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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수원화성을 건설한 정조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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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을 건설한 정조

조선 제22대 왕, 정조(1752~1800)의 재위 기간은  1776~1800년이다. 정조는 11살의 나이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 과정에서 노론이 권력을 잡고 있었고 노론세력의 주류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상당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노론은 정조의 지위에 대해서 상담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보복을 당할까봐 불안해했다. 그래서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영화 <역린>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하여 정조의 암살 사건을 주제로 다뤘다.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갑옷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고 자신을 무장하기 위해서 상당한 준비를 했다. 하지만 정조는 즉위한 후 복수의 정치가 아니라 개혁 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문화 중흥을 이룬다. 

 

 

왕권 강화를 위한 중심기관으로 창덕궁에 규장각을 설치한다. 정조가 왕이 되기 전 세손 시절에 머물렀던 곳은 경희궁이었다. 창덕궁으로 옮긴 이유는 경희궁은 암살 위협에서 보호받기 힘든 구조였다. 경호, 안전이 필요했기 때문에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긴 후에 창덕궁의 가장 중심 공간에 역대의 도서를 수집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 기관으로 규장각을 설치했다. 규장각 설치의 중요한 목적은 개혁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친위부대 장용영을 설치한다. 수원에는 외장용영을 설치한다. 

 

 

김홍도는 궁정화원이면서 정조의 참모로서 정조의 일거수일투족을 화폭에 담았다. 

규장각을 통해 정약용이 발탁되었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 서얼 출신 인재를 발탁했다. 조선시대에 서얼은 양반의 그늘 같은 존재였고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되었다.

그러다 보니 능력있는 인재들이 활약하지 못했는데 정조는 파격적으로 서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을 규장각에 관직을 주고 책들을 연구하게 하여 나온 성과들을 개혁 정치의 중요한 근거로 삼아 나간다. 

 

강화도에 1782년 외규장각을 설치한다. 규장각에 왕실의 중요한 도서들과 여러 가지 어필, 어제들을 보관을 했다. 

어필御筆은 왕이 직접 쓴 글씨

어제御製는 왕이 직접 창작한 작품들

 

궁궐은 유사시에 불에 탈 수도 있었다. 실제 이괄의 난 때 궁궐이 불타는 일이 있었다. 규장각에 문서를 보관했다가 한꺼번에 사라질 위기도 있다는 판단에서 강화도에 규장각의 분소(외규장각)를 설치해서 왕실의 주요 전적들을 상당수 보관한다. 

1866년 고종 3년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프랑스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질러서 외규장각과 그 안에 보관되었던 약 6000여 책 대부분이 불타버렸다. 프랑스군의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왕이 친히 열람했던 의궤였다.

 

 

의궤는 조선시대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담은 책이다. 실록은 왕도 볼 수 없지만 의궤는 행사가 끝나면 보고서 형태로 왕에게 직접 올리는데 어람용 위궤라고 한다. 표지도 초록 비단이고 장정도 잘했고 그림이 엄청난 화원들의 공으로 그려진 것을 보고 프랑스군이 의궤를 비롯한 340여 점을 약탈을 해갔다. 

이것은 우리 정부의 끊임없는 반환 노력으로 2011년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의궤 297 책 반환되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조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단행한다. 신해통공의 핵심은 시전 상인이 난전을 금지시킬 수 있었던 권리인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시전 상인들이 권리를 독점을 했다. 경제 규모가 커지자 서울에서 물건을 자유롭게 팔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런 상황을 간파했던 정조는 개혁 성향을 가진 남인 정승 채제공으로 하여금 특별 조치를 취하게 한 것이 '신해통공'이다. 1791년 신해년이고 '통공'은 공익적으로 함께 한다는 의미를 담는다. 육의전 6개의 물품, 비단, 무명, 모시, 삼베, 종이, 어물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조치가 신해통공이고 영세상인들이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면서 조선의 시장 규모가 확대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 추숭 사업을 추진했다. 사도세자는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 영조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정조는 즉위하자 장헌을 존호로 올려  사도세자 가 아니라 장헌세자가 되었다.  아버지를 특별하게 제사를 못 지내는 것이 안타깝게 여겨 지금의 서울대 병원 자리에 사도세자를 위한 사당 경모궁景慕宮을 조성했다. 

 

 

왕의 어머니를 자전이라 부른다. 어머니께서 경사스러운 전각, 자경전慈慶殿을 조성해서 생존해 계신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남편인 사도세자를 마주 볼 수 있게 한다.  

 

사도세자 추숭 사업의 핵심은 수원 화성 건설이었다. 사도세자의 임오화변, 사망할 때는 죄인이어서 무덤이 방치가 되어 청량리 쪽에서 서울시립대학교 근처에 사도세자의 무덤이 제대로 조성이 되어 있지 않았다.

박명원은 이 문제를 처음 거론했다. 1789년 박명원의 제안에 따라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길 것을 결정한다.

 

 

지금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곳은 경기도 오산시의 융릉이라고 한다. 융릉이 있는 자리에는 원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화산花山 마을이었고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서 주민들을 이동시켜야 했다. 화산마을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신도시 화성을 건설했다. 예전에는 화성이었지만 지금 지역으로는 수원시에 포함되는 곳이다. 화성을 건설하면서 새로운 도시를 군사도시, 자급자족 도시, 농업 중심 도시, 개혁 정치의 성과를 집약하는 신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지금의 화산 쪽으로 옮기고 무덤 이름을 현륭원顯隆圓이라고 한다. 현륭원을 조성한 후에 1899년 융릉隆陵으로 격상한다.  근처에 용주사를 조성했고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왕실 원찰이었다. 

나중에 정조대왕도 근처에 무덤이 조성되었다.  용주사는 지금은 융릉과 건릉의 원찰이 되었다. 

 

 

 

1794년 1월부터 1796년 8월까지 화성華城이 건설되었다. 정조는 화성을 만든 후에 '화성성역의궤'를 작성하게 했다. 수원 화성은 뛰어난 건축술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려면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가 '원형 유지'다. 화성은 한국전쟁으로 손실된 부분, 또는 시대마다 파괴된 부분을 복원했다. 원형이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 보고서가 있어서였다.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선정된 이유가 되었고 화성 전도를 비롯한 세부 그림들(동북공심돈외도, 서남암문외도, ,봉돈외도, 동북공심돈이도 등이 나온다. 

 

세부 내역에 보면 벽돌 치수, 재료의 크기, 높이 등이 다 기록되어 있어 화성 공사는 1794년에 시작이 돼서 공사 기간 2년 만에 완성이 된다. 원래는 5년을 예상했는데 2년 만에 빨리 완성한다. 

이전까지는 돌로 성을 쌓았는데 화성건설에서는 규격화된 벽돌로 쌓았다. 다산 정약용이 개발한 거중기를 사용해서 무거운 돌을 운반하는데 쓰였다. 일한 백성들에게 정당하게 임금을 주어서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화성 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연 70여만 명이었고 공사비는 80만 냥이었다. 목표했던 것보다 빨리 완성이 되었다. 

정조는 화성 건설 후에 행차를 자주 나섰다. 가장 대규모 행차가 1795년이었는데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이하는 해였고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동갑이어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생존했다면 회갑을 해야 되는 해이기도 했다. 가장 대규모로 6,000여 명이 행차에 참여했다. 

 

 

 

행차의 전 과정을 '원행을묘 정리의궤' 기록으로 남겼다.

정조가 화성 행차를 통해서 백성들의 여론을 들으려 했는데 기록에 남아있다. 화성을 오가는 길에 백성들이 억울한 상황이 있으면 꾕과리를 치게 했다. 격쟁擊錚이라 한다. 글로 올리면 상언上言이라 한다. 이것을 접수해서 민원 사항을 해결해 준 내용들이 정조의 일기에서 시작한 기록 < 일성록> 기록에 보면 한 1,300여 건 등장을 한다.

 

 

정조의 화성행차의 장면은 김홍도가 주관이 되어서 제자들과 함께 그린 '서장대야조도', '낙남헌양로도' ,정조가 직접 활을 쏘는 장면을 그린  '득중정어사도', 한강에서 배다리를 놓고 건넜던 '한강주교환어도', 봉수당에서 회갑잔치를 벌였던 '봉수당진찬도' 등 8폭의 그림이 남아있다. 

 

정조 시대는 영조 시대를 이어서 문예 중흥이 또 한 번 일어났다.

1785년 법령집을 통합 편찬한 법전 <대전통편>, 1788년 외교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1785년 병법서 <병학통>, 1790년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다. 청나라 학술 사조가 총정리된 <고금도서집성> 5,022 책을 수입했다. 

정조는 특별하게 자신의 문집을 만들었다. '홍재전서 100책'을 남겼다. 

정조는 7년 전부터 머리에 생긴 종기 때문에 고생을 했고 투병 생활 내용이 정조실록 정조 17년 기록부터 보인다. 투병생활을 하다가 1800년 마흔아홉에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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