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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단명한 예종과 부인에게 사약을 내린 성종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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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한 예종과 부인에게 사약을 내린 성종

조선 제8대 왕, 예종(1450~1469)의 재위기간은 1468~1469년이었다. 예종의 재위기간은 1년 2개월간 짧았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다. 예종은 세조가 승하한 후에 세조의 두 번째 아들로서 왕이 된다.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1457년에 스무 살의 나이로 요절을 하게 되면서 둘째 해양대군이 세자로 책봉이 되었고 예종의 왕비는 장순왕후 한씨이며 한명회의 딸이다. 

 

한명회(1415~1487)는 조선전기 계유정난의 설계자이며 세조~성종 시대 최고의 권력을 누렸던 정치가이다.

한명회 딸 중에 나중에 성종의 왕비가 되는 공혜왕후 한씨까지 배출했으니 두 명의 딸들을 왕실에 시집보낸 한명회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알 수 있다. 

 

 

 

예종은 1469년 세종대왕의 무덤을 옮긴다. 세종의 무덤은 태종의 무덤인 헌릉 옆에 있었는데 문종, 단종 거기에 의경세자까지 일찍 사망하자 무덤을 잘 못 써서 그렇다는 말이 계속 나오자 무덤 터를 조사한 바 무덤 터가 부적절하다고 판명이 되어서 예종 때 지금의 경기도 여주에 영릉으로 옮겼다. 

 

예종 때의 남이의 역모사건은 권력 구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남이 장군(1441~1468)은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예종 때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다. 

세조 때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시애의 난(1467년 세조 13년)은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서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이다. 

 

 

이때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이 장군이 종친 세력 구성군과 더불어 새로운 공신 세력의 중심인물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들이 신공신 세력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커졌고 이 과정에서 유자광이 결정적인 고변을 한다. 

밤하늘의 혜성을 보고 남이 장군이 말하기를 "혜성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로운 것을 배치하는 형상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반역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 남이 장군이 있다"라고 유자광의 고변을 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남이 장군과 구성군과 같은 신공신 세력이 제거되고 다시 훈구파 세력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세조 사후에 뭔가 새로운 세력으로 권력 구조가 재편되려는 분위기가 다시 꺾여 버리고 기존의 한명회, 신숙주와 같은 훈구파 세력들이 더욱더 권력을 공고히 하게 된다. 

춘천의 남이섬은 남이 장군과 관련이 있다. 

 

용산구에는 남이 장군 사당이 있어 용산구에서는 남이 장군 관련 축제 행사도 거행한다. 

 

예종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승하한다. 예종은 제안대군 아들이 있었지만 나이가 4세였다. 세조의 맏아들은 사망했지만 소혜왕후 한씨(훗날 인수대비) 사이의 아들, 월산군과 잘산군 중에 잘산군이 왕위에 오른다.

맏아들 월산군이 왕이 되지 못하고 둘째 아들 잘산군이 왕위에 오른 결정적인 이유는 잘산군의 왕비, 공혜왕후 한씨가 한명회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제9대 왕, 성종(1457~1494)의 재위기간은 1469~1494년이었다. 

성종은 상당히 모범적인 왕으로서 면모를 보였다.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고 현안 문제를 협의하는 자리를 경연이라고 한다. 

경연經筵은 조선시대에 왕에게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교육제도, 또는 그 자리를 뜻한다.

조선 왕 중에서 경연을 제일 많이 했다. 경연은 아침에 하는 조강朝講, 점심에 하는 주강晝講, 저녁에 하는 석강夕講, 밤에 하는 야대夜對로 이루어졌다. 성종은 밤에 하는 야대夜對 를 많이 하셨다. 술자리를 좋아했고 현안들을 신하들과 술을 하면서 논의하기도 했다. 

 

한명회는 최고의 권력가였고 세조에서부터 성종 때까지 공신 책봉에서 계속 일등공신에 임명되는 권세가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성종 때 조선의 세 번째 궁궐이 세워진다. 조선의 첫 번째 궁궐 경복궁은 태조 때, 두 번째 궁궐 창덕궁은 태종 때, 세 번째 궁궐 창경궁은 성종 때 조성되었다.

 

 

성종이 왕으로 즉위했을 때 왕실의 전왕들은 다 돌아가셨다. 그런데 대비들은 다 살아있었다.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성종의 친어머니 소혜왕후 한씨가 계셨다. 

왕실에 대비들이 많이 계셔서 명목상으로는 대비들을 위한 궁궐 창경궁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경복궁, 창덕궁은 왕이 거처하는 집무실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유교 국가의 기준점 중의 하나가 왕은 남쪽을 바라보아야 한다. 창경궁에는 정전인 명정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창경궁은 왕을 위한 궁궐이 아니라 왕실의 어머니, 할머니를 모신 궁궐이기 때문에 규모도 작고 동향으로 조성이 되었다. 

 

인수대비(성종의 어머니)는 며느리 폐비 윤씨와 갈등을 겪었다. 결국 인수대비가 며느리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성종의 부인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딸이었는데 일찍 사망했다.

조선전기에는 왕비가 사망하면 후임 왕비를 맞이할 때 간택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외부에서 간택을 하려면 절차가 복잡하니 왕의 후궁 중에서 승진하게 된다. 폐비 윤씨는 성종의 후궁이었다. 

 

 

 

처음 기록에 보면 폐비 윤씨는 아주 싹싹하고 품성도 좋았다고 되어 있다. 공혜왕후 한씨가 사망하고 폐비 윤씨가 왕비가 된다. 결정적인 요인 중의 하나가 연산군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비가 되자 폐비 윤씨는 돌변한다. 성종은 후궁을 많이 두었다. 성종의 후궁들을 견제하면서 총애를 받는 후궁들을 죽여버리겠다며 비상을 소지하고 다녔다. 이런 일로 부부 싸움을 하면서 폐비 윤씨는 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왕비의 폐출을 신하들이 건의했고 1479년 공식적으로 왕비에서 폐위된다. 

성종이 폐비 윤씨가 반성하고 있는지 사람을 보냈는데 반성은 하지 않고 화장을 하고 있더라는 보고를 한다. 1482년 폐비 윤씨는 사약을 받는다.

 

폐비 윤씨의 묘가 처음 조성된 곳은 경희대 쪽 회기동이었다. 원래 폐비 윤씨의 묘를 '회묘'라고 했다. 그런데 묏자리가 지금의 고양시 쪽으로 옮겨갔지만 폐비 윤씨의 무덤 자리 '회묘'가 있는 터, 그래서 동네 이름이 회기동回基洞이다. 

폐비 윤씨가 쫓겨난 후에 후궁으로 들어왔다가 왕비가 된 성종의 두 번째 계비가 정현왕후 윤씨이다.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 중종이 된다. 성종은 연산군과 중종, 아들 두 명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성종은 16남 12녀를 두었다. 성종시대는 성리학 이념이 본격적으로 구현되어 나가는 시대였다.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남존여비, 여성은 여성답게 남편을 위해 아들을 위해 자신의 어버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강요되는 이런 시기로 강화되고 있었다. 폐비 윤씨가 남편인 왕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것이 성리학에서는 결코 용납되지 못했다. 시대적 희생양이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어우동이 처형된다

어우동은 조선 성종 시기 성추문 사건의 주인공으로 가문에서 파문되고 이름 대신 별명 '어우동'으로 기록된다. 

어우동과 바람을 피운 남성들은 거의 처벌받지 않고 여성인 어우동은 처형되고 만다.  처형될 만큼의 죄는 아니라고 했지만 성종은 강력하게 어우동을 처벌한다. 

 

"지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여 

여자들이 음란한 행동을 많이 자행하고 있다.

어우동이 음탕하고 방종하기 이를 데 없는데도 죽이지 않는다면

뒷사람을 어떻게 징계 하겠느냐?"

-<성종실록> 성종 11년 10월 

 

성종의 어머니(인수대비)는 <내훈>이라는 책까지 써서 조선 여인의 몸가짐과 생각을 훈육했다. 

내훈內訓은 1475년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부녀자 훈육을 위하여 편찬한 책으로 3권 3책으로 되어 있다. 

페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데는 성종뿐만 아니라 인수대비도 적극적으로 관여를 했다. 

 

 

성종은 학문에 힘썼고 성과를 거둔다.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 역사서 <동국통감>, 지리지<동국여지승람>을 편찬했다. 조선전기 문물과 제도를 완성시켰다. 그래서 왕의 호칭도 성종成宗이다. 조선 왕의 호칭은 사망한 후에 종묘에 신주를 모실 때 그 이름을 보통 한 글자로 한다. 어지셨던 왕 인종仁宗, 학문에 뛰어나셨던 왕 문종文宗, 효성이 지극하셨던 왕 효종孝宗이었다.

시대의 문물과 제도를 완성했다는 의미를 담아 성종成宗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었다.

 

 

성종 무렵부터 세조의 계유정난을 계기로 지방에 은거했던 소위 양심 있는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다. 이런 세력들을 사림파라고 한다. 

사림파士林波는 정통 성리학에 입각한 정치 이념과 사상을 신봉한 학자들이며 중앙정계로 진출하면서 훈구파와 대립한다. 

기존의 집권 세력 훈구파와 대항을 해서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을 보인다. 성종은 사림파도 적극적으로 등용을 했고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직이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균형과 조화를 꾀하는 정치를 펼쳤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선릉역이 성종의 무덤이다. 성종과 중종을 낳은 계비 정현왕후 윤씨가 함께 있는데 나중에 아들 중종무덤이 옆으로 오게 된다. 9호선은 선정릉역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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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연산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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