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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왕의 그림자로 살다 간 남자, 내시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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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그림자로 살다 간 남자, 내시 

종종거리는 발걸음과 수염없는 매끈한 얼굴과 굽은 등과 간드러진 목소리를 가진 내시는 사극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거세된 남자들만 가질 수 있는 직업, 왕의 그림자로 살다 간 내시였다. 내시는 신분 상승을 위해 스스로 거세를 하기도 했고 생계유지를 위해서 스스로 선택하기도 했다. 왕을 보좌하던 남자, 내시는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시대별로 구별이 된다.

 

9세기 신라 흥덕왕 때는 '환수宦竪'라고 불렀다. 선척적인 이유와 사고로 성기를 잃은 사람이 환관이 되었다. 고려 의종 때 환관의 힘이 강력해진 적이 있었다. 고려의 환관들이 권세를 누렸다.

1300년 대 고려에 시집왔던 원나라 제국공주가 원나라 세조에게 바친 고려 출신의 환관들이 황실의 총애를 받다가 이후 원나라 사신이 되어 고려에 돌아왔고 환관들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환관들이 권세를 거머쥐고 누리자 고려 백성들도 거세하면 출세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환관이 되기 위해 아버지가 아들을 거세시키고 형이 아우를, 또는 스스로 거세하는 일이 생겨났다. 

환관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먹고 살기 힘든 천민, 평민, 노비 출신들이었고 유일한 출세 수단은 환관이 되는 것 뿐이었다.

 

환관들이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을 두번이나 유배시킨 환관까지 나오게 된다. 원나라로 보내져 환관이 되었던 백안독고사(바얀투구스)였다. 백안독고사는 인종의 눈에 띄면서 총애를 받았고 권력을 쥐게 된다. 자신 스스로 거세해서 환관이 된 사람이었다. 백안독고사는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온갖 만행을 저지른 고려 대표 환관이다. 

충선왕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어 곤장을 때리고 재산을 몰수해서  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백안독고사는 원나라 영종을 찾아가서 없는 말까지 지어내며 충선왕을 헐뜻었다. 충선왕은 환관의 계략에 의해 티벳으로 유배 보내진다. 

 

기황후는 원나라 궁녀로 끌려갔다가 훗날 원나라 황제 혜종의 황비가 되었다.

원 혜종의 총애를 업고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기황후 뒤에는 고려 환관  투만디르가 있었다. 혜종의 차 달이는 궁녀로 그녀를 추천했다. 투만디르는 원나라 황실과 고려 왕실을 쥐락펴락 했던 환관 고용보의 다른 이름이다. 탄광에서 일하던 고려 천민 출신 고용보는 원나라로 건너가 환관이 되고 궁녀 기씨를 만난다. 

1340년 기씨는 황후가 되자마자 고용보를 불러 황후들의 곳간지기인 자정원사에 임명하면서 출세길을 터준다. 

 

어느날 원 황제의 명에 따라 사신들과 함께 술과 옷을 들고 고려로 간다. 하지만 고려 28대 왕 충혜왕은 아프다는 핑계로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 이에 분노한 사신들은 뒤늦게 나온 충혜왕을 묶어 놓고 두들겨 팼다. 도와달라는 고려 왕에게 고용보는 오히려 꾸짖었다. 원나라로 끌려간 충혜왕은 귀양가는 길에 생을 마감했다. 

 

기황후의 권세를 믿고 고용보는 뇌물을 받아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고 권력은 천하를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 1447년 어사대는 고용보의 탄핵을 추진한다. 부패한 환관 세력을 처단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고 개성에서 합천 해인사로 도망친다. 합천 해인사에서 10년을 숨어살던 고용보는 결국 공민왕이 보낸 정지상의 손에 처형된다. 

원나라 지배하에 환관들이 많이 발호했고 원나라 황제의 세력을 힘입어 환관들이 고려의 내정 간섭을 많이 했다. 심지어 왕을 납치하거나 갈아치우거나 하는 등 왕과 신하의 정상적인 정치 구도를 깨뜨려 결국 고려가 멸망의 길로 접어드는데 한 몫을 했다. 

 

 

고려 시대 환관과 내시 차이점 

고려의 내시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은 내시였다. 고려 최고의 엘리트 집단은 내시였다. 환관과 내시는 전혀 다른 직책이었다.  과거 시험에 붙거나 가문의 후광을 입고 정계에 진출하는 음서제를 통해서 관직을 받거나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거나 똑똑한 사람 중에 발탁되거나 한 사람들이 왕의 옆에서 보좌했다. 왕을 보좌한 사람들을 '내시'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고려 시대 내시는 거세된 남자가 아니었고 (지금의 청와대 비서관급)이었다. 고려 시대 내시는 거세된 남자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1356년 고려 말 공민왕 5년, 허드렛일을 하는 환관들을 관리하는 부서를 설치했는데 이름이 '내시부'였다. 이름이 똑같았다. 고려 전기 때 정함이라는 환관이 내시로 등용된 이래 차츰차츰 환관들이 내시 직에 오르더니 고려 말 이후에는 환관과 내시 구분이 모호해졌다. 조선시대 와서 내시와 환관이 동일 시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거세당한 남자 내시' 개념만 남아있다. 

 

 

서울시 도봉구 초안산 기슭에는 내시무덤과 무덤을 지키던 석물들이 있다. 초안산은 내시들의 무덤이었으며 '내시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상세尙洗는 궁중의 각종 기물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상촉尙爥은 왕실의 여자들이 사는 방, 궁중의 등촉燈燭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상탕尙帑은 궁궐의 재화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상尙'자가 붙은 직업은 잡일과 허드렛일을 하는 심부름꾼이었던 내시內侍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다. 개국공신들은 태조에게 상소문을 올려 내시들부터 단속했다. 고려가 멸망한 이유는 환관의 발호, 불교의 발호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력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억불정책과 환관의 권력을 억제했다. 이성계를 지원했던 신진사대부는 환관 제도 자체를 없애버리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궁궐과 왕실에는 업무를 볼 사람 환관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조선은 환관의 선발 기준을 따로 정하고 환관의 업무 영역을 대폭 축소하는 법을 만들었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내시의 임무는 궁중 음식 감독 대내감선大內監膳, 왕명전달 전명傳命, 궁궐 문을 지키는 수문守門, 궁궐을 청소하는 소제掃除이다. 

하지만 이들의 임무는 왕실 최측근에서 하는 일이다보니 궁중 모든 대소사는 내시들의 손을 거쳐야만 했다. 

 

내시는 8살 전후의 성불구 남자 아이만 선발을 할 수 있었다. 엄격한 선발 기준을 통과한 사내아이들은 입궁후 수련과정 10년을 거쳐 정식 내시가 됐다. 수염이 나거나 다른 신체적 결합이 발견되면 즉시 출궁을 해야 했다. 출세를 노린 위장 내시들을 가려내기 위한 것이었다. 

하루종일 왕을 보좌하는 내시들은 맹자, 대학, 논어, 중용을 공부해서 학식을 갖춰야 했다. 매년 4번씩 승진시험을 치르고 최고 종2품까지 오를 수 있었다. 

 

양세계보養世系譜는 내시들의 족보이다. 내시는 양자를 들여서 자기 대를 이어 나간다. 환관들은 거세했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양자를 들여서 가계를 이어갔다. 3세 이전의 어린아이를 양자로 들였다.

궁내에서 생활하는 내시가 있었고 궁궐 옆 효자동 일대에 집을 짓고 가족들과 살면서 영추문을 통해 출퇴근했던 내시들도 있었다. 

 

 

영화 <내시> 1968년 개봉, 감독 신상옥, 배우 강신성일, 윤정희, 박노식 

 

 

 

영화 <내시> 1986년 개봉, 이두용 감독, 배우 안성기, 이미숙, 남궁원 출현 

신상옥 감독의 <내시>1968년 작품을 리메이크 한 작품 

 

경상북도 청도 운림고택

 

청도 운림고택은 일반 사대부 집과 다른 구조의 고택이다. 국가민속문화재 제245호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는 나무 벽이 있고 구명 세개가 뚫려있다. 한옥은 남향으로 지어지지만 운림고택은 볕이 잘 들지 않는 서북향으로 안채가 지어졌다. 임금이 계신 한양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조선 말기 궁중 내시로 정3품까지 올랐던 김일준 가문의 고택이다. 한양에서 청도로 낙향해서 원래 있던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해서 살았다. 

 

사당이 허물어져서 개,보수하려고 해체하는 과정에서 사당 마루 터에서 작은 함을 발견했다. 1988년 3월 발견된 함 안에 작은 족보가 있었다. <내시부첨지 김병익 가세계> 김일준의 아버지 김병익 이름의 족보였다. 임진왜란 직전 청도에 들어온 내시 가문의 족보가 16대까지 기록되어 있었다. 

 

내시 고택은 큰 사랑채에서 앉아 있으면 안채로 누가 들어가는 지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사대부 가택 구조는 큰 사랑채는 집주인, 가장 큰 남자 어르신이 주로 있는 공간으로 여성은 사랑채 옆을 통해서 안채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하지만 내시 가택은 사랑채에서 누가 안채로 들어가는 지 볼 수 있게 구조되어 있다. 내시는 남자 구실을 못하는 사람으로 자기 부인을 관리하는 데 남들보다 더 엄격할 수 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감시하기 위한 구조였으며 안채 담벼락은 다른 고택에 비해서 높게 쌓아 사방을 막아 놓았다. 안채 앞 중사랑채에서도 감시할 수 있었다. 안채로 들어가는 입구 옆에는 나무 벽이 있고 구명 세개가 뚫려있다. 얼굴 높이에 뚫린 구멍으로 사랑채에서 앉아서 보면 안채에 누가 출입하는 지 볼 수 있다. 

 

 

영화 <내시의 아내> 1975년 개봉

몰락한 가문을 살리고자 몸값을 받고 내시 집안으로 시집 간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꽉 막힌 집안에서 감시 받으며 살다 간 여인들 내시의 아내들은 몰락한 양반 가문의 자녀들이 자기 가문의 부흥을 꿈꾸면서 팔려오다시피 했다. 정략결혼이었다. 아주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이곳에 와서 경제적인 부로 친정 식구들을 도와주기 위해 내시의 아내가 되기도 했다. 

 

조선시대 정2품은 위에서 세번째 높은 관직이었다. 지방에서 관청의 노비로 떠돌다가 최고위 관직 정2품에 올랐던 내시 김처선은 처참하게 죽었다. 내시 김처선은 세종때부터 무려 왕을 7명이나 모셨던 내시였다.

젊은 시절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했다가 쫓겨나 관가의 노비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노비 김처선을 복직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내시 김처선을 원종공신에 책록한다. 하지만 김처선은 일을 엉망진창으로 하다가 곤장을 수십대씩 맞는가 하면 시녀와 길을 가다가 만취가 돼서 길바닥에 드러둡기도 했다. 세조가 단종을 폐위 시키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세조가 내시 김처선을 내치지 못한것은 내시 세계에서 무시 못할 존재였기 때문이다. 세조 사후 예종은 재위 기간이 짧았다. 다음 성종 때는 김처선은 약을 다스렸던 상약尙藥이었다. 

성종의 어머니가 성종을 왕으로 즉위시키기 위해 큰 힘을 발휘했다. 인수대비가 병환으로 드러누웠을 때 어의들도 못 고치는데 김처선이 약을 지극정성으로 달였다. 인수대비가 쾌유를 하셨고 성종은 기뻐하며 김처선을 매우 총애했다. 상약에서 직급이 올라가 내시 중 처음으로 유일무이하게 종2품이 되었다. 

 

이후 성종의 측근이 되면서 역할이 늘어났다. 임금 대신 공신들을 위로하러 다니기도 하고 의금부 업무를 감독하고 각 관원들에게 하사품을 주는 등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내시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직 종2품 보다 한단계 높은 정2품 자헌대부에 오른다. 대신들의 반발도 있었지만 성종은 끝까지 총애한다. 성종 사후 김처선은 시릉내시가 되어 3년간 왕릉까지 돌본다. 

 

시릉살이 3년을 마치고 돌아온 김처선은 조선 최대 폭군 연산군으로 인해 인생이 뒤바뀐다. 

성종의 첫째 아들로 즉위한 연산군은 어느날 어머니 윤씨가 폐위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연산군의 분노는 폐비 윤씨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향해 폭발했다. 산자는 죽임을 당하고 죽은 자는 부관참시를 당했다. 점점 폭군이 되가는 연산군은 정사를 외면하고 주색에 빠진다. 관청 기생을 천명으로 늘리고 뛰어난 이들에게 흥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흥청망청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내시들 목에는 신언패愼言牌를 걸게 하고 입조심을 시킨다. 

 

<신언패愼言牌>

"입은 화를 불러 들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입을 다물고 혀를 숨겨라

그리하면 몸을 편안히 간직하리라"

 

폭군 연산군을 가장 가까이 지켜봤던 내시 김처선은 죽음을 무릎쓰고 직언한다. 화가 난 연산군은 그자리에서 활을 당겨 김처선의 가슴을 맞힌다. 칼로 다리를 끊어버리고는 일어나서 걸을라고 한다. 혀까지 뽑히고 온 몸이 난자당한 김처선은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만다. 김처선의 재산을 몰수하고 부모의 무덤을 뭉개고 석물을 치워버렸다. 양아들은 연좌죄로 처벌받고 김처선의 아내는 관청의 종이 되었다.

연산군은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김처선의 이름 처處자는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후 24절기의 처서는 조서로 이름이 바뀌고 연산군이 즐기던 처용무는 풍두무로 바뀐다. 

200년 뒤 영조는 김처선에게 충성스럽게 간언하다는 의미의 '충간'이라 하며 명예 회복을 시킨다. 영조는 정려문을 세워주고 양자를 들여준다. 

 

 

김처선과 같은 연산군 시대 연산군에게 복종한 내시 김자원이 있었다. 연산군 옆에 붙어서 입안의 혀처럼 굴며 왕의 수족이 되었다. 내시 김자원은 사관이 없는 자리에서 왕의 말을 전달하기도 하고 연산군의 개인 비서로 왕의 눈과 귀로 살았다. 김자원은 연산군의 폐정, 악정, 주색잡기에 몰두하는 것을 간신처럼 충동질하거나 연산군이 그런 행동을 하도록 도와준 인물 중 한명이다. 김자원에게 잘못보이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내시는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조선 왕실의 관리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내시 반하경은 을사조약에 반대하며 대로에서 할복한다. 1908년 내시부가 공식적으로 폐지된다. 제도 폐지와 함께 내시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조선 왕조와 운명을 함께 한 내시들은 왕의 그림자로 살다 간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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