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단종, 칼과 개혁의 군주 세조
단종은 조선의 왕 중에 가장 안타까운 죽음을 당한 왕으로 기억 된다. 조선 제6대 왕, 단종(1441~1457)의 재위기간은 1452~1455년이다.
단종은 1441년 자선당資善當에서 출생을 하고 1448년 여덟 살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이 되었다.
자선당資善當은 경복궁 내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머무는 처소이다.
아버지는 세종의 적장자가 되는 문종이고 할아버지는 세종대왕이다. 아버지 문종에 연이어서 적장자로 왕위를 승계했다.
아버지 문종은 효심이 지극하여 연이은 국상에 시묘살이를 하면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슬퍼하다가 그것이 화근이 되어 건강이 악화되었고 승하했다. 단종이 즉위했을 때 나이는 12살이었다. 문종은 병에 시달리자 아들이 너무 걱정이 되어 당시 가장 신뢰했던 신하, 김종서, 황보인 등을 불러서 단종, 어린 왕을 잘 보필해 달라 부탁했다. 특히 김종서가 좌의정, 황보인이 우의정이 되면서 문종의 유언을 잘 받들어서 단종을 발 보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단종이 너무 어리니 모든 정사는 신하들이 처리하는 방향으로 간다. 이렇게 해서 나온 이야기는 '황표정사 黃標政事이다. 관리가 되거나 정승 후보들에게 보통 삼망을 한다.
삼망三望은 공정한 인사 행정을 위하여 세 사람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는 것을 뜻한다.
세 명의 명단을 적어가지고 최종적으로는 왕이 낙점을 하게 되어있는데 이미 김종서나 황보인 등이 노란색으로 표시를 해 놓는다. 그래서 황표정사黃標政事라고 표현한다. 실질적으로 김종서, 황보인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단종은 그야말로 허수아비 왕이 되어 버렸다. 그 과정에서 세종의 세 번째 아들 안평대군은 문예적인 기질이 있었다. 신하들은 안평대군과는 매우 친하게 지내고 정치적 야심이 강했던 두 번째 아들 수양대군을 견제해 나간다.
수양대군은 야심을 숨기고 지내다가 1453년 10월 10일에 거사를 일으킨다. 이것은 조선 왕조 역사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 된다. 1453년은 계유癸酉년이어서 계유癸酉, 바로잡을 정靖, 어려울 난難. '어려움을 바로 잡았다'해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한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계유정난이 있기 전부터 수양대군은 자신의 심복, 부하들을 계속 만들어간다. 대표적인 인물은 한명회, 권람, 신숙주와 무인 유수, 양정을 동원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가장 참모역할을 했던 핵심인물, 한명회는 살생부를 작성해서 수양대군 측에 협조할 사람, 반대하는 사람 명단까지 작성을 해서 준비한다. 마침내 10월 10일 거사일에 핵심적으로 제거해야 할 인물, 김종서, 수양대군이 심복 몇 명을 데리고 김종서 집을 찾아갔다. 기록에 보면 김종서 집에서 편지를 보여줬고 김종서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부하들을 동원해서 철퇴로 내려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종서는 이때 죽지 않았고 김종서의 아들 김승벽의 처가로 피신을 했다가 다음 날 여성의 복장을 하고 도성안에 들어가 동태를 살피다가 체포된 후에 처형을 당한다. 결과적으로 김종서 제거를 시작으로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의거해서 반대 세력들을 모두 제거하고 계유정난이 성공한 날 수양대군은 영의정 겸 병조판서 겸 각종 직책을 다 받으면서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된다.
영화 <관상>에서 김종서가 제거 대상 1호로 수양대군이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제거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연관되어 이들이 먼저 불괘不軌한 짓을 했으며 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 권력을 차지하려 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동생 안평대군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결국 사살을 한다.
불괘不軌는 법이나 도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반역을 꾀한다는 뜻이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모든 권력을 갖추었지만 이때까지는 왕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단종이 왕이었다.
나중에 단종 복위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성삼문마저도 삼등공신에 임명이 된다.
성삼문은 집현전 학자 출신으로 목숨을 바쳐 신하의 의리를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수양대군은 성삼문 같은 유능한 인재를 포섭해 나가고 있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2년 여 만인 1455년 단종의 왕위를 스스로 물려주는 선위禪位형식으로 수양대군이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수양대군은 단종에게서 왕의 자리를 빼앗았다.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옥새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 성삼문이었다.
성삼문은 단종 때는 관직 생활을 했고 '예방승지'라고 해서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의전수석역할이다.
당시 수양대군에게 옥새를 전해 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경회루 연못가에서 그냥 빠져 죽자'라고 결심했다가 마음을 고쳐 먹고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게 된다. 단종이 왕위를 물려주는 그날 성삼문과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 운동을 주도해 나가는 역사가 시작된다.
영월에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가 있다. 앞으로는 서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으로 막혀서 유배지로는 최적의 장소였고 단종의 유배생활 흔적이 여러 가지 남아있다.
관음송觀音松은 수령이 600년 이상 된 소나무다. 천연 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소나무는 단종이 유배 혼 후에도 단종을 직접 보고 단종이 흐느끼는 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한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고 '볼 관觀, 단종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소리 음音, 소나무 송松이라 한다. 관음송觀音松이라 한다.
단종이 머물렀던 곳을 표시하는 비석, 단묘재본부시유지비는 단종의 옛 집터가 있었음을 표시하는 비다.
단종어소는 단종이 유배생활 했던 곳으로 2000년에 복원되었다.
단종은 수양대군이 왕으로 있던 1457년 사약을 마시고 사망한다. 수양대군의 동생이었던 금성대군, 여러 신하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키니 수양대군은 단종이 살아 있는 것이 골칫거리였다.
실록 기록에 보면 단종은 스스로 활시위를 당겨서 자살을 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여러 정황이나 야사에 보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직접 들고 단종에게 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왕방연은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몹쓸 짓이라 생각했고 괴로워하다가 시조를 남겼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의 시조
단종은 세조에 의해서 기획된 죽음이었다. 단종이 죽은 후에 시신조차 제대로 관리가 되지 못해서 당시 영월 호장, 염흥도는 겨우 시신을 수습해서 묘소를 조성했고 훗날 단종은 숙종 때 거의 230여 년이 지난 후에 왕으로 복권이 된다.
호장은 고려. 조선 시대 향리 중 가장 높은 계층이다.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가 단종으로 복권이 되었고 단종의 왕비도 서민으로 강등이 돼서 노산군 부인으로 있다가 단종이 왕이 된 후에 정순왕후로 왕비의 호칭을 회복하게 된다.
조선 왕 중에 왕과 왕비의 무덤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장릉, 단종의 능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있다.
사릉思陵 , 정순왕후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무덤 이름에도 멀리서도 남편인 단종을 늘 생각했을 것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사릉思陵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세조(1417~1468)의 조선 제7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455~1468이다.
세조는 왕권강화책으로 6조 직계제를 부활시킨다.
6조 직계제는 왕이 6조의 판서들에게 직접 명령하고 6조에서 논의한 것을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한다. 문종이나 단종시대를 거치면서 '의정부 서사제'라고 해서 의정부의 정승들이 합의한 것이 최고의 결정권을 가졌다. 하지만 세조는 6조의 판서들에게 직접 명령을 하달하는 6조 직계제를 부활시킨 것이다.
태종이 처음 실시했던 호패법을 강화시킨다. 호패법은 조선 시대 신분증명서인 호패를 반드시 지니고 다니도록 한 법이다.
진관 체제를 수립한다. 진관 체제는 각 도에 1~2개 병영을 설치한 지역 단위의 방위 체제이다.
국방, 행정이 어느 정도 일치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나가면서 왕권강화에 대한 노력을 많이 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술자리에 관한 기록이 970여 건이 등장한다. 500여 건의 기록에 세조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 세조가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 특히 세조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준 공신들과의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는 기록들이 여러 자료에서 보인다. 정말 격의 없이 술자리에서 호칭도 자유롭게 하고 술자리에서 왕의 자리를 따로 만들지 않게 하고 신하들의 자리에 가서 함께 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변방에 근무를 하고 있던 수양대군의 오랜 심복이었던 양정이 "지금 왕께서 너무 오랫동안 왕위에 계신다는 말이 많이 있으니 왕의 자리에서 은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듯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세조는 그 자리에서 "그래 내가 좀 오래 했지"라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술자리가 끝난 후 신하들이 엄청 불경한 발언이라고 해서 양정은 참수당했다.
세조는 자주 행차를 나섰다. 행차를 통해서 민생도 챙기고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도 깔려있었다. 쿠데타로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니 마음에는 항상 백성의 민심이 신경 쓰였던 것이었다.
세조의 행차와 관련된 유물, 유적이 있다.
오대산 상원사에는 세조가 상원산에 들렀을 때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의 피 묻은 베적삼이 있다.
세조의 피부에 난 상처가 옷감에 그대로 배어 있었다.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은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조가 행차를 자주 했는데 큰 가마가 나뭇가지에 걸리적거리기도 했다. 어느 소나무가 가지를 번쩍 치켜들었다. 기분이 좋아진 세조는 '장관 소나무로 불러라'라고 해서 조선 시대 '정이품' 판서가 된다. 요즘으로 치면 장관이다. 그래서 요즘 표현으로 '장관 소나무'이고 당시 이름으로 '정이품송'이다.
보은 속리 정이품송은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 가는 길에 있다.
세조는 각종 편찬 사업, 조선 시대 문화를 정리하는 사업에 착수해서 조선 역사서, 동국통감, 조선 시대 헌법인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했다. 역대병요, 병장도설, 국조보감 저술을 통해서 조선 전기의 시대 현안들을 완성해 나가고 제도적으로 정비해 나간다. 나라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은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 의 역사를 엮은 사서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이다.
역대병요歷代兵要는 역대 전쟁에 관한 사서이다.
병장도설兵將圖說은 병서이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조선 역대 왕의 모범이 되는 업적을 수록한 역사책이다.
1901년 서울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국보 2호로 지정돼 있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내에 있다. 세조 때 완성이 되었다.
불교를 언해하기 위해서 간경도감을 설치를 해서 <석보상절>, <월인석보>를 간행했다.
간경도감은 불경의 번역 및 간행을 맡아보던 기관이다.
세조가 불교에 깊이 빠진 이유는 자신에게 있었던 원죄를 어느 정도 씻어보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해석된다. 세조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다.
광릉光陵, 세조와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태의 무덤으로 되어 있다. 같은 산자락이지만 서로 다른 언덕에 만든 무덤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 한다.
세조는 나라가 왕권이 강해야 된다고 해서 쿠데타로 집권을 했지만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여 조선전기의 기틀을 잡은 왕으로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세조는 쿠데타의 주역이라는 그늘의 측면과 왕으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긴 빛의 측면이 공존하는 왕이다.
다음은 예종, 성종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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