불렀다.  

 

무신정변에 참가하지 않은 경대승이 권력을 잡자 많은 무신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문신들은 경대승의 이전의 무신들과 다른 면모를 보고 희망을 가진다. 

의종 시해 무신 정변 주역들에게 부정적 입장을 보였던 경대승에게 문신들은 기대를 내비친다.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은 권력을 쥔 경대승이 자신을 치러 올 것을 두려워하며 경대승의 공격에 대비한다. 

명종 11년 병마사로 지방에 나가 있던 이의민은 '개경에서 왕이 경대승을 처벌했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는다. 

이에 이의민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내가 먼저 경대승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누가 그런일을 했단 말이냐'하며 기뻐했다. 기뻐했다는 소식이 경대승의 귀에 들어갔다.

 

경대승이 알았다는 사실을 이의민이 알게 된다. 이의민은 병마사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두려워 불안한 나머지 병을 핑계로 경주로 낙향했다. 

하지만 이 시기 경대승은 모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경대승은 실력있는 무신들의 연립 형태로 유지하고 있었다. 경대승이 이의민을 쉽사리 제거하지 못한 이유는 이의민은 무신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을 대표하고 있어 만약 제거한다면 무신정변 무신들을 숙청하는 움직임으로 비칠 수 있고 보복을 불러올 수 있었다. 

 

경대승은 복고를 주장했지만 정작 그는 사병집단, 도방을 중심으로 개인 권력만 키워 나간다. 개경에 강도 떼들이 마구 설치며 자신들은 경대승의 도방 소속이라고 기세가 등등했다. 해당 관청에서 체포해 옥에 가두면 경대승이 관리들을 협박하여 석방했다. 이전 이의방과 정중부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남용한다. 

그나마 이전 무신 정권자들과 다르게 복고를 주장하자 당대 사람 중에는 경대승을 칭송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신 집권기 권력자 중 유일하게 반역 고려사 열전에 포함되지 않았다. 

 

명종 13년 경대승은 묘한 꿈을 꾼다.

꿈에서 정중부를 만난다.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악몽을 꾼 이후 경대승은 병을 얻었고 시름시름 앓다가 30세에 숨을 거둔다. 경대승의 죽음으로 무신정권은 권력의 공백기가 된다. 

 

 

얼마 후 이의민은 권력의 주인공으로 다시 나타났다. 무신정변에 의해서 옹립된 왕, 명종이 이의민을 불러 올렸다. 명종은 자신을 보호해 줄 새로운 실력자로 이의민을 선택했다. 

 

명종의 재위기간은 1170~1197년으로 28년을 재위했다. 왕권을 가지지 못한 왕으로 재위기간은 길었다. 명종 타고난 자질이 나약한데 여러 차례 변고를 겪어 문득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며 군국 기무는 모두 무신들에게 견제되니 목소리와 얼굴빛조차도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고려 시대 민란이 가장 많이 발생했던 시기는 무신 집권기이다. 무신들간의 죽고 죽이는 권력 투쟁 속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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