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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임진왜란 선조의 도망, 평양성 전투

by 소시민스토리 2024.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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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선조의 도망, 평양성 전투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20만 대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1592년 4월 13일 순식간에 부산을 함락시키고 한양을 향해 북상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1592년 4월 30일 선조는 부랴부랴 몽진을 떠난다. 백성들은 궁밖에서 피난을 떠나는 선조에게 궁을 버리지 말 것을 간청한다.

선조의 피난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군을 조선 8도로 풀어 선조를 잡으라고 명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일 만에 조선의 심장 한양이 함락당했다. 선조는 서둘러 몽진을 하는데 개성을 지나 평양성에 당도했다. 피난을 가기 위해 흩어진 평양 군민들을 모두 소집한다. 평양성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키겠다는 유시를 내리고 자신을 믿고 동요치 말라고 한다. 

 

"평양의 부로父老와 군민들을 소집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겠다... 성을 지키겠다는 뜻을 유시하고.."

-선조실록 1592년 6월2일 

 

선조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모여들었지만 사태가 급박해지자 선조는 의주로 떠나버린다.  

1592년 6월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에게 결국 평양성은 함락당한다. 임진왜란 발발 불과 2달 만에 평양성까지 함락시켰다. 평양성 함락은 조선땅 2/3가 일본군 발아래에 들어갔으며 임진왜란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한다. 

 

선조가 도망을 가자 평양 백성들은 엄청난 분노를 표출했다. 

'백성들이 부르짓기를 "이미 성을 버리려고 했으면서 왜 우리를 속여 성에 들어오도록 하여 적의 어육魚肉이 되게 하는가?"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병장기를 든 채 만나는 사람마다 치곤하였는데 그 혼잡스런 상황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6월 1일

 

조정에서는 난동으로 간주하고 주동자 몇몇을 잡아 목을 벤 후 겨우 진정이 되었다. 

평양성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였다. 선조가 평양성으로 들어오자 전국의 양식이 평양성으로 모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평양성으로 모여들어 항전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가 성을 비우고 다시 몽진을 선택했다. 

선조가 평양성을 버리고 떠난 이유는 삼도근왕군의 패배소식을 들어서였다. 한양이 함락된 이후 충청, 경상, 전라 5만이 넘는 대규모 삼도근왕군이 북상해서 한양 수복을 꾀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가 대패를 했다. 선조는 자신을 구원해 줄 군사가 없다는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평양성 함락을 부른 조선군의 실책도 있었다. 대치하고 있던 일본군이 대동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평양성 앞 대동강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동틀 무렵 대동강 지리를 잘 아는 평양성에 있던 조선군이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 수백명을 격퇴한다. 일본군이 반격을 가하는 과정에서 조선군이 쫓기게 된다. 급한 마음에 대동강 가장 얕은 곳으로 강을 건너자 일본군이 그것을 보고 얕은 곳을 파악하게 된다. 일본군에게 평양성을 함락당한 후 조선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의주로 피신한 선조는 급기야 요동 망명을 거론한다.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선조실록 1592년 6월 13일 

 

1592년 6월 명나라 부총병 조승훈이 이끄는 3천여 명의 명나라군이 참전한다. 조선에서 원군을 요청 한지 두 달 만에 이뤄진 파병이었다. 

명나라파병은 16세기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전으로 양상이 변화한다. 명나라가 파병을 늦게 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이 일본과 합세하여 길을 안내해서 명나라를 처들어 온다는 소문, 조선향도론朝鮮嚮道論이 퍼졌다. 

명나라는 한양이 빠른 시일에 함락되자 의심을 가졌다.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을 왔다고 하자 명나라는 송국신을 보내 국왕의 진위를 실제로 알아보게 했다. 선조의 얼굴을 확인하고 조선이 쉽게 무너졌다는 사실에 명나라도 당황했다. 

 

명나라 1차 파병 규모는 조승훈을 중심으로 기병 3천 명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일본군을 우습게 여겼다. 

"조승훈 왈 "내 일찍이... 10만 몽골군을 섬멸시켰으니 왜놈을 개미나 모기같이 볼 뿐이오"

-연려실기술

 

 

조명연합군으로 조승훈의 명군 3천 명과 조선군 3천 명이 일본군 1만 5천 명과 싸워 대패했다. 

당시 비가 내려 명군 기병에게 불리했다. 일본군은 빈 성처럼 꾸며 매복하고 있었다. 명나라군은 파악 못하고 들어갔다가 일본 조청 부대가 일제히 사격해서 전멸당한다. 

'적들은 험한 곳에서 숨어서 조총을 요란스럽게 쏘니 ...진흙 속에 빠져 도망치지 못한 자는 모두 적에게 죽고 말았다'

-징비록

 

명나라 군사 3천 명 중 2,300명이 전사했다. 명나라는 당황한다. 평양성이 함락당하고 의주까지 일본군이 올라오자 명나라가 비상이 걸렸다. 명나라는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명나라에서 일어난 발배의 난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평양성의 일본군과 강화협상 시도를 한다. 조선은 그 자리에 없었다.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가 휴전을 제의하자 더욱 기고만장해진다.

'일본군은 더욱 교만해져.."양 떼가 범을 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양은 명나라 군사들이요, 범은 저들을 가리킨 것이었다'

-징비록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궁극적 목적은 명나라 정벌이었다. 조선을 삼키고 조선의 왕을 선봉으로 명나라를 치는 것이 그의 야심이었다. 

'조선이 나의 명령에 따른다면 일본군의 선봉에 서게 하여 명나라로 나아가리라'

-히야시 라잔, 도요토미 히데요시 보

 

1590년 첨지 황윤길을 통신사로 사성 김성일을 부사로 삼아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통신사를 복속사절로 오해했다. 조선에서 신하가 되겠다고 한 적은 없다. 

 

명나라 평양성 협상 목적은 일본군의 본심 파악과 50일 휴전을 통해 시간을 벌어 명나라 자국방어 및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함이었다.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협상 과정에서 대동강 이남 지역은 일본이 갖겠다고 한다. 이에 명군 심유경은 본국에 가서 상의해 보겠다며 50일 동안 휴전하자고 한다. 

 

 

1592년 12월 명나라는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4만 여 병력을 급파했다. 1593년 1월 평양성에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이 다시 맞붙는다. 3일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고니시 유키나가 이끄는 일본군은 후퇴한다. 조명연합군은 평양성 탈환에 성공했다.  평양성 탈환으로 임진왜란의 전세가 역전된다. 

 

유성룡은 이여송을 처음 만났을 때  '이여송은 나를 맞이했는데 대해보니 헌헌한 장부였다'라고 기록한다. 

이여송은 위풍당당하고 빼어난 모습이었다. 이여송은 조선인의 후예였다. 아버지는 이성량으로 평안도 강길 출신이며 요동의 군벌로 발배의 난을 진압하여 명나라에서 위세가 대단했다. 

'이여송이 조선에 올 때 아버지 이성량이 글을 주기를 "조선은 바로 우리 선조의 고향이니, 너는 힘쓰라"

-선조수정실록 26년 9월 1일 

 

유성룡은 이여송이 오자마자 평양성 지도를 들고 찾아간다. 조승훈이 평양성에서 패배한 것을 본 유성룡이 지도를 가지고 가 평양 지형을 설명했다. 

'나는 평양 지도를 꺼내 놓고 자세히 설명했다... 이여송은 내가 가리키는 곳마다 붉은 글씨로 표시했다'

-징비록 

 

 

도원수 김명원 등 조선군 1만여 명이 조명연합군으로 활약했다. 

'부총명 조승훈과 유격은... 조선의 병사 김응서, 이일 등과 평양성 함구문을 공격하였다'

-선조실록 26년 1월 11일 

 

'명나라 군사도 일본군의 뒤를 추격하지 않았는데 오직 이시언 만이 그 뒤를 쫓아 왜병 60여 명을 베었다'

-징비록 

 

일본군의 평양성 패배의 원인 중의 하나는 조선의 추위였다. 

'일본군은 눈이나 얼음 위를 걷는 데 익숙하지 못한 데다...수많은 자들이 동상으로 엄지발가락이 떨어져 나갔고...'

-프로이스 일본사

 

날씨는 춥고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잘 먹지를 못했다. 일본군의 보급로 집결지는 대동강 남쪽의 중화였다. 평양과 중화 사이 보급로가 차단당했다. 보급로를 차단한 것은 조선의 정규군이 아니라 의승군이었다. 

유정, 휴정 대사가 이끄는 의승군들이 평양성 전투에 참여한다. 

'의승군은 3개월 동안 평양과 대동강 남쪽의 일본군 보급지인 중화 사이의 적 보급로를 기습과 유격전으로 차단하였다'

-쇄미록 갑오일록 

 

가장 험난한 평양성 모란봉 전투에서도 선봉에 서서 공격한다. 

평양성을 탈환하자 조선은 매우 기뻐하며 이여송을 칭송한다. 

'이항복이 아뢰기를 "평양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여송 제독의 공이니 생사당生祠當을 짓고...'

-선조실록 1593년 1월12일

생사당生祠當은 공적을 고맙게 여겨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받들어 모시는 사당이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과 이여송을 모신 생사당 무열사武烈祠를 평양에 세웠다. 명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평양성 전투를 성공시킨 비밀 병기는 화포火砲였다.

이여송 장군이 이끄는 북병의 기마부대와 송응창 경략이 이끄는 남병南兵의 화포부대가 대거 참여했다. 남병南兵은 절강, 복건성 등 남쪽 지역 출신 병사들로 화포가 주무기였다. 

조선에도 고려말 이후 최무선에 의해 화약 자체를 생산해서 천자, 지자, 승자총통 등 다양한 화포를 사용했다. 지자총통은 굉장히 무거워 2인 이상 사용하는 공용화기였고 들판에서 사용하기보다는 수성전, 해상전에서 주로 사용했다. 화살 대장군전은 천자, 지자총통에 넣어서 적선에 대장군전을 쏘아 배를 공격한다. 

 

호준포

 

명나라 화포는 조선의 화포와 달랐다. 평양성 전투 당시 명군은 불랑기포, 호준포 등을 사용했다. 

호준포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형상이라고 붙여진 명칭이다. 호준포는 기동성이 우수하여 야전에 주로 사용했다. 불랑기포는 모포와 자포로 분리되어 있고 모포 속에 자포를 넣어 고정한 후 발사한다. 전투 전에 자포 여러 개를 장전해서 준비해 둔다. 자포를 빠르게 교체하여 연속 발사가 가능했다. 사정 거리는 500m~1000m이었다. 반면 일본군 조총 사정 거리는 50m~100m였다. 

평양성 전투에서는 화포로 일본 조총수들을 무력화시켰고 조선의 성능이 좋은 천자총통까지 들고와서 화력전으로 성벽을 파괴했다. 근접전에 능한 살수들이 원앙진을 짜서 파괴된 성벽을 타고 올라가 근접전을 치르고 성문을 열었다. 그러면 이여송 장군의 기마 부대가 성 안으로 진입하여 기병전을 치른다.

 

평양성 전투는 16세기 최초의 국제전이며 최대의 근대 화약전쟁으로 평가받는다. 

평양성 전투는 일본군이 거침없이 진격하다가 개전 이래 최초로 퇴각하는 전투였다.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제2군 가토 기요마사가 한양까지 퇴각한다. 

일본군이 평양성 함락이후 머물면서 더 이상 북진을 하지 못한 이유는 이순신 장군이 바다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결정적 실수는 이순신을 몰랐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틀어막고 있어 보급로를 차단당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 대첩 승리로  일본군의 보급로는 완전히 막혀버렸다.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연해 지역을 보전함으로써 ...이순신이 단 한 번의 싸움에서 이긴 공이다'

-징비록 

 

당시 일본군은 조선의 주요 거점만 장악하고 있었다. 의병 때문이었다.

'의병이 쳐들어와도 따라가지 말고 성을 지키고 있어라'

-소가문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 

의병들은 일본군의 보급로 곳곳을 차단해 전력을 분산시켰다. 

 

평양성 탈환으로 사기가 오른 이여송은 1천여 기병을 이끌고 벽제관으로 향한다. 벽제 혜음령에 일본군은 매복해 있었다.

'적이 보병을 써서 날카로운 긴 칼을 휘둘러 좌우로 치니 인마人馬가 모두 쓰러져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징비록

장검을 휘두르며 좌우로 나타난 일본군의 공격에 이여송의 기마공격은 무너졌다. 명나라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여송은 동파로 물러나겠다고 한다. 임진강을 건너 돌아가겠다는 뜻으로 사실상 전투 중단을 선언한 것이다. 

 

이후 명나라와 일본은 본격적으로 강화협상에 돌입한다. 일본군의 안전한 퇴각을 보장하고 서둘러 전쟁을 끝내려 했다. 명나라는 조선군의 추격까지 금지시켰다. 

이여송의 전공은 날조된 것이 많았다. 

이여송이 평양의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 명나라 군사들은 전공 다툼을 하면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둔갑시켜 희생시키까지 했다. 명나라 원군에게 재산, 목숨까지 수탈당한 조선 백성들이었다. 일본군은 조선인의 코와 귀를 잘라 가져갔다.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조선이 위기를 넘긴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 명군에게 의존한 조선 조정은 의리를 지켜야 된다며 지나친 대명의리와 명분만 강조하며 명나라가 멸망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감각이 무뎌지고 있었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귀를 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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