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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예송논쟁 현종과 상당한 업적을 남긴 숙종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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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논쟁 현종과 상당한 업적을 남긴 숙종

조선 제18대 왕, 현종(1641~1674)의 재위기간은 1659~1674년이다. 현종은 15년간 재위를 했었고 효종의 적장자 출신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다. 결과적으로 현종의 업적이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왕권이 약화되었고 자연재해, 전염병이 제일 심했던 시기였다. 

 

현종의 왕비는 명성왕후 김씨이며 청풍 김씨로 당시 효종 때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쳤던 김육의 손녀였고 김우명의 딸이었다. 현종시대 '예송논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성리학 이념을 실천할 수 있은 행위로서 예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가 되고 이 예학이 서인과 남인 간의 사상적 정치적 대립의 근거로 작용을 했다.

 

예송논쟁禮訟論箏은 예를 둘러싼 소송으로 현종 때 남인과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한 사건이다. 

그래서 예禮를 둘러싼 소송이라는 뜻으로 예송논쟁이라 한다. 1659년 효종이 승하했다. 그때 왕실의 최고 어른이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조대비)였다. 조대비의 상복 기간을 정하는 데 논쟁을 벌였다. 

서인은 1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하고 반대로 남인은 3년 복을 입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서인들은 이미 조대비께서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의 장례 때 3년복을 입었으니 1년복을 입는 것이 맞다고 한다. 그러나 남인은 왕의 상복을 어떻게 대비가 1년을 입는냐며 3년은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서인과 남인의대표적인 학자들이 대립한다.

 

서인은 송시열과 송중길, 남인은 허목, 윤선도 등이 상당한 논리적 근거를 대면서 서로 간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1차 예송논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난다. <경국대전>,<국조오례의>에 근거를 해서 1년복이 맞다는 서인의 주장이 결국 관철되었고 정치적으로 패배했던 남인의 주요 인물들은 유배를 떠나게 된다. 이때 핵심사항은 결과적으로는 효종이 왕이기는 하지만 두 번째 아들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한다. 효정의 왕통을 인정하지 않는 위험성이 내포되었기 때문에  1674년 효종의 왕비였던 인선왕후가 승하한 후에 다시 한번 잠복해 있던 것이 터지게 된다.

 

이때 여전히 대상은 조대비 장렬왕후 조씨였다. 인조의 계비로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왔기 때문에 이때까지도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생존해 있었다.

이번에는 며느리상에 상복을 입는 기간을 얼마나 해야 할까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서인은 왕인 효종 때 1년복을 입었으니 9개월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은 효종 때 틀렸으며 왕비의 상이므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차 예송논쟁은 남인이 승리한다. 

 

현종이 양측 논리를 들어보니 서인의 주장이 왕통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남인들의 손을 들어줬다. 이 과정에서 현종이 승하하면서 다음 왕 숙종이 왕위에 오르고 확실하게 정리한다. 

"서인의 송시열이 예를 잘못 해석했다"고 정리하면서 남인들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면서 숙종 초반에는 남인들이 권력을 잡는다. 

 

현종 시대 예송논쟁은 1차 기해예송(1659년)은 서인의 승리였고 2차 갑인예송(1674년)은 남인의 승리로 끝났다. 현종실록의 기록에는 한재와 수재로 인한 기근이 아주 극심했고 전염병과 마마로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한다. 

 

"기근의 참혹이 올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남방의 추위도 올겨울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므로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중략) 가까운 고을에서 얼어 죽은 수가 무려 190명이나 되고

갓난아이를 도랑에 버리고 강물에 던지는 일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중략)돌림병이 또 치열해 죽은 자가 이미 67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현종실록 1671년 1월 11일, 전라도 관찰사 오시수의 보고서 내용

 

1670년 경술년, 1671년 신해년의 앞 글자를 따서 '경신대기근'이라 부른다. 현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습창, 눈병, 피부병 등으로 인해 자주 온양온천에 자주 행차를 했다.

 

 

당시 온양온천을 그린 그림들이 남아있다. 왕이 임시로 머무는 궁궐, 행궁인 온양행궁이 온천에 있고 왕이 자주 행차했기 때문에 신하들이 근무하는 관청들도 남아있는 모습들이 기록화로 정리가 되어 있다. 

 

현종의 가장 큰 유산은 숙종이라는 적장자 출신의 왕을 배출한 것이다.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적장자가 숙종이었다. 

 

 

조선 제 19대 왕, 숙종(1661~1720)의 재위기간은 1674~1720년이다.

숙종은 42년간 재위했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과 달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숙종의 첫 번째 왕비는 인경왕후 김씨였는데 20살에 천연두로 사망한다. 그렇게 해서 맞이했던 계비가 인현왕후 민씨였다. 인현왕후는 계비로 들어왔지만 결국 아들을 못 낳다 보니 숙종을 사로잡은 여인이 장희빈이었다. 후궁으로 들어와서 아들 경종을 낳았다. 

 

 

아들을 낳으면서 장희빈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장희빈이 워낙 성격이 문제가 많았고 폐위가 된 후에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를 하게 된다. 폐위되고 복귀되는 과정에서 장희빈은 궁궐에 있었지만 힘을 완전히 잃게 된다. 

이때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은 숙빈 최씨라는 후궁이었다.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영조가 된다. 숙종은 정작 인경왕후, 인현왕후가 돌아가시고 난 후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까지 맞이한다. 세 명의 왕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장희빈 사이에서 경종,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영조를 출산을 했다. 

 

숙종은 14살의 나이로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후에 1674년 소위 갑인예송 당시 (현종 때) 서인과 남인이 대립했을 때 확실하게 정리를 한다. 이때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제일 치열했다. 숙종이 즉위했을 때는 갑인예송에서 승리한 남인들이 권력을 잠깐 잡았지만 서인들의 반격이 시작된다. 1680년 서인이 주도해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들이 다시 권력을 잡는다. 1680년이 경신년이어서 '경신환국'이라 부른다. 

 

장희빈이 낳은 아들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기 전 단계가 원자로 이름을 정하는 것이다. 원자 정호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숙종은 장희빈에 대한 애정이 강할 때라서 경종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서인들을 1689년 대거 축출하여 남인들이 권력을 잡는다. 1689년은 기사년이므로 '기사환국'이라 부른다. 

 

남인이 5년 정도 권력을 잡고 정책을 펼쳤지만 숙종은 미흡하게 느껴졌고 장희빈의 투기가 심하여 장희빈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 장희빈이 폐출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에서 1694년 서인이 주도해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권력을 잡는다. 1694년은 갑술년이므로 '갑술환국'이라 부른다. 

 

 

치열한 환국 속에서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숙종은 당파의 영수의 입장보다는 왕의 입장이 강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상징적인 사건이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에게 기사환국 때 사약을 내린다. 송시열이 83세로 생을 마감했다. 

숙종은 조선 시대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한동안 왕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세조에 의해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과 사육신을 230여 년 만에 복권이 된다. 

숙종실록에 단종을 복위하는 기록에서 이제서야 복권시키는 이유가 확인이 된다. 세조에 대한 부담이 컸다. 단종과 사육신을 복권시키면 세조입장 설명이 난처해진다. 숙종이 단종과 사육신을 복권하는 과정에서 내린 전교가 있다. 

 

"오늘의 이 일은 실로 세조의 유의遺意를 잇고 

세조의 큰 덕을 빛내는 것이다"

-숙종실록 숙종 17년 12월 6일 

 

 

단종의 복권은 오히려 세조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논리로 단종의 복권이 이루어졌다. 

단종의 무덤은 영월에 있다. 한동안 노산군 묘였다가 230여 년 만에 '장릉'이 되었고 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도 노산군 부인묘에서 사릉으로 왕비의 격을 갖추게 되었다. 

 

숙종시대에는 경제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폐 상평통보가 1678년 숙종 4년에 전국적으로 유통된다. 도적 장길산이 시장을 무대로 1697년 숙종 23년에 활동을 했다는 것은 경제 규모가 그만큼 확대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678년 숙종 4년, 적을 경계하고 방어하기 위해 강화도 각종 군사시설 돈대시설 54개를 확충한다. 

도성은 태조 때 처음 쌓았고 세종 때 본격적으로 수축하고 숙종 때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수축 사업이 있었다. 새롭게 쌓은 성이 북한산성이다. 

 

 

1711년 숙종 37년, 북한산성 성벽 8.5km, 성문 13개를 완성했다. 

1682년 숙종 8년,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금위영禁衛營, 5군영의 한 군영을 신설한다.

 

 

 

1706년 숙종 32년, 요계관방지도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지도를 만들었다. 당시에 사신으로 갔던 이이영이 당시 청나라 사람에게 부탁을 해서 '잠시만 구경하자'라고 하고 수행해 갔던 화원들로 하여금 직접 베껴서 그리게 했다. 숙종은 국방, 경제, 문화 모든 부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숙종은 서오릉에 가면 명릉이라는 숙종의 무덤이 있다. 

익릉은 인경황후릉이고 명릉은 숙종과 인현왕후가 같이 묻혀있는 릉이고 두 번째 계비 인현왕후도 옆에 있다. 숙종은 돌아가신 후에도 왕비 세 명이 다 옆에 있다.

장희빈은 사약을 받고 죽어서 경기도 광주에 무덤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이 지역에 1969년 무렵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장희빈 무덤이 이전을 해야 했다. 숙종 옆에 묻혔다. 장희빈 무덤까지 옮겨져서 조성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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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경종. 영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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