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을 자처한 궁예
'옴마니반메훔'은 천수경에 나오는 주문이며 이 주문을 많이 외우면 관세음보살의 맑고 깨끗한 세계로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신라는 왕 자체의 호칭에서부터 불교식으로 이름을 짓는다. 불교가 처음으로 공인된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진덕여왕은 불교식으로 왕의 묘호를 붙였다. 진평왕은 자신을 백정白淨이라 부르고 진평왕의 부인은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불렀다. 백정은 석가모니의 아버지이며 마야부인은 석가모니의 어머니이다. 불교의 권위를 빌어서 왕권을 강화했다. 하지만 스스로 부처를 자처한 왕은 궁예가 유일하다.
궁예는 신라 47대 헌안왕과 후궁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48대 경문왕의 아들이기도 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기록이 없는 미스터리한 출생이다. 궁예는 5월 5일 태어났고 태어나는 순간 지붕 위에 흰 빛이 서렸다. 이것을 본 일관日官이 기록을 남겼다. 일관은 삼국시대 천문 관측과 점성을 담당한 관원이다.
"이 아이가 오午자가 거듭 들어있는 날(5월 5일)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가 있으며 또한 광선과 불꽃이 이상합니다
장래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오니 기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삼국사기
태어난 궁예(857~918년)를 마루 아래에 던저버렸다. 마루 밑에 젖먹이는 여종이 아기를 받다가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게 되었다.
궁예는 활궁弓, 후예裔, 활을 가진 자의 후예라는 뜻이다. 궁예의 법명은 선종禪宗이다.
궁예는 절에서 생활했는데 10세 무렵 장난기가 넘쳤다. 유모가 기록으로 남겼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라의 버림을 받았는데 차마 어쩌지 못해서 오늘날까지 몰래 너를 길러 왔다
너의 미친 짓이 이와 같으니 필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고 나와 너는 함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삼국사기
이 말을 들은 궁예는 눈물을 흘리며 떠난다.
당시 신라에서는 대중적 신앙 '선종 불교'가 유행했고 엄격한 교리를 벗어나 기도와 참선을 중시했다.
궁예는 승려가 되기 위함보다는 수원승도로 절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하층 계급이었을 것이다.
궁예는 장성하자 승려의 계율에 구애받지 않고 기상이 활발하여 뱃심이 있었다.
절에서 나온 궁예는 892년 북원(지금의 강원 원주)의 도적 양길에게 투신하였고 신라 공격에 나섰다. 양길은 궁예를 우대하고 병사를 주었다. 궁예는 영주 부석사에 있는 신라왕의 초상화를 칼로 내려쳤다. 궁예의 아버지로 알려진 경문왕 또는 헌안왕이 초상화로 그려져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칼자국의 흔적은 고려 때까지 남아있었다. 부패한 종교와 타락하고 무능한 왕실로 혼란스러운 시대,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889년 진성여왕 시대 기록에 신라사회의 혼란상이 담겨있다.
'서기 889년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세금을 보내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재정이 궁핍하였다
임금이 사람을 보내 독촉하니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삼국사기 제11권
도적 중 원종과 애노가 난을 일으킨다. 원종.애노의 난은 조세부담에 대한 반발로 원종과 애노가 일으킨 농민반란으로 신라 붕괴의 기폭제가 되었다.
10세기 통일 신라 말기 중앙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의 심화되어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호족은 지방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진 친족집단으로 신라 말 사회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완산주(전주)에서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다. 강원도 일대와 경기도 일대를 아우르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게 된다. 신라까지 후삼국시대를 형성한다. 견훤과 궁예, 신라의 경순왕이 후삼국 시대를 이끌었다.
궁예는 연전연승을 했고 휘하 장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궁예는 사졸과 고락을 같이 하며 주거나 뺴앗는 일에 이르기까지 공평하여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아랫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명주에 갔을 때는 성안에서 문을 열어주어 무혈입성했다. 650여 명의 군사가 명주에서 3,500명으로 불어났다. 명주지역의 하층민과 일부 호족 세력을 규합하면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다. 궁예에게 성장의 날개를 달아준 사람은 송악을 거점으로 활약했던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었다. 당시 왕건의 나이는 20세였다. 왕건은 궁예의 기대대로 승전을 거듭하면서 후고구려 영토 확장에 기여한다.
거침없이 세력을 넓혀가던 궁예는 태백산맥을 넘어 개성과 철원을 아우르며 승리를 거듭했다. 901년 마침내 나라를 고려를 세우고 스스로 왕이라 일컫었다. 훗날 한반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태봉의 시작이었다. 즉위 3년 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연호 무태를 사용했다. 905년 수도 철원에 평지에 낮은 토성을 쌓아 웅장한 도성을 축조했다. 궁예가 꿈꾸는 이상국가의 상징이었다.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길 때 낮은 토성을 축조해 백성들과 함께 하려고 했다. 신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골품제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했다.
904년, 911년 두 번의 관직 제도 개편을 추진했다.
마진은 태봉으로 바꾸기까지 사용했던 국호(904~911)이며 마하진단의 약자이다. 마하진단은 대동방국이라는 뜻이다. 독자적인 국호와 연호를 사용해 자주성을 부각했다.
신라의 골품제
골품제는 신라의 귀족을 여러 등급으로 나눈 신분제이다. 골骨 품品은 뼈의 등급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신분을 의미한다.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이며 3두품 이하는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혼인은 같은 골품 내에서만 허용되어 근친혼도 매우 흔했다.
골품제는 신라 사회를 운영하는 기본 원리이자 중요한 기준이었기 때문에 관직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흥덕왕은 834년 사치를 금지하는 왕명을 내렸다. 복식을 규정하는 법령을 선포하였고 이를 어길 시에는 형벌에 처했다. 의복에 대해서 외투, 머리에 쓰는 복두, 상의, 버선 등 각 품목에 대해서 골품에 따라서 사용할 수 있는 재질과 색깔 등을 엄격히 규정했다.
골품에 따라서 지을 수 있는 건물의 규모와 건축 자재도 규제했다. 사용할 수 있는 목재, 지붕 덮는 기와의 종류, 계단의 크기, 담장 높이,마굿간의 크기까지 정해져 있었다.
신라 3최라고 일컬어지는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는 6두품으로 최고의 실력을 가졌지만 신분 제약 때문에 신라에서 능력을 펼칠 수 없었다. 최치원은 은거했고 최승우는 견훤을 지원했으며 최언위는 고려의 왕건에게 귀의해서 결국 신라를 무너트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궁예의 폭정
궁예는 정비 강씨를 간통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잔인하게 죽였다. 두 아들 역시 그 날로 목숨을 잃었다.
"뜨거운 불로 쇠방망이를 달구어 음부를 쑤셔 죽였다"
-삼국사기
왕비 강씨는 황해도 신천 대호족의 딸이며 왕건 집안과 친밀했다. 역모 가능성을 차단하려고 죽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며 행차를 나갈 때는 황금 고깔을 쓰고 몸에는 방포를 입었다. 비단으로 두른 백마를 타고 소년소녀들로 일산(우산)과 향화를 받들게 하고 비구 2백여 명에게 찬불가를 부르며 뒤따르게 했다.
궁예는 스스로 20권의 경전을 짓는다. 901년 신라말기 승려 석총에게 읽어보라고 주자 석총은 궁예의 불경을 비판하다 철퇴로 맞아 죽었다.
궁예의 폭정은 날로 흉악해졌고 신하들이 몇몇이 모여 은밀하게 모의한다. 그들은 새로운 왕을 추대할 것을 결의했다. 궁으로 향하자 앞뒤로 달려와 따르는 자들이 많았고 기다리는 자들도 1만여 명이 되었다.
"궁예는 평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얼마 되지않아 부양 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홍유는 궁예의 신뢰를 받던 부하였으나 왕건 추대에 합류하여 고려 개국 공신이 되었다. 이들이 궁예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은 궁예의 나라가 결국 호족과 결별했다는 의미이다.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자 처음 지지했던 호족들이 궁예로부터 이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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