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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청나라에게 굴욕을 당한 인조와 굴욕을 씻으려 했던 아들 효종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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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에게 굴욕을 당한 인조와 굴욕을 씻으려 했던 아들 효종

조선 제16대 왕, 인조(1595~1649)의 재위기간은 1623~1649년이었다. 인조가 왕으로 즉위한 시점에 국제정세에 큰 변화가 있었다. 북방의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한다.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조선의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소위 중립 외교 정책을 수립하면서 후금이 직접 조선을 공격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 즉위 후 친명배금親明排金, '명나라를 중시하고 후금을 멀리한다'는 정책을 수립하면서 결국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맞이했다. 

 

홍타이지

 

후금의 칸, 홍타이지(1592~1643)는 청나라 제2대 황제였다. 홍타이지 직전의 왕이 태조 누르하지였다. 

※누르하치(1559~1626)는 중국 청나라의 실질적 창건자이자 초대 황제이다.

 

누르하치

 

누르하치 장례식에 조선에서 사절단을 보내지 않은 점도 청 태종 홍타이지를 자극을 했고 마침내 1627년 1월 후금군 3만여 명이 조선을 침공한다. 1627년은 정묘년이어서 정묘호란丁卯胡亂이라 부른다. 

당시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왕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강화도는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기마병이 주력이었던 후금군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후금의 궁극적 목적은 중원의 명나라를 정복하는 것이어서 인조는 강화도 연미정에서 후금과 형제국을 골자로 하는 화약을 맺고 일단 전쟁을 종결한다. 

 

1636년 인조 14년, 세력을 확장한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수도는 심양으로 정하고 태종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면서 중국의 명나라 대륙의 일부까지도 차지하는 등 강력한 힘을 과시한다. 

청나라는 조선에 군신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한다. 조선은 정묘호란 때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못마땅했다.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 조정은 격분한다. 청에 대한 강경론이 우세해지면서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1636년 12월 청 태종 홍타이지가 청나라, 몽골인, 한족이 포함된 12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쳐들어온다. 

압록강을 넘은 지 5일 만에 한양을 점령한다. 정묘호란 1627년 1월, 병자호란 1636년 12월 겨울에 처들어 왔다. 청나라가 겨울에 쳐들어온 이유는 압록강이 얼어 있어야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방어 정책은 잘못되었다. 산성 중심의 방어 정책을 수립을 하고 의주산성, 백마산성, 황주산성 등을 거점으로 하고 전투준비를 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의 중심은 기병이었다. 산성에 조선 군대가 진을 치고 있어도 청나라 기병은 바로 한양으로 진격한다. 청나라 군대는 식량을 휴대했기 때문에 산성을 공격해서 식량을 뺏을 필요가 없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인조를 비롯한 왕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했는데 청군 선발대가  너무 빨리 한양을 점령하는 바람에 길이 차단되어 버렸다. 그 와중에 최명길은 청나라 침공군과  맞서서 협상을 하면서 시간을 끌어주는 바람에 인조는 지금의 광희문을 통해서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피난 직후에 청군의 12만 대군에 의해서 남한산성이 포위된 날이 1636년 12월 15일이었고 성안에는 대략 1만 여명 정도가 50일가량 버틸 수 있는 식량 정도밖에 없었다. 병자호란의 양상은 청나라군이 곳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남한산성에 인조가 머무르고 있던 행궁을 향해 수시로 포격을 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산성 내에서도 주화파와 척화파의 갈등이 계속된다. 주화파의 중심 이조판서 최명길은 청과 화의를 주장했고 척화파의 중심 예조판서 김상헌은 끝까지 항전을 주장했다. 영화 <남한산성>은 이런 상황을 보여주었다.

 

먹을 것이 떨어져 인조도 고생을 한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어느 날 아침에 닭다리가 올라왔다. 인조는 어제 울었던 닭이냐고 물었고 인조에게 올릴 음식이 부실하여 닭을 잡았다고 하자 인조는 백성들과 군사들이 굶고 있다며 먹지 않겠다고 했다.

※연려실기술은 조선후기 실학자 이금익이 저술한 조선 시대 역사서이다. 

 

한 겨울의 추위까지 겹치면서 상황이 열악해지자 남한산성 47일간 버틴 끝에 결국 항복한다.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인조가 항복을 청하는 문서를 작성을 하게 하고 협상을 성공시킨다. 

직접 처들어 온 청 태종이 석촌호수 부근에 수항단受降檀, 항복을 받아들이는 재단을 만들어 놓았고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아침에 남한산성을 내려와서 수항단受降檀에 마련된 삼전 나루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의식, 삼배구고두三排九叩頭를 치른다.

인조는 왕의 복장을 하지 못했고 군사복 융복을 입었다. 청나라 황제가 아주 오만한 상황에서 항복 의식을 했고 항복의 조건으로 여러 가지 굴욕적인 내용이 담긴 화약이 맺어졌다. 

 

'정축화약 丁丑和約'

1. 명나라의 고명과 책인을 청나라에 바칠 것

2. 명나라와 국교 단절하고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을 것

3. 명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청나라 연호를 사용할 것

4. 세자와 왕자, 대신의 자제를 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5.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병을 파병할 것

6. 청나라가 가도를 공격할 때 원병을 파병할 것

7.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할 것

8. 조선인 포로가 도망쳐오면 즉시 돌려 보낼 것

9. 두 나라 신하들의 통혼을 장려해 우의를 돈독히 할 것

10. 성을 새로 쌓거나 개축하지 말것

11. 매년 세폐를 보낼 것 (세폐는 사신이 가져가는 공물)

 

 

 

조선에 불리한 협상이었고  청나라 황제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우게 한다. 속칭 '삼전도비'이다. 원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였다.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다. 부끄러운 역사였기에 고종 때 땅에 묻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다시 세웠다. 현재는 아픈 역사이기는 하지만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현재는 삼전도비는 석촌호수 서호 언덕에 있다. 

 

전쟁으로 인해서 남성은 끌려가서 노예로 팔려갔고 여성은 청나라로 포로로 끌려갔다. 겨우 살아서 돌아와서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렸다. 환향녀는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의 뜻이었지만 병자호란 때 끌려갔던 조선 여성들에 대해서는 사회가 보호해주지 않았다. 환향녀, 화냥년으로 부르면서 불명예스럽고 치욕스럽게 대했다. 

 

 

병자호란 이후  작자. 연대 미상의 조선 고전 소설 <박씨전>이 민간에 널리 유행했다. 당시 청나라 오랑캐에게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통쾌하게 복수하는 주인공 여성이 등장했다. 대리만족을 불러일으켰던 <박씨전>이었다. 

 

삼전도의 굴욕으로 두 명의 왕자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서 8년 만에 귀국한다. 조선이 명나라와 연합을 해서 청나라를 공격할 수 없도록 왕자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명나라가 멸망을 하게 되었고 세자와 왕자의 귀국을 명하게 되어 청나라에서 8년간 인질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붉은 피가 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이 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 인조 23년 6월 27일 

 

실록의 기록에서조차 소현세자의 죽음은 독살의 의혹이 상당히 짙게 배어있다. 여러 자료에 의하면 인조 측에서 독살을 했다고 추측한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하면서 청나라는 오랑캐가 아니라 잘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제 청나라와 대결의 시대가 아니라 우호와 협력의 시대를 이어야 된다며 생각했고 자신이 왕이 되면 그렇게 하겠다고 아버지 인조에게 말을 했다. 귀국 후 인조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자 인조는 분노했다. 인조는 여전히 청은 복수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음 왕이 될 소현세자가 아버지가 당했던 굴욕을 복수하기는커녕 협력하겠다고 하자 아들과 갈등 관계에 빠지고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소현세자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인조는 소현세자가 낳은 손자들도 싫어했다. 그래서 두 번째 아들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줬고 결과적으로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강조한 인조의 의지가 반영이 되었다. 

 

조선 제17대 왕, 효종(1619~1659)의 재위 기간은 1649~1659년이었다. 

효종은 자신을 밀어준 인조를 위해서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한다며 복수설치復讐雪恥, 복수를 해서 치욕을 씻는다' 정책을 펼친다. 효종은 청나라를 반드시 정벌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북벌정책이 국시로 채택이 된다. 효종은 북벌정책을 위해서 당시 친청 세력들을 대거 제거하고 반청 척화파들을 대거 등용했고 그 중심에 우암 송시열이 있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이다. 송시열은 봉림대군이 왕자로 있을 때 스승이었고 송시열에게 북벌의 이념을 전파시켜 줄 전도사로서 사명을 맡겼는데 송시열은 이념적으로 협조를 했지만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다고 보고 북벌을 구체적으로 추진한다기보다는 먼저 안을 정비해야 된다고 한다. 내수內修라고 하는데 안을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현실적으로 효종의 북벌정책을 지원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효종의 북벌 정책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인물은 이완 장군이었다. 효종은 북벌정책으로 중앙 상비군인 훈련도감을 강화하고 북벌 추진의 중심 기구 어영청御營廳을 설치했고 이완 장군이 어영대장으로 임명되어 효종의 명을 받들어 북벌을 준비했던 인물이었다. 

 

남한산성 수비대인 수어청의 군비를 증강하고 군량미를 확보한다. 우암 송시열을 따로 불러서 만 명의 병력을 키워서 10년 만에 청나라 땅을 차지하자라고 말한다. 북벌정책은 실록에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는다. 비밀사안이었기 때문에 실록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송시열이 쓴  개인 기록 <악대설화>에 나와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을 겪은 백성들 입장에서는 전쟁 준비를 한다는 것은 부담이었고 국가 재정도 부족했다. 청나라 군사 감시단이 수시로 조선에 감시하러 왔다. 병자호란 이후에 '정축화약' 조건 중에 하나가 성을 함부로 쌓는 것을 금지시켜서 청나라 눈치를 보며 군사훈련을 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효종은 왕위에 오른 지 10년 만에 종기가 터져서 승하한다. 효종의 승하로 인해 북벌정책도 현실에서 사라진다. 북벌을 해야 된다는 이념은 전파가 되었고 조선시대 대부분의 학자들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는데도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사용한다. 이런 이념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정신은 조선시대 사대부로 이어졌다.

효종은 북벌정책으로 치욕을 씻어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이후 조선은 북벌의 시대에서 청나라에게 배워야 한다는 북학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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