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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청산리 전투와 체코군단 무기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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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와 체코군단 무기 

1920년 10월 21일 중국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격돌한다. 6일 동안 치른 10차례 전투에서 독립군은 백전불패의 신화를 쓴다. 무장독립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였다. 청산리에는 김좌진과 홍범도가 있었다. 1910년 한일 간 강제병합 이후 10년 만에 거둔 대승리였다. 

김좌진(1889~1930)은 북로군정서 사령관이었다. 홍범도(1868~1943)는 대한독립군 사령관이었다. 

날으는 홍범도가歌는 1900년대 함경도 주민들이 홍범도 장군을 칭송하며 부르던 노래이다.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 홍범도가歌

 

청산리 전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치러진 전투이다.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 중국 청산리 일대에서 5박 6일 동안 10여 회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이다. 완루구 전투(10월 21~22일), 어랑촌 전투(10월 22일), 천수평 전투(10월 22일), 고동하전투(10월 25~26일), 백운평 전투 (10월 21일) 등 

여러 차례 전투를 종합해서 청산리 전투라고 부른다. 

 

청산리 독립전쟁이 일어난 배경

 

1919년 후반 독립군의 국내 진공 작전이 활발하게 이뤄진다.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독립군이 수행한 국내 진공 작전은 총 24회에 달했다. 1920년 3월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이 일제 관공서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했다. 독립군의 진공 작전에 일본군에게는 커다란 불안 요소가 되었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강양동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기습 공격했다. 1920년 6월 6일 독립군이 추격하던 일본군을 삼둔자(중국의 북간도 지역)에서 격파한다. 일본군은 '월강추격대'를 정식 편성하여 독립군들을 추격하기 위해 봉오동 지역에 나타난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 최초의 전면전이었다. 1920년 6월 7일 중국 봉오동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이다. 

봉오동은 당시에는 봉오골로 불렀고 산골짜기 큰 마을이었다. 봉오골은 입구에서부터 직선거리로 약 10Km 정도 되는 긴 골짜기이다. 

 

월강추격대는 두만강에서 독립군 근거지 봉오동까지 직선 거리 20Km를 진격해 왔다. 독립군은 봉오동 4군데에서 매복해 있었다. 일본군 월강추격대가 골짜기에 들어서자 포위하고 집중사격하자 포위된 일본군은 퇴각했다.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에게 치욕적인 패배였다. 

홍범도장군은 '백두산호랑이'로 이름을 날릴정도로 백두산 기슭에서 호랑이를 잡던 명포수였다. 

독립군에게 자주 한 말이 있다.

 

"호랑이 잡을 때는 어디에 몸을 숨기고, 어떻게 끌어들이고 언제 몰아야 할지 잘 생각해야 한다

일본군 잡는 것도 짐승 잡는 우리 방식대로 하면 된다"

-중국 수남촌 라철룡 촌장 회고 中

 

홍범도 장군은 전투 경험이 풍부했다. 1910년 전에는 의병으로 활동했고 러시아로 가서 계속 의병 활동을 했기 때문에 뛰어난 유인술은 가지고 있었다. 월강추격대가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제2중대 제3분대장 이화일 부대에게 일본군을 공격해서 퇴각하는 척하며 봉오골로 유인하라고 명령한다. 6월 7일 새벽에 이화일 부대는 일본군을 공격하고 일본군이 반격을 하니 후퇴하는 척하며 독립군이 매복해 있던 곳까지 유인해서 매복 독립군들이 에워싸고 공격을 했다. 

사상자가 늘어난 일본군은 후퇴를 하는데 끝까지 제2중대장 강상모가 추격한다. 때마침 날씨가 변하면서 소나기에 우박까지 내리면서 날이 흐려진다. 결국 일본군끼리 총격으로 자멸한다.

 

"독립군이 700~800미터 거리에서도 사격을 했고 지형을 이용한 방어가 상당하고 전투에 용감하게 임했다"

-<봉오동전투상보> 야스카와 지로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을 마치 전시 상황처럼 행동했고 용감했다. 1920년 만주 일대 조선인들은 전시상황으로 생각하고 독립군들을 도와주었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운다. 독립군 초토화 기간은 단 두 달로 잡는다. 

불령선인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조선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1920년 8월)은 한 달 동안 독립군을 섬멸하고 이후 한 달 안에 독립운동가 색출 및 제거한다는 것이다. 무려 2만 명이 넘는 병력이 동원된다. 중국의 국경을 넘는데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마적 장강호를 돈으로 매수한다. 중국 마적단은 두만강 건너의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불태운다. 

일본영사관은 이미 아무도 없었다. 훈춘사건은 1920년 일본 제국이 독립군과의 전투 명분을 만들기 위해 중국 마적단과 내통하고 고의로 일본 관공서를 습격한 사건이다. 

 

일본군은 중국군을 찾아와서 일본군이 출동하기 전에 독립군을 몰아내라고 한다. 부담을 느낀 중국군이 독립군을 찾아와 북간도에서 떠나라고 한다. 중국군의 요청대로 백두산 일대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독립군이 백두산으로 이동한 이유는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은신에 효과적이고 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륙지역이어서 국내로 들어와서 진공 작전을 하기에 유리했다. 

중국군은 이동하라고 하며 제시한 요구 조건이 있었다. 사람 많은 곳을 지나가지 말아라, 낮에는 움직이지 말아라,였다. 

독립군은 밤에 산길을 따라서 백두산으로 이동했고 이동의 속도는 느렸다. 일본군은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낮에도 진격할 수 있어서 빠르게 북간도를 압박해 왔고 독립군은 이동 중에 청산리 일대에서 꼬리가 잡히고 만다. 

 

김좌진 부대는 청산리 백운평으로 이동하던 중에 일본군 두 개의 부대를 맞딱들인다. 결전의 장소로 선택한 곳은 백운평이었다. 청산리 일대를 관통하는 25Km의 계곡이 가파르고 백운평지역은 청산리 계곡에서도 폭이 2~3리로 가장 좁고 가파른 절벽 지형이며 양쪽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골짜기 중앙에는 평평한 공터이며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오솔길이 있었다. 

김좌진 장군은 부대를 두 개로 나눈다. 사격이 뛰어난 병사들은 백운평 골짜기에 배치를 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건너편 산기슭에 배치하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한 첩보전을 위해 마을 주민들을 활용한다. 독립군이 무기도 갖추지 못한 채 무서워서 허둥지둥 도망갔다고 말한다. 마을 주민들은 목숨을 걸고 거짓정보를 흘렸다. 

일본은 척후병을 보내 백운평 일대를 수색 중 독립군 기병의 말똥을 발견한다.

척후병은 적의 형편이나 지형 따위를 정찰하고 탐색하는 임무를 맡은 병사이다.

척후병은 말똥을 발견하였다.

말똥이 말라있고 온도가 낮아있어 독립군이 지나간 지 하루 정도 일것이라 파악한다. 김좌진 장군은 사실을 지나간 것이 아니라 백운평 골짜기에 매복하고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군이 골짜기에 들어와서 10걸음 앞에 도달하는 순간 일제 사격을 시작해서 전과를 올린다.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에 보병, 기병, 포병, 기관총 부대를 총동원했다. 독립군을 색출하고 진압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가 일어난 밤에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부대는 완루구에서 일본군과 결전을 치렀다. 홍범도부대를 남북으로 포위한 일본군에 맞서서 홍범도 장군은 '치고 빠지기' 전술을 한다. 우왕좌왕한 일본군은 또다시 오인 사격으로 자멸한다. 날씨가 안개가 짙게 끼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은 혼비백산하여 사상자 수백 명이 생긴다. 독립군은 위장술을 이용한 매복술의 귀재였다. 청산리 일대의 복잡한 산골짜기 지형에서 가장 좋은 고지를 선점하고 매복하는 작전을 썼다. 소나무와 잣나무 가지로 위장하고 있었다. 당시 10월이었고 청산리 일대에는 낙엽이 가득해서 떨어진 낙엽을 덮고 있었다.

 

청산리 전투에서 쓰인 무기

 

 

청산리 전투에서 가장 많이 쓰인 무기는 모신나강 소총이었다. 독립군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러시아제 소총이었다. 소련의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가 사용한 총이다. 

독립군은 러시아, 일본, 독일, 벨기에, 미국 여러 국가의 최신식 무기를 사용했다.

 

 

마우저 C96는 독일에서 제작한 반자동 권총이다. 10발 정도의 총알을 장전하고 연속으로 쏠 수 있는 소총이었고 홍범도 장군이 즐겨 사용했다.

 

 

맥심기관총은 러시아에서 제작했고 1분당 500~600발 사격이 가능했다. 

 

밀스 수류탄은 1915년 영국에서 개발된 보병용 수류탄으로 독립군이 2,000개 보유하고 있었다. 

 

 

청산리 독립전쟁 결정적 승리 역할  '체코군단' 무기

청산리 독립전쟁의 결정적인 승리 역할을 한 것은 '체코군단'의 무기 덕분이었다. 러시아는1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의 전쟁에서 발을 뺀다. 할 일이 없어진 러시아군 소속 체코군단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6만여 명의 체코 군단이 귀향길에 오른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가야 했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고 짐을 줄여야 해서 무기를 처분해야 했다.

 

총기가 절실했던 독립군은 체코군단 무기에 주목한다. 당시 무기 부족에 시달리던 연해주 독립군들에게 최신 무기를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동변상련 체코군단은 독립군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체코군단에서 사들인 무기는 무기 암시장보다 저렴한 가격이었고 독립군은 최신식 무기를 구입할 수 있었다. 

당시 독립군이 체코군단에서 사들인 무기는 박격포가 2문, 기관총이 6정, 소총은 1,200정, 탄약은 80만 발이었다. 총기와 그에 맞는 탄약을 대량 확보한 것이 청산리 독립전쟁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체코군단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에 속해 있던 체코인 병사 가운데 러시아로 투항한 사람들이었다. 러시아 군대에 편입해 독일군과 싸웠지만 이후 귀국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체코군단은 식민 지배의 아픔에 공감했다. 

당시 덴니크 신문에 한국 기사가 실렸다. 3.1일 운동에 관한 기사 내용이 실렸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체코군단이 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발간한 병영신문이다.

 

"한국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고 시위 군중은 전 황제의 시신이 안치된 왕궁까지 행진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19년 3월 18일 자 

 

"일본군 이나하기 대장이 '한국이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무기를 획득했다'라고 러시아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20년 3월 7일 자 

 

당시 체코의 골동품 시장에서 금비녀, 금반지, 비단 보자기 등이 발견되었다. 교민들이 십시일반 지원으로 무기를 구입했다. 무기구입보다 더 중요했던 무기 운반을 해야 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간도 독립군 근거지까지 약 200Km 거리였다. 만주 교민들이 무기 운반에도 힘을 보탰다. 중국군과 일본군 양쪽의 감시를 피해 무기를 운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기 운반은 밤에 산악지대로만 다녀야 했다. 수십조의 운반대를 편성해 200Km의 길을 촘촘히 연결했다. 독립군과 자원한 교민 9천여 명이 총동원되었다. 

 

독립군 병사 1인당 무장 상태는 소총 1정과 실탄 500 백발, 수류탄 1개를 가지고 있었다. 비상식량으로는 좁쌀 6되와 짚신 1켤레가 지급됐다. 전쟁 당시 민가가 있으면 독립군 식량은 하루 감자 3개였다. 그마저도 없으면 좁쌀 한 움큼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 간도 교민들이 독립군에게 주먹밥을 지원했다. 하루종일 싸우느라 밥 먹을 시간도 부족했다. 

 

"어떤 군인들은 전력으로 싸우느라 밥 먹는 것도 잊어 식사에 응하지 않을 때 

부인들이 울며 권하길 '여러분이 만일 이것을 먹지 않으면 우리도 돌아가지 않겠노라"

-<독립신문> 1921년 2월 5일 자 

 

"총알이 비 오는 듯한 중에 치맛자락에 주먹밥을 던져주는 애국 부인들은 독립군의 용기를 백배나 나게 했다"

-청산리 전투에 참가한 독립군 병사 이우석 수기 中

 

청산리 독립전쟁은 완벽한 게릴라전의 승리였다. 독립군이 낯선 공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의 지형 정보, 물자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토벌군의 군용 전화선을 찾아내서 절단시킨 것도 주민이 한 일이었다. 

 

"일본군의 군용 전화선은 각 방면 모두 누누이 항일한인 때문에 절단됐다"

-일제 보고서 '조선군사령관 10월 26일 전보'

 

10월 22일 천수평 전투에서 김좌진 부대가 일본군 기병 부대를 기습 공격해 섬멸한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어랑촌으로 이동한다. 독립군 입장에서는 자신의 불리함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높은 고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에 어랑촌 고지를 선점한다. 고지를 빼앗긴 일본군은 보병, 기병, 포병을 총동원해서 어랑촌에 집결시킨다. 김좌진 장군 부대는 천여 명 정도 되었고 일본군은 5천여 명으로 훨씬 더 많았다. 수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점점 불리해졌다. 천수평 전투에서 쉬지 않고 싸운 김좌진 부대는 상황이 불리했다. 

완루구 전투를 마치고 어랑촌으로 이동하던 홍범도 연합군은 그 전투의 상황을 보고 받고 다시 어랑촌에서 방향을 틀어서 공격을 한다. 일본군은 앞 뒤로 독립군에게 포위당한다. 

 

"김좌진과 홍범도가 지휘하는 부대가 기관총 등 신식 병기를 갖고 있으며 

병사는 약 6천 명으로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

-일제 보고서 '조선군사령관 10월 26일 전보' 

 

독립군은 약 2천여 명이었는데 6천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을 만큼 독립군의 기세가 대단했다. 청산리 지역에서 10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일본군은 한 차례도 독립군을 이기지 못한다. 일본군의 독립군 초토화 작전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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