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겪은 선조, 왕으로 불리지 못한 광해군
조선 제14대 왕 선조(1552~1608)의 재위 기간은 1567~1608년이다. 선조 재위 중 임진왜란(1592~1598), 2차에 걸쳐 침입한 일본과의 전쟁이 있었다. 선조는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 왕이었다. 조선의 왕은 대부분 왕비, 계비 소생, 왕이 되는 것이 적통이었지만 선조는 할머니가 후궁이었다. 중종의 후궁이었던 창빈 안씨였고 그 사이에 낳은 아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다.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가 있었지만 일찍 사망하여 후계를 계승할 사람이 없어서 조카들 중에서 물색을 했다.
어느 날 조카들을 불러 놓고 왕이 쓰고 있는 익선관을 보여 주며 '얼마나 머리가 컸는지 알아보고 싶다, 한 번 써 봐라'라고 한다. 하성군(훗날 선조)만은 익선관을 명종에게 반납하면서 "이것이 어째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라고 했다.
명종이 심히 기특하게 여겨 후계를 전해 줄 뜻을 밝혔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는 상당히 영특하였고 왕이 된 후 본격적인 사림 정치 시대를 열어간다.
명정 때 까지 을사사화乙巳士禍 여진이 남아있었고 문정왕후가 20여 년 가까이 수렴청정하면서 외척 정치가 본격화되는 시대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 소윤과 대윤이 충돌한 끝에 명종 즉위와 함께 대윤 일파가 대거 숙청된 사화이다.
※문정왕후(1501~1565)는 중종의 제2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이다.
선조는 방계 혈통이라는 점도 작용했고 외척이나 훈구세력의 시대가 아닌 사림 정치 시대의 개막을 열어야 된다고 판단해서 율곡 이이, 정철, 성혼, 정인홍 등 당시 명망 있는 학자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한다. 지방에 은거하면서 정치에 관심이 없던 사림파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다 보니 관직은 한정되어 있고 하고 싶은 사람이 많아서 경쟁이 붙는다.
그러다 보니 당쟁黨爭 시대가 선조 때 처음 시작된다. 1575년 이조전랑吏曹銓郞(요즘 행정안전부의 총무과장)의 인사권을 둘러싸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한다.
※이조전랑吏曹銓郞은 조선시대 이조의 정5품 정랑과 정 6품 좌랑을 합쳐 부른 말이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은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인東人, 심의겸의 집은 서울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인西人으로 불렀다. 주로 동인에는 이황, 조식 등 영남학파가 있었고 서인에는 이이, 성혼 등 기호학파가 많아지면서 최초로 동인과 서인의 분당이 일어났다.
이어서 1589년에는 정여립 역모 사건을 계기로 서인에 대한 비판을 놓고 동인 중에서 강경파는 북인北人이 되었고 온건파는 남인南人이 되었다.
※정여립 역모사건은 동인 출신의 정여립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조직한 모임이 역모의 오해를 뒤집어쓴 사건이다.
북인의 핵심 인물은 정인홍, 남인의 핵심 인물은 유성룡이었다.
선조 때 동인 서인 분당에 이어 동인이 남인, 북인으로 갈라지는 상황이 되었다.
오랜 시간 전쟁이 없었고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만 가지면서 '숭문천무崇文賤武, 글을 숭상하고 무력을 천시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국방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일본은 자기들끼리 큰 전쟁을 벌였다. 그런 상황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통일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는 일본의 무장이자 정치가, 일본을 통일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조선에서도 일본의 집권자가 바뀌었으니 통신사의 핵심 인물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을 보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태를 살펴보았다.
※통신사通信使는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에 보낸 외교사절단이다.
김성일은 절대 일본은 처들어 오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고 황윤길과 허성은 쳐들어올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실제 쳐들어올 것 같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선조는 별다른 일 없을 것이라고 하며 준비를 하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20만 대군을 앞세우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장으로 해서 부산진을 침공했다.
부산진 첨사 정발, 동래부사 송산현이 전사하고 조선의 최고의 장군 신립 장군마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치다가 패배하게 된다. 당황한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을 간다. 당시 후계자 책봉이 안 되었는데 18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광해군은 조정의 분조를 이끌며 민심을 수습하면서 의병을 모으고 갖은 고생을 한다. 이런 경험들은 광해군이 이후 왕이 되었을 때 국방, 외교에 대해서 상당한 식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가버리자 분노한 백성들은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에 불을 지르고 여러 노비 문서를 보관했던 장례원 같은 곳도 방화하면서 수도 한양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그나마 희망의 불빛이 보였는데 육지에서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의병장들이 본격적으로 활약을 하게 된다.
※곽재우(1552~1617)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전투, 화왕산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조선 수군의 맹활약으로 일본군의 작전은 완전히 차질을 빚게 된다.
일본군은 임진왜란 두달 만에 평양성까지 점령하게 되었고 선조가 피난해 있는 의주 공격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바닷길을 막아 버린다.
1592년 이순신의 한산대첩의 승리로 일본군들이 전라도 뱃길을 활용해서 병력과 물자를 공급하는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군이 참전을 하게 되면서 전쟁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1593년 3월 경에 한양 수복, 탈환이 이루어졌고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면서 강화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강화 협상이 결렬되었다. 일본군은 다시 대규모 병력으로 재침입한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이순신장군은 지휘권 박탈당하고 백의종군하는 과정에서 원균이 이끄는 수군이 경남 거제 칠천량에서 왜군에게 참패를 당한다. 남은 판옥선 13척으로 이순신 장군은 기적적인 승리를 하며 '명량대첩'이라 부른다.
※판옥선은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조선 수군의 전투선이다.
선조는 왜란 후에 궁궐이 다 불타버렸기 때문에 정릉동의 행궁에 거처를 마련한다. 이곳은 원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머물렀던 월산대군의 사저였다. 이곳이 나중에 궁궐로 활용되면서 경운궁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선조는 1608년 승하하고 선조의 뒤를 이어서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한다.
조선 제 15대 왕, 광해군(1575~1641)의 재위기간은 1608~1623년이다.
광해군은 왕이 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선조는 1606년에 적장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는 광해군처럼 후궁출신의 왕자보다는 영창대군에게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선조가 1608년 승하할 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3살이었다. 광해군이 후계를 계승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초반에는 전쟁 이후에 피폐해진 민생이나 황폐화된 농토정리 같은 사업들을 잘했다. 양전 사업, 호적 정리, 토지세법의 획기적인 개혁책 조치를 취한다. 특히 특산물을 납부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지주 부담을 증가하게 하는 대신에 일반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대동법大同法은 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하는 제도이다.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해서 전쟁 상황에서 질병에 시달렸던 백성들에게 도움을 줬다.
※허준(1539~1615)은 조선 중기의 의학사로 의학서 동의보감의 저자이다.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같은 책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된 것을 재간행하는 문화 정비 사업을 한다.
전라도 무주에 가면 적상산사고가 있다.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도 새로 설치 하는 등 전후 복구 사업에 큰 성과를 낸다.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는 조선시대 실록을 비롯한 각종의 사서를 보관하던 사고가 있었던 곳이다.
광해군은 내부 정치에 상당한 무리수를 둔다. 1609년 친형 임해군을 유배보냈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했다. 1613년 문경새재 은상銀商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재남이 중심이 되어서 영창대군을 왕으로 올리려 했다는 놀라운 진술이 나왔고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 보냈다가 골방에서 증기불을 때서 증기의 열에 의해서 목숨을 잃게 만들었다. 1614년 영창대군은 증살蒸殺되었다.
여기에 강력히 항의했던 영창대군의 어머니, 광해군의 법적 어머니 인목대비를 지금의 덕수궁(서궁)에 유폐한다. 이 사건은 폐모살제廢母殺第라고 해서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다'라고 불렸다. 이 사건으로 광해군 때 집권했던 북인 세력을 제외한 서인과 남인들을 대거 결집하게 하는 계기가 되면서 광해군은 상당한 정치적 타격을 입는다.
광해군은 인왕산 자락에 인경궁(仁慶宮)이라는 경복궁 10배 규모의 엄청난 궁궐을 조성한다. 조선의 다섯 번째 궁궐로 남아 있는 경희궁도 조성한다. 경희궁을 조성한 곳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이 이곳에 살았고 왕의 기운이 있는 곳이라 해서 이곳의 기운을 억누르려면 궁궐을 지어야 된다는 건의를 받아들여서 만든 것이었다. 대규모 토목공사에 대규모 비용이 들어갔고 국고가 낭비가 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아주 힘들어진다.
광해군의 외교 부문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때 명나라에서 후금으로 교체되는 시기였고 후금은 명나라를 계속 침입한다. 명나라는 후금에 계속 시달리다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원병을 보냈으니 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파병을 한다. 어전통사 (임금의 통역관) 출신의 강홍립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강홍립을 도원수 사령관으로 삼아서 광해군은 '파병은 하는데 전투를 하게 되더라도 향배를 잘 봐서 항복해도 좋다'는 '밀지'를 내린다.
※도원수는 전시에 군대를 통할한 임시 무관직이다.
결국 강홍립이 도원수가 되었던 심하전투에서 후금군과 교전을 하다가 바로 투항한다.
※심하전투는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만주의 심하 부차에서 후금군과 벌인 전투이다.
광해군의 실리외교로 후금과의 평화 관계가 유지되었다. 광해군 재위기간에는 후금은 조선에 쳐들어오지 않았다. 나중에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의 실리 외교는 정통의 우방국인 명나라를 배신한 행위라고 해서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으로 외교정책을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의 댓가는 혹독했다.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쫓겨난 왕이라고 생각해서 잘했던 부분마저 평가 절하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에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임진왜란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
광해군의 폐위 명분은 폐모살제廢母殺第, 토목 공사로 인한 국고 탕진, 실리외교(중립외교)였다.
광해군은 말기에 불안해 했다. <공사견문록> 기록에 의하며 "광해군은 항상 궁중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사람을 시켜 찾게 하여 찾지 못하면 기뻐하고 찾으면 기뻐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변이 있을까 염려해서 몸 숨기기를 연습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불안 증세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23년 광해군을 반대하는 반정이 일어난다.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강화도를 거쳐서 잠시 교동도에 있다가 마지막 유배지는 제주도였다.
광해군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위치하고 있다. 부인이었던 문성군부인 류씨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서 왕릉이라는 칭호 대신에 광해군묘로 불리고 있다.
다음 인조. 효종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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