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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견훤과 왕건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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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과 왕건 

10세기 후삼국 시대가 도래했다. 남쪽에는 맹주 후백제 견훤이 있었고 북쪽에는 신흥강자 고려 왕건이 있었다.

 

견훤은 무진주와 완산주를 중심으로 서남지역에서 우세를 펼치고 있었다. 고려 왕건은 송악과 평양을 중심으로 세력을 점차 확장하고 있었다. 누가 신라를 차지하는 가에 따라 삼한의 새 주인이 가려질 것이다. 견훤은 경북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아버지는 아자개로 농부 출신이었다가 가문을 일으켜 호족이 되었다. 서남해 방수군 비장 출신이며 창을 베고 자는 것이 특기였다. 지렁이의 아들, 호랑이 젖을 먹고 성장했다는 설화가 있으며 백제의 부활을 주장하며 반기를 들었다. 900백년 완산주에 도읍을 정한 견훤은 의자왕의 복수를 외치며 반反 신라 정책을 표방했다.

 

삼국유사의 수록된 견훤의 탄생 설화가 있다. 

한 처녀의 꿈속에 밤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찾아왔다.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고 싶어서 사내의 옷에 실을 꿰어 바늘을 꽂아두었다. 실을 따라간 곳에는 큰 지렁이가 발견되었다. 처녀가 낳은 아들이 견원이었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후백제 왕이 된 견훤의 역경을 극복해 낸 힘을 지렁이의 자생력에 비유했다.

견훤은 상주에서 태어나서 경주에서 군 입대를 했고 서남해안 방수군 활동을 한다. 세력을 키워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쪽으로 북상을 한다. 나라를 세우기 위해 광주, 전주 지역민들의 백제 계승의식을 이용한 것이다. 

 

왕건은 송악(개성)출신으로 아버지는 용건으로 송악 호족 대표였다. 한찬 해군대장군 출신으로 별명이 용손龍孫이었다.  궁예의 부하에서 정변으로 왕이 되었고 고구려의 부활을 주장했다. 

기록에 탄생설화가 있다. 왕건이 태어날 때 신비스러운 광채와 자주빛 기운이 용 모양으로 나타났다. 할아버지 작제건이 용왕의 딸과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용건이다. 다라서 왕건은 용의 손자가 되는 것이다. 용 설화를 통해 신성한 존재임을 강조했다. 

 

왕건 집안은 개성, 예성강 유역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 활동을 했다. 왕건의 선조들이 해상왕 장보고의 활동 시기와 비슷하다. 신라 말 신라 왕실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민란과 도적이 들끓어 지역민들은 자신을 지켜야 했다. 이때 지방의 촌주가 중심이 되어서 지역민들을 뭉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중앙 정부로부터 독립된 세력으로 호족이 성장했다. 촌주, 상인, 도적, 농민 등 다양한 세력들이 호족으로 성장했다. 

 

 

918년 고려 왕건은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화친을 맺고 친親신라 정책을 내세운다.927년 9월 신라와 고려의 친교를 끊기 위해 신라 포석정을 급습한 후백제군, 견훤은 신라 왕실을 짓밟고 급기야 신라 경애왕에게 자결을 명하고 후백제에 꼭두각시가 되어줄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올린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의 왕건은 정예기병 5천 명을 이끌고 공산성(대구 팔공산)에서 후백제군과 전투를 벌이게 된다. 하지만 후백제군의 맹공에 포위까지 당하는 위기에 처한다. 치열한 접전 속에 감락, 신숭겸 장군이 전사하고 고려군은 대패하고 만다.

왕건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 목숨을 건지게 된다. 왕건이 즉위 한 지 9년 만에 치러진 전투이며 후백제 견훤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대구 팔공산 근처에는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왕건의 군대가 싸움에서 진 고개는 파군재, 도망간 왕건이 사라진 곳은 시랑리(실왕리), 왕건이 비로소 마음을 놓은 곳은 안심동 등이 있다. 

 

왕건은 즉위한 지 44일 만에 기존 세금을 1/3로 경감시킨다. 생산량의 1/10로 고정시키겠다는 것이며 고려시대 내내 최초 조세 수취율이 10분의 1로 고정된다. 

"마침내 민간에 3년 동안의 조세, 부역을 감면하였다"

-고려사절요 

 

 

견훤이 새나라를 건설하려고 나섰을 때 백성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견훤...무리를 불러 모으니 가는 곳마다 호응하여 한 달 만에 5천 명에 달하였다"

-삼국사기

 

서남 해안은 나주를 중심으로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을 뜻한다. 왕건이 궁예의 부하로 있을 시절에 왕건의 수군이 차지했던 곳이다. 견훤은 주변국과 외교에서 후백제가 한반도의 대표 국가이길 희망했다. 그래서 해상로 확보를 위해 나주 서남 해안 지역이 필요했다. 그래서 왕건이 점령하고 있던 나주 지역을 탈환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공산전투에서 이긴 견훤은 왕건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 목적하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어 놓고 말에게 대동강의 물을 먹이는 것이다"

-삼국사기

 

 

918년 고려로 한 호족이 귀부해 왔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고려로 귀부 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견훤은 분노를 감추지 못한다. 

"상주 반란군의 우두머리 아자개가 사신을 보내어 귀부해왔다"

-고려사

 

상주지역을 고려는 남진하고 후백제는 동진을 한다고 했을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이 지역을 누가 차지하는냐는 중요한 문제였는데 상주 호족 아자개가 고려 왕건에게 귀부 한 것이다. 

호족이 귀부할 경우 그를 따르는 군사, 재산, 지역민들도 이동한다. 상주지역을 왕건에게 통째로 빼앗겼다. 

 

삼한을 무력으로 제압해 나가던 후백제는 930년 고창성에서 고려군과 전투를 벌였다. 견훤은 고창군 밑에 주둔해 왕건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8천여 명이 전사했다. 고려군이 대승했고 안동 호족들의 협조가 있었다. 승기를 잡은 왕건은 신라를 방문해 신라 왕실을 비롯해 백성들에게 무력진압 대신 호의를 베풀며 마음을 얻어낸다. 왕건은 자신에게 귀부해 오는 호족들은 그 세력을 그대로 인정해 준다는 약속을 하는 중폐비사 정책을 쓴다. 

중폐비사는 호족들에게 후한 폐백을 주며 자신을 낮추는 정책이다. 후백제 견훤 역시 호족 정책을 시행하지만 포용보다는 호족을 지배하려고 했다. 

 

고창성 전투에서 고려가 승리하고 신라 동쪽 110개 성 모두 고려에 항복한다. 고창성 전투에서 유래된 안동의 민속놀이는 차전놀이다. 안동 차전놀이는 고창 전투 때 사람들이 견훤을 낙동강으로 밀어 넣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 팔짱을 낀 채 어깨로만 상대편을 밀어낸다. 안동지역 초등학교 운동회의 꽃은 차전놀이다. 

 

926년 발해가 멸망하고 유민들의 고려로 대거 귀부 한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이에 격분한 장남 신검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견훤은 장남 신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서 고려에 귀부 한다.

견훤의 장남 신검의 외가는 광주 지역 호족 가문이다. 견훤의 넷째 아들 금강의 외가는 전주 지역 호족 가문이다. 후계자를 정하는 것은 두 지역 호족 가문의 팽팽한 세력 다툼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935년 견훤의 고려 귀부는 신라 왕실에도 영향을 미친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신라 경순왕은 고려로 귀부 한다. 

 

고려로 귀부한 후백제 견훤은 상보尙父라고 불리며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견훤이 오자 ...상보尙父라고 부르고 남궁을 숙소로 주었으니 직위가 백관의 윗자리에 있게 되었다"

-삼국사기

극진한 대접 속에 고려에 안착한 견훤은 왕건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견훤은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아들들을 벌하여 줄 것을 요청한다.

"늙은 신하가 전하에게 투신한 이유는 전하의 위엄을 빌려서 반역한 자식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견훤은 왕건과 함께 후백제 공격에 나선다. 고려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후백제는 속수무책 무너지고 만다. 견훤의 아들 후백제왕 신검은 항복한다. 

"견훤은 울화가 치밀어서 등창이 났다, 결국 며칠 만에... 죽으니 그의 나이 70세였다"

-삼국유사

 

936년 마침내 고려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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