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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김홍도의 조선 풍속화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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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조선 풍속화 

조선 전반기에는 중국의 사상과 이념을 바탕으로 문화가 꽃피웠다. 그러다 숙종, 영조, 정조 임금이 통치하던 125년은 조선 고유의 문화를  꽃피운 조선 후기 문화 절정기를 가졌다. 정조 시대 붓을 들었던 단원 김홍도와 신윤복은 문화 절정기를 꽃피운 화가들이다.

 

단원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도화서 화원이었다. 

김홍도가 29살 때 22살이었던 왕세손(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처음 만났다. 정조는 24년 통치 기간동안 아주 중요한 그림 그리는 일들은 모두 다 김홍도에게 맡긴다. 

김홍도는 산수화, 초상화 등 모든 소재의 그림을 잘 그리는 천재화가였다. 김홍도가 그렸던 무수한 그림들 중에 오늘날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백성들과 양반들의 삶을 옮긴 풍속화이다. 

 

 

<월하취생>김홍도作

 

방 안에서 선비가 파초잎을 깔고 앉아 있다. 파초잎은 옛날 선비들과 화가들의 훌륭한 연습장이었다.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싹 지우면 또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를 반복 할 수 있었다.

왼쪽에는 지필묵이 놓여 있다. 뒤에는 정갈하게 말린 두루마리 두 개가 완성되어 있다. 

그림 속 화가는 두루마리 두 개  며칠 동안 밤새워 완성해 놓고 그동안 그림 그리느라 마시지 못했던 술로 거나하게 흥이 취한 상태에서 생황을 들고 열심히 불고 있다.

※생황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아악에 쓰인 관악기이다.  

그런데 얼굴을 자세히 보니 잘 생겼다. 키가 180cm 정도 돼 보인다. 그림 잘 그리고 음악도 연주하고 술도 좋아하고 얼굴도 잘 생겼는데 키도 크다. 이 사람은 아마도 김홍도 본인의 모습일 것이다. 

동시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한 바, 김홍도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음률에 두루 밝았고 거문고와 대금, 시와 문장도 그 묘를 다하였다"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

 

오늘날 남아있지 않은 김홍도의 초상화를 이 그림으로 대신할 수 있다. 

그림 오른쪽에 멋들어진 시구 하나가 눈에 띈다. 

 

"월당 처절 승룡음 月堂 凄切 勝龍吟 달빛 비치는 방에 처절한 생황소리 용의 울음을 이기네"

 

이 시구에 '생황소리'라는 주어가 생략되었다. 이 아름다운 시구는 당나라 '나업' 시인이 읊은 <생황>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김홍도는 생황 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나서 멋진 생황 읊은 시를 옮겨다 놓은 것이다.  이 그림은 요즘 용어로 '김홍도 인스타그램'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얼굴에 수염 한 올이 없으니 10대 후반일 것이고 파초잎이 이렇게 찢어질 때는 음력 8월일 것이다. 이 그림을 설명하자면 10대 후반, 음력 8월의 김홍도 인스타그램인 셈이다. 

 

김홍도는 이 그림을 10대 후반에 그린 것은 아니다. 도장을 보면 김홍도가 50대 이후에 쓰던 도장을 찍었다. 50대 이후 자신의 젊은 나이를 생각하고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포의풍류>김홍도作

 

김홍도는 30대에 자신의 모습을 멋지게 그렸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아주 강했기 때문에 자화상 같은 그림을 많이 남겼다. 아까 불던 생황은 방바닥에 놓아놓고 이번에는 다른 악기 당비파를 품에 안고 있다. 

※당비파는 중국에서 전래된 현악기이다.

당비파를 뜯는 의젓한 선비의 모습, 얼굴을 보면 수염이 그윽하다. 아까 깔고 앉아있던 파초잎은 왼쪽에 놓여 있고 물건들이 훨씬 더 많이 등장했다. 오래된 도자기도 있고 지필묵도 있고 두루마리는 이번에는 세워져서 묶여있고 책도 잔뜩 쌓여있고 칼이 보인다. 선비에게 칼은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 

멋진 시구를 읊었다. 김홍도가 지은 시구이다. 

 

"지창토벽 紙窓土璧 종이창에 흙벽 바르고 

종신포의 終身布衣 평생 벼슬 없는 선비로

소영기중 啸咏基中 시가를 읊조리며 살리라"

 

 

<승류조어> 김홍도 作

 

버드나무가 아주 멋진 물가이다. 물가의 버드나무 둥치에 앉아 기다란 낚싯대를 두리운 젊은이는 관례를 올렸는지 아직 총각인 댕기 머리인지는 맞추기가 어렵다. 해맑은 얼굴로 봐서 10대 중후반의 젊은이로 보인다.

버드나무 둥치 아래 물결 표현을 하지 않았다. 아랫부분을 비워서 그림이 훨씬 더 넓어졌다. 

송나라 혜홍 각범 스님이 편찬한 <석문문자선>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멋진 구절을 적었다.

 

"시비부도 조어처 是非不到 釣魚處 시비는 물고기 낚는 데까지 미치지 않는다"

 

낚시하는 이 순간만큼은 세속에서 있었던 모든 시시비비는 모두 다 잊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읊고 나서 마지막에 '단구'라고 서명을 했다. '단원檀園'은 김홍도의 가장 흔한 호號이다. 단구丹邱는 붉을 단, 언덕 구이다. 단구丹邱라는 호는 김홍도가 1792년 충청도 연풍현의 수령이 된 후 사용한다. 

연풍 오른쪽에 단양이 있다. 단양은 강과 산 경치 가운데 일등이었다. 연풍현감 이후 가까운 단양의 또 다른 이름을 빌려 '단구'라고 표현했다. 호號를 통해 그림이 그려진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의 주인공은 평민과 양반들이며 그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았다. 

 

<기우부신>김홍도作

 

평민들은 일상 노동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때가 행복하다. 아이가 지게를 매고 소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이다. 그림의 재목은 <기우부신>이다.

 

"기우부신騎牛負薪 소를 타고 나뭇짐을 지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지게는 중국과 일본 나무꾼은 메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게는 한국 나무꾼만 멘다.

소는 황소이다. 

 

 

 

<청우출관> 정선 作

 

 

<어초문답>이명욱 作

 

김홍도 이전에는 지게를 중국의 멜대로 그렸고 소도 중국 양자강 물소를 그리게 된다. 이것은 뿌리가 중국 뿌리였기 때문에 중국식을 그렸다. 

김홍도 시절부터 조선을 그리게 되고 직접 사생해서 그리게 된다. 사생의 정신이 문화 절정기의 핵심이다. 

김홍도는 조선 냄새를 담은 화가라고 부른다. 이 그림 '기우부신' 속 아이는 앞만 보고 가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다.

시선을 따라가면 물가에서 노는 오리 네 마리가 있다. 물가에서 노는 오리 네 마리에 시선을 주는 마음이 김홍도의 마음이자 우리 옛사람들의 마음이다. 

 

<호귀응렵> 김홍도作

 

평민들의 일상은 노동이라면 양반들의 일상은 독서이다. 매일 책을 읽다가도 가끔은 바람을 쐬야 한다. 옛날 선비들의 최고의 바람은 매사냥 여행이었다. 이 그림 속에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말을 탄 의젓한 선비들이 있고 일행들이 주변에 말을 타고 있다. 여러 일행들이 같이 매사냥 장면을 구경하고 있다. 많은 일행들을 동행한 것으로 보아 관직이 높은 사람, 마을 사또일 것이라 추정된다.

 

맨 왼쪽에는 햇빛 가리개를 들고 있고 그림 양쪽에는 배낭을 메고 있는 두 명의 아전이 있다. 배낭 속에는 이미 잡은 장끼, 까투리가 가득하다.  모든 일행들은 들판에서 펼쳐지는 매사냥 장면에 몰입돼 있다. 왼쪽에 매가 열심히 장끼를 쪼고 있다. 장끼는 거의 빈사상태에 빠져있고 좌우에는 사냥개 두 마리가 자신들의 역할을 기다리고 있다. 맨 뒤에는 주모가 머리에 술상을 이고 있다. 이곳에서 장끼, 카투리를 털을 뽑고 요리를 해 먹을 것이라는 사실은 명약관화, 불 보듯 뻔하다. 바람맞으며 매사냥도 하고 그 자리에서 술과 고기도 먹고 하는 것이 옛사람들의 풍류이다. 

 

말 탄 저 선비는 김홍도일 수도 있다. 김홍도가 연풍현 사또로 48살에 나가게 된다. 조선 시대 지방 사또의 임기가 5년이다. 김홍도는 5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3년 만에 탄핵당한다. 

매사냥을 한다고 탄핵당했다. 정조가 27년 동안 열심히 도화서에서 그림만 그렸던 김홍도에게 휴가를 준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하다. 김홍도가 연풍현감으로 가서 아름다운 산수도 그리고 매사냥 여행도 하라고 보냈는데 이걸 탄핵했으니 고발한 암행어사는 정조의 깊은 뜻을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연풍현감 시절 자신의 모습을 멋진 풍속화로 남겨 놓았다. 김홍도 생애 60년의 최고의 호시절을 담은 <호귀응렵>이다. 

 

 

<마상청앵> 말 위에서 꾀꼬리 소리를 듣다. 김홍도作

 

오늘날 모든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풍속화 그림이다. 나뭇가지 위에 주황색 새 한 마리가 꾀꼬리이다. 두 번째 꾀꼬리는 오른쪽 아래 둥치에 대가리만 내밀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꾀꼬리가 울면 여름이 찾아온다고 말했다. 늦봄에 그린 것이다.  버드나무 가지에 잎들이 아직 무성하지 않아 봄이라고 짐작된다. 따뜻한 늦봄 날 아침 비안개 자욱한 강둑을 걷던 선비, 이때 어디선가 울리는 청아한 꾀꼬리 소리, 바로 걸음을 멈추고 고삐를 잡아당긴 순간을 그렸다. 

시구는 화가 이문욱이 읆었다고 쓰여 있다. 문욱은 김홍도의 절친이었던 이인문의 호號이다. '증'은 '증명하다'라는 뜻이다. 시를 읊어 친구의 그림을 칭찬한 것이다. 

 

"아리따운 사람이 꽃 밑에서 

천 가지 소리로 생황을 부는 듯하고 

시인의 술동이 앞에

황금귤 한쌍이 놓인 듯하다

어지러운 금북이 버드나무 언덕 누비니 

아지랑이와  비 섞어 봄강을 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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