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최대의 폭군, 연산군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1476~1506)의 재위기간은 1494~1506년이었다. 연산군은 1476년에 태어나서 1506년, 31세에 반정으로 쫓겨났다가 생을 마감했다. 1494년 성종의 뒤를 이어서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했다. 조선 왕조에서 적장자 출신 왕은 7명이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이다.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했지만 재위기간 10여 년간 엄청난 독재 군주였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소생이었다. 폐비 윤씨(1455~1482)는 성종의 계비였고 1479년 폐서인이 된 후 1482년 사약을 받아 죽음을 맞았다.
사약을 받은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신하들도 부담을 느끼고 있었지만 적장자로서 정통성이 있었다. 8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머니 윤씨가 폐위되었을 때는 연산군이 4살이었다.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았을 때는 연산군은 7살이어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정확히 잘 모르고 있었다. 직후에 성종이 두 번째 계비로 맞이했던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로 입적해 놓았기 때문에 한동안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가 정현왕후 윤씨로 알고 있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폐비 윤씨이며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소위 어머니의 죽음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대거 처형하고 유배를 보내는 사화를 일으킨다. 연산군의 이름은 '융'이었다. 세자로 책봉되고 왕위에 올랐지만 왕세자 때부터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연산군일기> 총서 기록을 보면 '소시에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매우 못마땅히 여겼다'라고 되어 있다.
아버지 성종은 경연을 제일 열심히 했다.
경연經延은 조선시대에 왕에게 유교의 경서와 역사를 가르치던 교육제도이며 또는 그 자리를 뜻한다.
연산군은 세자시절부터 아버지 성종이 경연을 열심히 하면서 신하들과 계속 소통하는 모습을 좋게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는 왕인데 왜 저렇게 살아?, 나는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라고 한다. 연산군이 왕이 된 후 제일 먼저 경연을 폐지한다. 조선 시대에 왕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장치 언론삼사言㤻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폐지하거나 기능을 축소시킨다.
왕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는 기관을 폐지시키면서 독재 군주의 길을 가게 되었다. 독재의 길로 가는 중에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발생한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무오년에 사림파가 해를 입은 사건을 뜻한다.
무오사화가 발단이 된 사건은 <성종실록>의 편찬 과정에서 사초 문제가 발생한다.
사초史草는 조선 시대에 사관이 기록한 사기의 초고이다.
성종실록成宗實錄은 1469년 음력 11월부터 1494년 음력 12월까지 조선 성종 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돌아가신 후에 전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것이 관례였다. 왕이 생존해 있을 때 사관들을 배치해서 왕이 주재하는 회의, 왕이 행차에 나설 때 항상 따라다니면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다. 이것을 모은 것은 사초史草라고 한다.
왕이 승하하고 난 후 사초들 중에 후대에 기록으로 남겨야 할 내용을 실록에 활용한다. 실록은 편집자료이기도 하다. 김일손은 성종 때 사관으로 있었고 연산군 때도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김일손(1464~1498)은 <탁영문집>을 저술한 학자이며 영남 사림파의 중심이었다.
김일손의 당시 스승이었던 김종직(1431~1492)은 사림파의 영수였다. 김종직은 의제를 조문하는 글 '조의제문弔義帝文를 썼다. 의제는 중국 초나라의 왕이었는데 삼촌인 항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왕이었다.
단종과 세조의 관계를 닮아있었다. 공개적으로 세조를 비판하지 못해서 중국 의제의 사례에 빗대어서 세조를 비판한 글이었는데 '조의제문'이 사초에 실린 것이 밝혀지면서 대규모 필화사건으로 연결된다.
필화사건은 발표한 글이 법률,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제재를 받는 사건이다.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고 사초를 실었던 장본인 김일손은 처형당했다.
부관참시는 죽은 사람의 관을 쪼개고 사체를 꺼내어 목을 베는 형벌이다.
김종직의 제자로서 김일손과 뜻을 함께 했던 영남 사림파들이 대거 화를 당한 사건은 '무오사화'라고 한다.
6년 후 더 큰 사화가 발생한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생했을 때는 연산군이 왕으로 재위한 지 10년 가까이 되면서 독재는 정점을 찍고 있었다. 실록 기록, 여러 자료를 보면 연산군이 가장 싫어했던 말은 '능상 凌上 '이라고 한다. 능상凌上은 왕을 능멸한다는 뜻이다.
신하가 조금이라도 쓴소리를 하거나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하지 않는 폭군의 모습을 보인다.
어머니가 성종 때 폐출됐다가 사약을 받은 일은 연산군이 잘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 공개되었다. 성종은 죽을 때 까지도 폐비 윤 씨의 일을 거론하지 말라고 했었다. 폐비 윤씨의 일을 소환했던 인물은 임사홍이다. 임사홍은 조선 전기 홍문관 교리, 승지,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측근 신하였고 간신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간흉, 소인, 간신 같은 표현으로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임사홍이 중심이 되어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죽음에 관계한 사람들 명단을 건넨다. 연산군은 자신에게 쓴소리를 하는 신하들을 제거하려고 하고 있던 참이었다. 당시 승지로 있었던 이세좌는 연산군의 행사장에서 실수로 술을 엎어버렸다. 이세좌는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다준 인물이었다. 연산군은 어머니 죽음 관련 신하들을 모두 희생시킨다. 무오사화 때보다 더 많은 희생을 낳았고 무오사화로 유배를 갔던 김경필, 정여창 같은 인물들이 처형당한다.
권력의 화신이었던 한명회조차도 부관참시당한다.
한명회는 조선 전기 계유정난의 설계자이자 예종, 성종의 장인이었다.
갑자사화는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 대신들과 성종 때 국정 경험이 많은 인물도 대거 처형당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연이어 사화를 일으키니 신하들도 겁이 났다. 아무 말을 할 수 없었고 연산군은 본인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사냥을 좋아하는 연산군은 금 표禁標를 설치한다.
금표는 연산군이 사냥 등의 유흥을 위해 설정한 출입 금지 구역에 세운 통행금지 표지이다.
사냥을 위해서 백성들을 출입 금지시켰고 금표가 설치된 자리의 백성은 쫓겨나야 했다. 연산군은 유흥을 즐기기 위해 재정이 더 필요했고 백성들에게 2,3년 치 세금을 미리 거둬들이고 각종 명목을 붙여 세금을 부과했다.
경회루 연못가 근처에 '만세산'이라는 인공 산을 만들고 산 위에 작은 궁궐을 짓고 꽃으로 장식을 하였다.
실록에 '그 모습이 정말 기괴 만상이었다'라는 표현이 있다.
용주(龍舟)(배)를 만들어서 경회루에 띄우고 채색비단으로 연꽃을 만든 후에 뱃놀이를 했다.
그때 동원되었던 기생을 칭하는 명칭이 운평(運平)이었고 운평에서 승진하면 흥청興淸이 되었다.
사람들이 조롱하며 "흥청들을 데리고 노니까 나라가 망한다", '흥청망청 興淸亡淸'이라 불렀다.
<연산군일기>는 실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쫓겨난 왕은 '종'이나 '조' 같은 묘호도 받지 못한다. 왕자 시절의 호칭, 연산군이다.
묘호는 왕이 죽은 뒤 종묘에 신위를 모실 때 붙이는 '호'이다.
연산군 시대의 실록은 <연산군실록>이 아니라 <연산군일기>라고 한다.
"..흥청.운평 삼천여 인을 모아 놓으니
생황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
...그때 왕은 처용處容가면을 풍두豊頭라고 불러
금.은.주옥으로 장식하고
왕이 매양 술이 취하여 발광할 때마다
스스로 풍두를 얼굴에 걸고 경복궁으로 갔는데
이때 흥청 수백 명에게 풍악을 치며 따르게 하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은 술과 노는 것을 좋아하며 사치와 향락이 절정에 이르렀다.
연산군은 관리들에게 말을 삼가는 신언패愼言牌를 차고 다니게 했다.
'구시화지문 口是禍之文 입은 화의 문이고
설시참신도 舌是斬身刀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라고 신언패愼言牌에 새기게 했다.
관리들이 쓰고 다니는 '사모관대'에는 '충성' 두 글자를 써서 다니게 했다.
연산군이 개발한 극형에는 소바닥을 뚫는 고문 천장穿掌, 몸을 지지는 낙신烙訊, 가슴을 빠개는 착흉剒胸, 바람에 뼈를 갈아 날리는 쇄골표풍碎骨飄風 등의 고문 기술을 개발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도 연산군에게 저항을 하지 못했다. 내시 김처선(1421~1505)은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7명의 왕을 섬긴 환관이다. 김처선은 내시 중에서도 가장 직급이 높은 상선商膳이었다.
김처선은 연산군의 폭정에 간언을 계속하자 연산군은 활로 김처선을 죽이고 시신까지 잘라 버렸다. 연산군 말년 참다못한 신하들이 반정을 꾀하게 된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으로 구성된 세력이 1506년 창덕궁의 연산군 처소를 습격하여 몰아내고 진성대군 (중종)을 왕으로 추대한다.
연산군과 최후까지 함께 했던 여인은 장녹수였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며 국사를 좌지우지한 후궁이다. 국정농단 여인에게 완전히 의지하면서 주변에 제대로 말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간신들로만 둘러싸여 연산군은 몰락하고 만다. 반정군이 습격하자 별다른 저항 없이 체포되어 끌려왔다가 강화도 위의 교동도 섬으로 유배된다. 실록 기록에 역질疫疾로 두 달 만에 죽었다고 한다.
연산군이 교동도로 유배 갈 때 백성들이 조롱 한 시가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충성이란 사모요
거동은 곧 교동일세
일 만 흥청 어디 두고
석양 하늘에 뉘를 좇아가는고
두어라, 에 또한 가시의 집이니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
-연산군이 교동도로 유배갈 때 백성들이 조롱한 시
시에 나오는 '사모'는 머리에 쓰는 사모紗帽가 아니라 한자로 보면 사기 사詐, 꾀할 모謨를 써서 '사기'라는 뜻이다. 왕의 행차를 거동擧動이라고 하는데 거동을 운율이 비슷한 교동이라고 했다. '그렇게 각시 좋아하다가 가시나무 울타리에 갇혔네'라는 표현을 했다.
연산군묘燕山君墓는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하고 있다.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나서 폐위되었던 폐비 신씨와 사후에 두 왕과 왕비가 나란히 묻혀 있다.
다음에는 중종.인종.명종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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