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과 두 아들 인종, 명종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난 후 조선의 제11대 왕 중종(1488~1544)이 즉위한다. 중종의 재위기간은 1506~1544년이다. 중종은 연산군을 낳은 생모였던 폐비 윤씨가 쫓겨난 후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정현왕후의 아들이고 왕자 시절에는 진성대군이라고 불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반정공신들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했다. 중종은 왕이 되었을 때 이미 혼인을 한 상태였다.
왕비는 단경왕후 신씨였다.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가 되자마자 7일 만에 쫓겨나고 만다. 단경왕후 신씨의 아버지가 신수근이며 연산군의 처남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과거 연산군 대의 적폐 세력의 딸을 왕비로 모실 수 없다고 하여 7일 만에 폐위되었다. 중종과 단경왕후의 금실은 좋았지만 쫓겨나야 했다. 단경왕후는 인왕산에 자신의 치마를 걸어놓았다. 경복궁 경회루에서 보면 인왕산 치마바위가 보인다.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중종은 왕이 되었지만 반정 공신 3인방 성희안, 유순종, 박원종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중종 재위 10년을 즈음한 시점에서는 삼공신이 사망한다. 이 과정에서 중종을 사로잡은 역사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조광조(1482~1519)는 조선 중종 시대 사림파 학자이자 문신 시대를 앞서간 개혁가이다.
조광조를 사림파 학자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앞 시기 연산군 때에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김굉필, 영남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가 평안도 희천에 유배를 와 있었다. 조광조의 아버지 조원강이 근처 어천 지역의 찰방이었다.
찰방察訪은 교통 요충지에 설치된 역참을 관리하던 관리이다.
아버지 조원강은 아들 조광조를 김굉필에게 보내 공부를 하게 했고 영남 사림파의 핵심 인물 김굉필을 만나 사림파 학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조광조는 중종 때 본격적으로 관직 활동을 하게 된다. 28세 때 과거 초시에 장원급제를 했고 중종과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1515년 왕을 직접 만나서 치는 시험, '알성시 謁聖試'에서 2등으로 급제를 한다.
알성시謁聖試는 왕이 친히 참가한 시험으로 성균관 문묘를 참배한 뒤 유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실시하던 비정규적인 과거 시험이다.
조광조가 쓴 답안지는 중종의 마음을 움직였다. 조광조를 파격적으로 등용하게 되었고 연산군 때 폐지했던 경연을 부활시키고 여러 가지 축소되었던 언론 기능을 회복시킨다. 조광조와 사림파의 개혁 정치는 왕도 정치王道政治(인과 덕에 의한 정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림파의 입지가 강화되어야 했다. 당시 성리학 이념의 핵심을 담아 교재처럼 활용되었던 책, <소학>을 늘리고 향촌 사회의 자치규약 향약을 보급하여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유교질서 속에 포진되도록 하는 정책을 취해 나간다. 도교의 제천행사를 주관하던 기관인 소격서 기관을 폐지해서 성리학이념이 더 강화되도록 만들었다.
경제 개혁으로는 토지 소유 상한선을 정하고 지방의 특산물에 대해 바치는 세금인 공물 폐단을 시정을 한다.
이런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서 개혁 정책을 함께 할 세력이 필요했다. 기존의 과거 제도 체제에서는 훈구파 세력들이 계속 진출하였다. 조광조와 사림파의 개혁 정치로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한다.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뽑는다는 취지이며 조광조 세력들이 대거 관직에 진출한다. 우군을 확보한 조광조 세력은 기존의 기득권의 세력을 억제한다. 그러면서 '거짓으로 훈작을 받은 것을 없앴다'는 위훈 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한다. 당시에 중종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를 때 정국공신의 숫자가 120명이 넘었다.
정국공신靖局功臣은 1506년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칭호이다.
조선시대에 공신들의 숫자가 가장 많았을 때가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이었다. 실제 반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친구, 친척 이름을 넣어서 숫자가 많아졌다. 그런 사람들을 조광조가 색출해 보니 2/3이 되었고 가짜로 훈작을 받은 사람들을 다 삭제하겠다고 하자 중종은 처음에는 동의를 한다.
조광조 세력이 훈구파 세력을 압박하자 훈구파도 반격에 나선다. 훈구파 세력이 조광조와 개혁세력에 반격을 시작한다. 조광조는 승진을 거듭해서 대사헌 직책까지 올랐다. 훈구파는 중종에게 조광조는 왕권까지 노리는 인물이라고 계속해서 조언한다.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을 새겼다.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궁궐에 나뭇잎에다가 꿀을 발라 놓으면 벌레들이 갉아 먹으면서 글자가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뭇잎을 주어다가 조씨가 왕이 되려나 보다 하고 소문이 퍼저나 간다. 1519년 11월 중종은 전격적으로 조광조를 체포한다. 붕당을 만들어 역모를 꾀했다는 명목이었다. 전라도 능주(지금의 화순)로 유배를 간다.
조광조는 북쪽을 향해 계속해서 절을 올리며 다시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날 의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지고 왔다. 사약을 마시고 유배지에서 38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역사 속에서 가장 개혁적인 인물의 죽음이었다.
훗날 조광조의 묘가 있는 지역에 조광조를 배양하는 서원, 심곡서원深谷書院이 조성되었다.
경기도 용인 심곡서원深谷書院은 1650년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마지막 사약을 받기 직전에 남긴 시가 있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했도다
밝고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
-조광조의 절명시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년)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와 신진 사림들이 숙청된 사건이다. 조광조가 결국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지만 조광조의 학문을 계승하는 사림파들이 결국 역사의 승리자가 된다.
조광조가 뿌린 개혁의 씨앗들은 후대 사림들에 의해 널리 계승이 되면서 조광조는 조선의 성리학, 개혁 정치의 대표 인물이 된다. 율곡 이이는 조광조의 이런 행적을 높이 평가했고 후대 사림들은 뜻을 계승해야 한다고 한다.
"학자들이 조광조로 말미암아 성리학을 숭상하며 왕도王道는 귀하고 패도覇道는 천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이 도에 끼친 공로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율곡 이이
중종 때는 북방의 여진족, 남쪽의 왜구들이 많이 침략을 해 왔을 때 국방에 대한 대책이 본격적으로 수립이 되었던 시기였다. 조선 전기 국정의 최고 기관이 의정부였다. 조선 중기 이후의 최고 국정 기관 비변사備邊司가 중종 1517년 설치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문화적으로 성종 시대에 완성된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을 새롭게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1539년 55권으로 편찬했다. 의복, 음식, 혼인 등의 사치 방지 노력도 전개했다.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은 단경왕후 신씨였다.단경왕후가 쫓겨나고 계비로 맞이했던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을 출산하고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를 맞이했다.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에서는 조선전기까지는 후궁 출신 중에 승진을 시켰다. 문정왕후 때부터는 외부 간택에 의해서 왕비가 되었다.
경빈 박씨는 중종의 후궁이었다. 상당한 권력욕을 가지고 있었다. 경빈 박씨가 원래대로 하면 장경왕후 윤씨가 사망했으니 경빈 박씨가 후궁 출신으로 유력한 후보였지만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다.
경빈 박씨는 연산군 때 흥청 출신이었다. 국모를 흥청 출신으로 할 수 없다고 하여 외부에서 간택하여 중종의 계비로 간택된 인물이 문정왕후였다.
흥청興淸은 연산군 10년(1504)에 왕명으로 모집한 기생 중 선발하여 대궐에 머물게 한 여인들이다.
문정왕후가 낳은 아들이 나중에 명종이 된다.
인종이 먼저 왕이 된다.
조선 제12대 왕 인종(1515~1545)의 재위기간은 1544~1545년이다.
인종은 조선 왕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짧다.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한다. 인종은 중종 시대에 조광조와 사림파들이 추진했던 개혁으로 정국을 운영하겠다는 판단에서 사림파 학자들을 대거 등용해 새로운 시대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8개월 만에 승하했고 인종의 외삼촌 윤임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조선 제13대 왕 명종(1534~1567)의 재위 기간은 1545~1567년이다.
명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랐고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는 대비가 되어서 수렴청정으로 아들 명종을 대신해서
강력하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은 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이를 도와 정사를 돌보는 것을 말한다.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은 파평 윤씨, 인종의 외삼촌 윤임도 파평 윤씨가 대립한다.
윤임은 '대윤'이라 하고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을 '소윤'이라 불렀다. 양대 세력의 대결을 대윤과 소윤의 대립이라고 부른다.
명종이 1545년에 즉위하자마자 인종 때 개혁정치하려고 등용했던 사림파들이 명종 때 대거 정계에서 밀려난다. 이것을 조선의 네 번째 사화이면서 마지막인 을사사화乙巳士禍하고 한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 소윤과 대윤이 충돌한 끝에 명종 즉위와 함께 대윤 일파가 대거 숙청된 사화이다.
원래 중종의 무덤은 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의 무덤 근처에 조성을 했다. 장경왕후 윤씨의 무덤이 희릉이었고 서삼릉 쪽에 있었다. 처음에는 장경왕후와 중종이 같이 묻혀 있었다. 문정왕후가 서로 떼어 놓았다. 나중에 자신이 남편인 중종의 곁에 묻히기 위해서였다. 중종의 무덤은 아버지 곁에 가야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지금의 성종의 무덤 곁에 중종의 무덤을 옮기고 정릉이라 한다. 그래서 지금 선릉 정릉 합해서 선정릉이 되었다. 그런데 명종 때 문정왕후 무덤을 정릉에 조성하려고 했지만 신하들이 강력히 반대한다. 왜냐하면 한강 물길이 예전에는 그리로 흘렀다. 무덤으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해서 결국 명종은 뜻을 접어야 했고 어머니 무덤은 지금의 노원구 화랑로에 태릉 쪽으로 옮겨 놓았다. 문정왕후의 무덤이 태릉泰陵이다.
명종은 조선의 왕 중에 유일하게 어머니 곁에 묻힌 왕이다.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무덤 옆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했고 강릉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합해서 태강릉이라 부른다. 1966년 이곳에 태릉선수촌이 조성이 되면서 두 모자가 서로 바라보기도 힘들었다. 태릉선수촌이 2016년에 진천으로 이전되면서 모자가 가깝게 만나볼 수 있는 모습이 되었다.
조선의 반정으로 즉위했던 중종은 두 명의 아들, 인종. 명종을 왕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종. 명종의 존재감은 크게 없다. 오히려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가 훨씬 강력한 존재감이 있었다. 이 시대에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사림파들이 또 한 번 화를 입었지만 선조 때 와서 사림 정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다음 선조. 광해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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