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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민란의 시대 노비 만적의 난, 망이.망소이의 난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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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시대 노비 만적의 난, 망이. 망소이의 난

1170년 무신들의 정변으로 시작된 무신시대의 또 다른 이름은 민란의 시대였다. 많은 농민들이 가세했던 서경 조위총의 난에 이어 전국적으로 수많은 지역에서 민란이 발생한다. 1170~1270년 무신 시대 100년간 75건의 민란이 일어났다. 매년 민란이 일어났던 고려 최대의 반란기였다. 

 

만적의 난

1198년 5월 개경에 노비들이 한자리로 모여들었다. 주동자는 사노비 만적이었다. 

"경이년(1170)과 계사년(1173)이래로 높은 관직도 천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우리들이라고 어찌 뼈 빠지게 일만 하면서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

-고려사 열전 최충헌

 

고려 사회에서 가장 낮은 신분, 고려 최하층민 노비들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노비奴婢는 왕실, 관청에 예속되어있는 공노비, 개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사노비로 나뉜다. 사노비도 두 가지로 나뉜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떨어져 생활하며 별도 호적을 갖기도 했다.

솔거노비는 주인과 같이 살거나 주인집 근처에 거주한다. 만적은 솔거노비였다. 노비 만적의 주장 중에 주목이 되는 대목이 있다.

 

"각자 자신의 주인을 죽이고 천적賤籍을 불태워 삼한三韓에서 천민을 없애면...."

-고려사 열전 최충헌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권력을 잡고 노비에서 해방되자는 말이 아니라 고려에 있는 천민 신분을 모두 없애자는 주장을 한다. 이것 때문에 만적의 난은 최초의 신분 해방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천민 신분을 없애자는 말은 만적이 처음 한 발언은 아니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은 중국 진나라 말기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일으킨 농민 반란이었다. 반란군의 지도자였던 진승이 했던 말이다.

 

王後將相 零有種乎 왕후장상 영유종호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이후 백성들 사이 널리 퍼진 일종의 유행어였다. 고려사에는 만적은 사동私僮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최충헌의 사노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적萬積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당시 노비들 이름은 부르는 호칭을 음차해서 썼다. 만적과 함께 난을 모의한 노비들 이름은 미조이味助伊, 소삼小三, 효삼孝三 등으로 이름을 불렀다. 다른 노비들과 달리 만적은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만적은 거사 당일 쓸 표식을 나줘주었다. 누런 빛깔의 종이 수천 장을 오려서 정丁자를 만들어 표지로 삼았다. 서로 못 알아보는 불상사를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갑인일에 흥국사에 모여 난을 일으키기로 결의한다. 

 

"안과 밖에서 서로 호응하여 최충헌 등을 먼저 죽이고 각기 그 주인을 쳐서 죽이고 천인의 문적을 불살라 버리면 ...공경公卿 장상將相이 모두 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고려사절요 신종 원년(1198)

 

1198년 5월 난을 일으키기에는 노비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대궐 안의 환관과 관노들의 호응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자 만적은 나흘 뒤를 다시 기약하고 무리들을 해산시킨다. 하지만 노비들의 반란 계획은 최충헌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분노한 최충헌은 즉시 군사들을 풀어 만적과 노비들을 잡아들인다. 노비들을 강물에 수장시킬 것을 지시한다. 결국 100여 명의 노비들이 산채로 강물에 수장된다.

 

만적의 난이 발각된 이유는 내부에서 밀고자가 생겼다. 노비 순정이 주인 한충유에게 발설한다. 한충유는 최충헌에게 밀고한다. 고변한 순정 주인 한충유는 합문지후로 승진시켜 줬고 고발했던 노비 순정은 은 80냥을 받고 면천되어 양인이 되었다. 

 

고려 시대 참형 방법

참형斬形과 교형絞形이 있었다. 사형을 시킬 때는 3단계를 거쳤다. 지방관들이 사형을 결정하고 지방관의 상급 관리가 다시 검토하고 왕에게 보고한 뒤 사형을 집행한다. 정상적인 절차 없이 만적과 노비들을 강물에 수장했다. 천한 노비들이었기에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처형했다. 

 

 

무신 집권기 노비들은 무신들의 사병으로 동원되었다.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출세하는 것을 보고 천민 자신들도 난을 통해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노비들은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노비는 물건처럼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다. 노비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다. 

 

'노비를 재물로 논하며 거림낌 없이 매매하고 혹은 소나 말과 이를 바꾸기도 하는데 1 필의 말에 대해 노비 2~3명을 지급하고도 오히려 값을 치르기 전에 부족하니 소와 말이 사람 목숨보다 더욱 중요...'

-고려사 지 형법 노비

 

노비들은 짐승처럼 살다 죽는니 차라리 난을 일으키다가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할 정도로 비참했다. 노비에서 신분 상승하는 방법은 없었다. 노비 천민과 양민의 구별이 엄격한 신분 사회였다. 이전부터 반란의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노비 평량의 신분 세탁

1188년 여름, 견주에서 이사를 가기 위해 왕원지 가족이 개경으로 길을 떠났다. 개경으로 가는 길목에서 갑자기 한 무리의 습격을 받게 된다. 가족은 모두 살해된다. 범인으로 알려진 인물은 견주의 벼슬아치 평량이었다. 평량 아내의 주인은 살해된 왕원지였다. 평량은 원래 노비였다. 평량은 평장사 김영관의 외거노비로 견주에 살면서 농사를 착실히 지어 부자가 되자 권세가에게 뇌물을 바쳐 천인의 신분을 면하고 양민이 되었다. 돈을 주고 산원동정 벼슬까지 얻었다.

 

때마침 평량의 아내는 왕원지 노비인데 왕원지는 집이 가난하여 가족을 이끌고 여종(평량집)에게 가서 의탁하고 있었다. 이사 가기 며칠 전 평량은 왕원지에게 개경에 가서 보태 쓰라면서 돈까지 주었다. 평량은 자신이 노비출신임으로 알고 있고 부인의 노비 문서까지 가지고 있는 왕원지만 사라진다면 자신 신분 노출에 대한 우려를 씻을 수 있었다. 

 

'처의 오빠 되는 인무, 인비 등과 함께 길목을 지키다가 왕원지 가족을 살해하고 ...주인이 없어졌으니 완전히 양민이 되었다고 좋아했다'

-고려사 세가 명종 18년 (1188)

 

평량은 아들 예규에게 대정 벼슬을 얻어주고 처남을 명경학유 박우석의 딸에게 장가들여 주고 하니 소문이 퍼저 결국 어사대에 체포되었다. 평량은 관직에서 파면되고 귀양 보내지며 처남들을 도망갔다. 1188년 평량 사건 당시 무신 집권자는 이의민이었다. 이의민은 아버지는 소금장수, 어머니는 노비출신으로 천민 출신이다. 천민이 권력자가 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었고 그 상징적 난이 만적의 난이다. 

무신 집권기 100년 동안 일어난 난은 대부분 농민들의 민란이다. 지배층, 권세가가 토지를 빼앗겼을 때, 과중한 세금 등으로 살기 힘든 경우에 일어났는데 1170년 무신 정변 후 30년 동안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망이. 망소이의 난 

무신 집권 6년 째, 1176년 정월 공주 명학소에서 민란이 발생했다. 민란의 주동자는 망이와 망소이였다. 이들은 무리를 끌어 모아 공주를 공격하고 순식간에 점령했다. 위기를 느낀 고려 조정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3천 명의 토벌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망이. 망소이의 반란군에게 패배했다. 

공주 명학소에서 시작된 망이. 망소이의 난은 정중부의 집권기 1176년에 발생했다. 만적의 난은 1198년 최충헌의 집권기에 발생했다. 망이. 망소이 난이 앞서 발생했다. 

망이. 망소이는 형제라는 기록은 없지만 형제일 것이라 추측한다. 명학 소所에서 일어난 민란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본관은 조상의 출신지를 나타낸다. 본관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이다. 고려시대 본관을 칭하는 지역이 어떤 등급이냐에 따라서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달라진다. 고려시대 지방제도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모든 군현들이 같은 등급에 있지 않고 3등급으로 구별한다. 지방관이 파견된 군현은 가장 높은 등급인 주현이다. 아래 등급은 지방관은 파견되지 않고 옆에 있는 주현으로부터 간접 통치를 받는 속현이 있다.

 

가장 아래 향.소.부곡이 있다. 향. 소. 부곡에 사는 주민을 잡척雜尺이라고 지칭했다. 잡척들이 일반 군현에 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세租稅, 공부貢賦, 역역力役 등을 부담하면서 국가의 국유지를 경작할 의무가 추가되었다. 지방의 특산물 생산해서 국가에 납부하기도 했다. 군현지역 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천대까지 받았다. 

고려시대에는 본관을 알면 신분, 직업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공문서에는 본관을 적게 되어 있었다.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던 명학 '소所'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수공업품, 광산물 등 특수 물품 생산지였다. 

금을 만드는 생산지는 금소, 은을 만드는 생산지는 은소, 고려청자를 만드는 생산지는 자기소 등으로 불렸다.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났던 명학소는 무엇을 생산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명확소는 숯을 생산하는 탄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시대에는 이사를 할 수 없다. 인근 주현에 사는 사람과 혼인한 경우, 관리, 군인이 되어서 개경에서 근무할 경우에만 이사를 할 수 있었다. 향, 소, 부곡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속현, 주현으로 거주 지역이 승격되는 것이다. 거주 지역의 승격이 곧 신분 상승이 되었다.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나자 고려 조정에서는 해결하기 위해 파격적인 행정 지침을 내린다. 공주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파격적인 승격을 조치한다. 속현이 아닌 주현으로 승격시킨 것은 그만큼 난이 위협적이었다.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킨 다음 내원승 양수탁을 현령으로 내시 김윤실을 현위로 임명해 그 고을 백성을 달래게 했다.'

-고려사 세가 명종 6년 (1176)

 

명학소가 주현으로 승격이 되자 난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망이. 망소이의 난 세력의 1차 봉기 승리는 당시 고려 관군이 처한 상황과 맞물려있다. 중앙군은 서경지역에서 조위총의 난 진압에 주력하고 있었다. 고려 주력 부대는 서경지역에 파견되어 상대적으로 공주 방어에는 전념할 수 없었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공주 명학소에서 발생했지만 점차 향. 소. 부곡과 주현과 속현에 속한 농민들까지 참여하기 시작했다. 난은 명학소만의 난이 아니었다. 

 

민란의 주축 세력이었던 소의 거주민들은 집단 거주를 하면서 공동 노동을 하면서 단위별 조직력이 높았다. '소' 중에는 무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철을 생산하는 '소'도 있었다. 고려 최대 철생산지 다인철소는 공주 인근 충주에 위치했다. 농업국가 고려에서 다양한 농기구를 무기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민란군은 죽창을 사용했다. 구하기도 쉽고 만들기도 쉬웠다. 방어를 위해 여러 개의 광주리를 겹쳐 방패로 사용했다. 낫은 자루를 길게 만들어 전투용 낫으로 사용했다.

 

공주 명학소가 충순현으로 승격된 후 1177년 망이와 망소이는 항복한다. 이때 고려 진압군은 농민군의 가족들을 체포했다. 이 사실을 안 농민군들은 싸우다가 죽을 지언정 끝까지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개경까지 쳐들어갈 것을 다짐한다. 하지만 망이. 망소이의 난은 실패했다. 화해 조치로 시간을 벌며 고려 조정은 진압을 준비했다. 진압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농민군은 결국 무너진다. 망이. 망소이의 난은 1년 6개월 이상 지속되었다.

 

 

난을 진압한 고려 조정은 충순현으로 승격시켰던 것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시킨다. 망이.망소이의 난이 진압된 다음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서도 계속해서 난이 발생한다.

망이. 망소이의 난이 끝나고 21년 후 만적의 난을 통해 신분 해방 운동으로 진화되었다.  

향. 소. 부곡의 개수는 고려 시대 900개였다가 조선 초 100개로 줄어들었다가 점차 소멸한다. 향. 소. 부곡이 소멸해 나간 계기가 공주 명학소 망이. 망소이의 난으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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