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의 아들 경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
조선 제20대 왕 경종(1688~1724)의 재위기간은 1720~1724년이다. 경종의 어머니가 장희빈이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1688년에 출생하여 숙종을 기쁘게 했다. 기존의 왕비들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하였다가 장희빈이 아들을 낳으니 경종이 두 살 때 원자로 삼아 후계자로 삼겠다고 한다.
서인들이 상당한 반대를 한다. 인현왕후가 나이가 어린 상황에서 경종을 원자로 책봉을 해버리면 만약에 인현왕후가 아들을 낳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며 반대 했지만 숙종은 단호했다. 경종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난관은 어머니 장희빈의 그늘이었다. 숙종은 시간이 지나자 세자로 책봉한 경종이 마음에 안 들 때면 '장희빈의 아들이라서 그런다'며 말을 하여 경종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거의 30년 세자 생활하는 기간에 숨 죽이고 기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세자 시절을 보낸다.
아버지 숙종 후반기에는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당파가 나뉘어진다. 소론은 경종을 지지했지만 다수 세력 노론은 숙빈 최씨가 낳은 연잉군(훗날 영조)을 지지했다. 이 과정에서 소론과 노론이 정치적으로 상당한 갈등을 빚는다.
1717년 숙종 43년, 노론들은 '경종을 대리청정하게 하자'고 한다. 경종이 정치를 하게 함으로써 흠을 잡아 후계자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런 위기적 상황에서 경종이 뭔가를 했다가는 노론 측에 반격의 여지를 주기 때문에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숙종이 승하한 후 경종은 왕위에 오른다.
노론측은 여전히 연잉군을 지지했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도 경종을 대신해서 연잉군이 대리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론 측의 왕을 위협하는 움직임에 소론 측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소론의 수장 김일경이 목호룡을 사주해서 노론의 명문자제들이 경종을 제거하려 했다는 고변서를 올리게 한다. 8개월간 국문이 진행되었고 노론사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들은 사형을 당한다. 1721년이 신축년, 1722년 임인년에 일어난 사건이어서 '신임옥사辛壬獄事'로 불린다.
신임옥사辛壬獄事로 인해서 노론들이 소론들에 의해서 엄청나게 정치적 타격을 받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신임옥사 이후에도 경종은 상당히 불안하게 왕권을 유지를 했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연잉군은 왕세제, 즉 경종을 이을 후계자로 노론에 의해 지명이 되어 있었다. 경종이 사망하는 과정에서 동궁에서 보낸 게장과 생감을 먹고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의학에서는 게장과 생감은 완전히 상극이라고 한다. 연잉군이 훗날 왕이 된 후에도 소문이 따라다녔다. 1728년 영조 4년, 소론과 남인 급진파가 일으킨 반란, 무신난이 일어났을 때도 '경종의 복수를 하자'라고 주장했다.
경종 독살설에 대한 진위여부는 논란거리로 남아있다. 경종과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적 대립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울시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안에 경종 의릉懿陵에 계비 선의왕후 어씨와 함께 묻혀있다.
'의릉'은 다른 왕릉과 다르게 왕이 위에 위치하고 왕비의 무덤은 아래에 있는 동원상하릉의 형태이다.
조선 제21대 왕, 영조(1694~1776)의 재위 기간은 1724~1776년이다.
경종의 이복동생 영조도 왕세제로 있을 때 상당히 정치적으로 불안했다. 노론의 지원 속에서 어느 정도 세제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소론들이 언제든지 영조를 제거할 수 있는 상황 속에 있었다.
그래서 172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가장 먼저 국시로 내세운 것은 탕평책蕩平策이었다.
이제는 당쟁의 시대를 종식하고 당파가 화합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운영하고 널리 인재를 쓰고 공평하게 써야 된다는 것이 탕평책의 대표적인 핵심 이념이다.
영조는 조선의 왕 중에 최장수 왕으로 83세까지 생존했고 52년간 최장기간 재위한 왕이다.
영조의 장수 비결은 실제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일생토록 얇은 옷과 거친 음식을 먹기 때문에
자전(왕의 어머니)께서는 늘 염려하셨고 영빈도 매양 경계하기를
스스로 먹는 것이 너무 박하니 늙으면 반드시 병이 날 것이다' 하였지만
나는 지금도 병이 없으니 옷과 먹는 것이 후하지 않았던 보람이다'
-영조실록 1750년 2월 10일
영조는 소식하고 채식했기 때문에 오랜 산다고 말 했다. 옷은 무명이나 모시옷을 즐길 정도로 검소했다. 승정원일기 기록에는 영조는 왕실 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내의원에 건강검진을 열심히 받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한 달에 11번 정도 건강검진을 받았다. 3일에 한 번 정도 피를 뽑아보고 혈압을 재어보고 조금만 이상하면 음식을 조절하는 등 항상 건강에 신경을 쓴 것이 장수비결이었다. 고추장, 보리밥을 즐겨 먹었다.
21세 때 왕세제 모습과 51세 영조 모습이 비슷하다. 그만큼 건강관리를 잘했다.
영조의 왕비는 정성왕후 서씨이며 50년 가까이 해로하다가 정성왕후가 64세 때 사망하자 이때 영조가 맞이했던 계비가 정순왕후 김씨였다. 영조는 나이가 66세였고 정순왕후 김씨 나이는 15세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썼는데 노론과 소론 중에서도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 즉 완노緩老, 완소緩少 이런 인물들을 대거 등용했다. 송인명, 조문명, 조현명을 탕평대신으로 등용한다.
"무편무당 왕도탕탕 無偏無黨 王道蕩蕩
무편무당 왕도평평 無偏無黨 王道平平"
'탕평'은 유교 경전 <서경>에서 인용되었다.
1727년에는 탕평 교서를 반포한다. 1742년 성균관에 탕평비를 건립한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기도 하고 과거 시험 1차에 합격한 사람들이 최종 시험을 준비하는 곳으로 앞으로 관료가 될 인재들이었다. 미리 숙지하라는 의미였다. 성균관대 안에 남아있다.
"주이불비 군자지공심 周而不比 君子之公心
비이불주 소인지사의 比耳不周 小人之私意"
"편당을 짓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지음은
소인의 사심이다"
영조는 군역법을 실시한다. 조선시대에는 토지에 내는 세금 전세田稅가 있고 지방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이 있었다. 공납의 폐단은 17세기 광해군 재위 기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효종.숙종 때 전국적으로 보급이 되면서 현물, 즉 특산물을 직접 내던 것을 쌀로 통일해서 내고 부과기준도 현물에서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하면서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군역軍役의 문제는 더 심해졌다.
17~18세기 군역은 16~60세의 양인 장정에게 부과되었다. 직접 복무를 하거나 군포를 납부해야 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세 명 있으면 네 명의 몫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장부에 있다고 하면서 할아버지 몫까지 내라고 했다. 아직 16살이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의 몫을 장부에 있다고 하면서 내라고 하기도 했다. 이것을 어린아이 이빨이 노래서 황구첨정黃口簽丁이라 불렀다. 군역의 부담을 못 이기고 도망간 이웃이 생기면 인징隣徵이라 해서 이웃이 부담해야 했고 친척이 도망가면 친척이 내야 해서 백성들의 부담이 늘어났다.
영조는 군역의 폐단을 바로잡아야 하는 정책을 우선에 두었고 백성들과 소통하는 것을 좋아해 창경궁 홍화문 밖에 나가서 직접 백성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750년 실시한 균역법은 군포 2 필을 1 필로 삭감하여 군역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양반을 사칭해서 군역을 부담하지 않고 군포를 내지 않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라고 해서 납부를 시켜 부족한 재정을 충당했다.
땅이 많은 지주에게 1 결당 결작結作이라는 명목으로 2두의 세금을 납부하게 했다. 어세漁稅, 염세鹽稅, 선세船稅를 징수해서 국가 재정은 그대로 유지하되 백성들의 부담은 반으로 줄어들게 했다.
영조가 탕평책, 균역법과 더불어 자신이 재위 기간 중 잘했다고 하는 것이 청계천 공사이다.
1760년 영조 36년, 청계천 준천 사업이 시작된다. 태종 때 청계천이 처음 조성되었다. 홍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조성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흙이 쌓이다 보니 제대로 도심의 하수 기능을 하지 못했다.
1760년 청계천 준천 사업이 시작되면서 과정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준천시사열무도 중 수문상친림관역도'가 남아있다. 그림을 보면 소와 쟁기를 동원했다. 청계천과 중랑천은 연결되어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비가 많이 올 때 청계천 공사로 파낸 흙을 실어서 운반을 했다. 공사에 참여했던 백성들에게 일당을 지급한다. 청계천 공사는 실업자를 구제하고 홍수피해를 방지했다.
당쟁의 원상이 되었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했다. 지리지 <여지도서>, 채색 지도 <해동지도>를 간행했다.
국조오례의를 보완한 <속오례의>, 경국대전을 보완한 <속대전>, 병장도설을 보완한 <속병장도설>을 편찬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중단되었던 의례를 다시 실시한다. 1743년 성균관에서 왕과 신하가 활쏘기 하는 대사례大射禮를 실시하고 왕이 친히 농사를 짓는 친경례親耕禮를 실시한다. 왕비가 친히 누에를 짜는 친잠례親蠶禮를 한다. 예전의 전례들을 부활시키면서 조선 후기 문화 중흥을 꾀했다.
영조는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도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42세에 낳은 아들이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예뻐했는데 어느 시점부터 아버지 영조의 기대에 못 미치자 구박덩어리로 전락한다. 사도세자가 1749년 15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대신해서 대리청정한 후부터는 영조에게 문책을 당하는 날이 많았다. 3일 동안 홍역이 걸린 몸으로 꿇어앉아서 빌기도 하고 이마에 피가 나도록 엎드려서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도세자는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의대증에 걸린다. 화가 나면 내시나 궁녀를 죽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자 영조는 광기가 있는 아들을 벌주려고 1762년 뒤주에 가두었고 뒤주에서 사도세자가 사망하는 참변이 일어났다. 1762년은 임호년이어서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부른다.
영조는 다음 후계자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를 선택한다. 능력 있고 똑똑한 손자 정조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영조는 52년간 재위하면서 조선의 정치 문화 중흥을 꾀했고 왕권 강화 정책으로 정조 시대로 이어지면서 영조. 정조의 정치 문화 중흥이 가능했다.
다음 정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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