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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일제 강점기 조선을 변호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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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조선을 변호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

1923년 9월 일본 사회를 뒤흔든 재판이 열렸다. 천황폭살혐의로 기소된 박열, 가네코 후미코 부부는 파격적 언행으로 법정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들의 뒤에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변호하고 있었다. 

박열은 조선관복과 사모관대를 갖추고 법정에 섰다. 부인 가네코 후미코는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고 조선 여인으로 단장하고 법정에 들어왔다. 그러면서 조선 이름 '박문자'라고 부르라고 했다.

 

박열은 1902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3.1운동 때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이면서 운동에 가담하면서 퇴학을 당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항일단체 의열단義血團을 조직한다. 재일조선인 사상단체 '흑도회'에 가입한다. 박열은 불령사를 조직한다. 불령사不逞社는 1923년 박열이 조직한 한일연합 아나키즘 단체이다.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한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은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인을 이르는 말이다.   

박열의 성정을 엿볼 수 있는 시가 있다. 

 

<개새끼>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는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개새끼>를 읽고 반해서 대뜸 자기와 동거하자고 했다고 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을 사랑했다. 연인 박열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다. 

당시 일본 재판소법에는 '심판방해죄'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재판소나 재판관의 직무집행을 방해할 경우 형사 처벌을 했다. 현재 대한민국 '법정모욕죄'와 비슷하다. 법정의 재판을 방해 또는 위협할 목적으로 모욕 또는 소동한 자는 징역 또는 벌금에 처한다(형법 제8장 제138조 中). 

 

 

박열과 가네 후미코는 법정에서의 언행은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하기 위함이었고 재판을 방해하거나 재판관을 위협하지는 않았다. 법정모욕죄에 해당하지는 않을 수 있다. 

피고인 박열은 재판장에게 요구했다. 

'죄인 취급하지 마라, 재판장과 동등한 높이의 좌석에 앉아서 재판 받게 해 달라, 조선 관복을 입게 해 달라, 조선어를 사용하게 해 달라'였다. 변호사 후세 다쓰지가 중재했다. 일본 대심원(대법원)에 박열의 요구를 전달했다. 조선어 사용은 후세 다쓰지가 재판에 도움이 안 될 것 같다고 말하자 박열은 취소한다. 좌석의 높이를 맞춰달라는 것도 후세 변호사의 설득 끝에 철회했다. 죄인 취급하지 말 것과 조선 관복을 입게 해 달라는 요구 사항은 후세 변호사와 재판부가 협의하에 이뤄졌다. 

 

후세 다쓰지는 박열의 기소 죄목 대역죄의 프레임을 항일투쟁으로 전환시켰다. 당시 재판은 일본 사회를 집중하게 했다. 재판 2시간 전부터 방청석은 만석이었다. 후세 마쓰지의 전략은 일본 제국주의 규탄이었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을 덮으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서 전략을 짠 것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학살에 충격을 받았다. 박열은 1923년 9월 3일 체포되었다. 1923년 9월 1일은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날이다. 관동대지진 일어난 지 이틀 후에 박열이 체포당했다.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극도의 사회적 혼란이 생겼다. 일본 정부는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일본 정부는 자국의 문제를 외부에서 수습했다. 폭동에는 배후가 있다는 것을 찾기 시작했고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라는 구실이 필요했다. 자연재해임에도 불구하고 폭동의 배후로 박열을 지목했다.

 

1923년 9월 2일 계엄령을 선포했다. 불이 나면 '조선인이 방화했고,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이 습격해 온다' 등 유언비어를 일본 군대가 퍼뜨린다. 일본 군인이 배후가 된 자경단이 조직되고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당했다. 일본 경보국 집계에는 학살된 조선인 수는 231명으로 축소했다. 

 

 

후세 다쓰지는 박열의 재판을 통해서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밝히려 했다. 피해자 수, 학살의 주체가 군인인지 경찰인지, 살해 방법, 시신 처리 등을 밝혀내고 싶어했다. 후세 다쓰지는 목숨을 걸고 조선인을 도운 것이다. 

후세 다쓰지는 일본 당국에 질의서를 보냈다. "살해당한 조선인의 수는 몇천 명인가?", "살해당한 원인은 무엇인가?" 공개적으로 질문했지만 당국은 대답하지 않는다. 1년 후 1924년 9월 후세 다쓰지는 독자적으로 조사하여 직접 조사보고서를 강연회를 통해 발표했다. 

 

후세 사쓰지는 1926년 3월 6일 시대일보에 "한 일본인으로서 모든 조선 형제에게 사죄"라는 사죄의 글을 올린다.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도 무서운 인생의 비극입니다

너무도 가혹한 비극이었습니다

어떤 말로 추도하더라도 

조선 동포 6천 명의 유령은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1923년 12월 후세 다쓰지 

 

일본정부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에 군경에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다.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피해자 사죄, 배상, 유해 안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 23일 옥중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가네코 후미코의 묘를 형무소 근처에 가매장했는데 후세 사쓰지와 친구들은 사인을 규명하고 사체를 인도해 달라 강력하게 요구했다. 시신을 찾아서 후세의 자택에 유골을 보관하다가 박열의 고향 문경으로 이송해서 안치했다. 

 

후세 다쓰지는 감형을 요구하지 않았다. 의뢰인들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형량이 낮아지기 보다는 신념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기본적으로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를 비판했다. 

변론 전략이 있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는 불법이므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은 저항권의 행사이고 정당한 행위이므로 무죄다. 설령 유죄라 해도 사형, 무기징역은 강한 처벌이라서 부당하다는 주장을 했다. 

변호사는 성량이 풍부해서 큰 강당에서도 마이크 없이 강연할 정도로 체격이 좋았고 목소리가 쩌렁쩌렁 했다. 

 

박열은 기획된 사건이다. 1924년 1월 5일 도쿄, 일본 천황이 사는 황궁에 의열단원 김지섭이 폭탄을 던진다. 불발이 됐다. 일본 천황을 죽이려 했다는 것은 대역죄인이었다. 의열단원 김지섭은 천황 암살 미수범으로 체포되었고  후세 다쓰지가 변호한다. 검사는 사형을 구형한다. 후세 다쓰지는 조선 식민지 지배는 불법이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정당하며 왕궁에 침입했지만 실제 폭탄은 불발했기 때문에 사형은 너무 과하다고 변호한다. 이런 변론 과정을 거친 후에 사형대신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의열단원 김지섭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무기징역을 받은 김지섭은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벌인다. 1928년 2월 20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후세 다쓰지는 언제부터 조선인 변호를 했나?

1919년 2월 8일 재일조선인 유학생들이 독립 선언식을 했다(2.8독립선언).일본 정부는 자국 내에서 독립 선언을 하자 놀란다. 2.8 독립선언을 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2차 변론을 맡았다. 1심을 맡은 일본인 변호사들은 일단 인정하고 감형을 요구하자는 전략을 폈다. 2심을 맡은 후세 변호사 생각은 달랐다. "조선인은 징역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을 어떻게 보는 것이냐"라는 당당한 이야기를 한다. 

 

당시 일제 재판부는 국제사회 여론을 의식하고 있었다.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형식적인 법치를 중요시했다. 후세 변호사가 당당하게 재판에 임하자 일제 사법부의 모순이 법정에서 드러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 청년들과 후세 변호사의 관계가 이어진다. 1923년 7월 조선을 처음 방문했다. 황옥 경부 폭탄 사건, 조선총독부 폭발 미수범 의열단원 김시현을 변호하려고 왔다. 서울역에 도착하자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환영 카드를 들고 격하게 환영했다.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은 1923년 3월 일제 경찰 황옥이 의열단과 협력해서 국내 폭탄 밀반입을 시도한 사건이다. 황옥과 김시현 등이 경성까지 폭탄을 밀반입했으나 밀고자에 의해 발각됐고 체포되었다. 

 

후세 다쓰지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한 이유 

후세 변호사는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면서 무료 변호했다. 1899년 메이지 법률학교에 입학했다. 1902년 졸업 직후 검사 등용시험에 합격했다. 22살 나이로 공직을 시작했다. 공직에 있다가 1년 반 만에 사표를 냈다. 1905년 도쿄에 법률 사무소를 개업했다. 이후 10년 동안 큰 성과가 없었다. 1920년 이후 매년 250개 이상의 사건을 수임했다. 단독 변호 사무소를 소유했다. 당시 도쿄에 몇 대 밖에 없던 오토바이를 후세 변호사가 소유하고 있었다. 

 

남편과 첩의 학대에 자식 셋과 자살을 시도한 여성이 있었다. 상부에서 후세 변호사에게 이 여인을 살인미수로 기소하라고 압박을 가한다. 후세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검사직을 그만둔다. 

검사직을 그만 두면서 남긴 말이 있다.

"여인의 등에 채찍을 휘두르는 일은 잔인하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행복을 버릴 각오로써 단지 내가 확신하는 길을 걷기 위해 범과 이리의 업業인 나의 직을 버린다"

 

후세 다쓰지는 조선인을 변호하기 앞서서 일본인 사회적 약자를 변호했다. 이미 인권변호사의 길에 접어들었고 명성도 얻고 있었다. 

 

1880년 11월 13일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한 농가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러면서 묵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묵자(약 BC479~ BC381)는 제자백가의 사상가이며 겸애설을 주장했다. 

묵자의 겸애 사상은 침략받은 약소국을 방어하기 위해 병력을 지원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후세가 15세가 되던 해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 벌어졌다.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이다. 조선 정부는 진압이 안 되자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 일본군도 동시 출병한다. 청일 전쟁을 한반도에서 일으켰다. 후세 다쓰지가 살던 마을에서 일본군으로 동원되었던 부대가 있었는데 청일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끔찍한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15세 후세 다쓰지는 조선인의 대한 연민을 느꼈다.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겸 사상가였다. 톨스토이는 러일 전쟁 때 폭력은 절대 반대한다며 전쟁을 반대했다. 1904~1905년 러일전쟁 때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했다. 후세 다쓰지에게 영감을 주었고  톨스토이에 심취한 인도주의자로서 사람마다 인격적으로 평등하듯이 국가 또한 평등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셋째 아들 이름은 모리오였다. 모리오는 톨스토이의 한자 표기이다.  본인의 서고에 톨스토이 전집이 있었다. 

일본의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한다. 일한의 병합은 아무리 표면적인 미명으로 장식하더라도 

이면의 실제는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침략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카하타> 1923년 4월

 

변호의 범주를 법정에서 사회로 넓여야 겠다고 생각했다.  1920년 <자기 혁명의 고백>을 발표했다. 

인권 유린 사건,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위하여, 억압받는 언론 사건, 노동계급의 사회운동에 대해서 적극 변호하겠다고 고백했다. 민사사건은 유료로 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형사 사건 등 주요 사건은 무료 변호를 했다. 상황이 안 좋아지면 부인이 하숙집을 운영했다. 조선인 유학생들이 하숙집에 들어갔다. 

후세 다쓰지의 손자 회고록에 의하면 조선인 우유 배달부가 공짜로 매일 우유를 넣어 주었다고 한다. 당시 전시상황으로 방공훈련도 나가야 했는데 조선 유학생들이 대신해서 나갔다.

 

 

 

후세 다쓰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한 재일 조선인이 추모의 글을 남겼다.

"선생님은 조선인에게 아버지와 형 같은 분이었고 구조선과 같은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1930년 3월 '신문지법'위반으로 기소당한다. 1932년 변호사 제명을 당한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눈에 가시였던 것이다. 1944년 2월, 교토 대학생 셋째 아들 후세 모리오가 사망했다. 전쟁 반대 운동을 벌이다 치안유지법으로 체포되고 1944년 교토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내 아들이 전쟁터에서 죽은 것보다 전쟁을 반대하면서 감옥에서 죽은 것이 장한 일이다"

 

조선은 해방했고 일본은 패전했다. 후세 다쓰지는 변호사로서 복귀한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의 변호를 맡았다. 1953년 9월 13일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후세 다쓰지는 한국전쟁을 마지막까지 안타까워했다.

세상을 떠난 지 50여 년 만에 한국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우리나라에서 건국훈장을 받은 외국인은 70명이다. 두 명이 일본인이며 일본인 최초 후세 다쓰지이다. 다른 분은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박열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이다. 

 

 

후세 다쓰지는 조선인에게만 국한된 활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대만 민중운동을 지원하기도 했고 일본 노동계급,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을 했다. 

 

"법관 스스로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사법권의 독립을 지킬 수 있습니다

가슴에서 울리는 정의의 목소리를 듣기 바랍니다

인간에게는 그렇게 명령하는 양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후세 다쓰지 

 

후세 다쓰지는 일본의 변호사 단체 '자유법조단'을 창시했다. 2천여 명의 현직 변호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일본 정부 역사 왜곡에 대해서 규탄하고 일본 제국주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있다. 

 

후세 다쓰지는 선천성 색각이상증(색맹)을 앓았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하여 "

-후세 다쓰지 좌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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