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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세도정치의 기세에 눌린 왕 순조. 헌종. 철종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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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의 기세에 눌린 왕 순조. 헌종. 철종

순조. 헌종. 철종 시대는 왕의 권한이 축소되었고 세도정치라는 이름으로 많이 기억되고 있다. 3대 60여 년간은 세도정치 시대였다. 

세도정치勢道政治는 19세기 소수의 권세 가문을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이다. 

정조는 1800년에 사망하면서 19세기의 시작은 조선의 왕 순조였다. 정조는 왕비 효의왕후 사이에서는 자식을 갖지 못했다. 정조가 사랑했던 후궁은 의빈 성씨였고 문효세자를 낳았지만 요절을 했다.  또 다른 후궁 수빈 박씨가 낳은 아들이 순조였다. 

 

조선 제23대 왕, 순조(1790~1834)의 재위 기간은 1800~1834년이었다.

순조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권력을 소수의 세도가문이 가지게 된다.

조선왕조에서 어린나이로 즉위한 왕들은 단종 12세, 성종 13세, 숙종 14세, 순조 11세였다.

영조의 계비. 영조가 66세 때 15세 신부였던 정순왕후가 순조의 즉위와 더불어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기 때문에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이때 신유박해, 대규모 천주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고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 천주교도 박해 사건으로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초반에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4년 뒤 승하한다. 다음에는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 김 씨의 아버지 김조순이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던 인물로 안동 김씨가 완전히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게 된다. 

김조손은 순원왕후의 아버지이며 정조를 도왔던 문신, 노론 시파였다.

순조는 34년간 왕으로 재위했다. 순조는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1808년 행정서 <만기요람>을 편찬하였고 순조의 시문집 <순재고>를 편찬했다.

 

순조 시대 권력이 소수 세도 가문에 집중되고 특히 안동 김씨 같은 소수 세도 가문에게 줄을 대려는 정치인들, 특히 지방관들은 뇌물을 주고 관직을 사는 일이 거듭되었다. 매관매직, 돈으로 관직을 샀으니 본전을 취하려고 백성들을 심하게 착취하다가 19세기 세도 정치기에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다산 정약용의 저술 <목민심서>에 실제 수령을 대신해서 지방의 행정을 처리하는 향리들을 일컬어 '굶주린 솔개'라고 비유를 했다. 

 

"까마귀와 솔개가 창자를 쪼아 먹고 여우와 살쾡이가 피를 빨아 먹으니

천하에 슬프고 원통하고 불쌍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정약용 <목민심서>중에서

 

세도정치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평안도 지역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다. 1811년 순조 11년 홍경래의 난이 평안도에서 터졌다. 홍경래는 지금의 다복동에서 격문을 띄우고 당시 분노한 백성들을 불러 모은다. 

 

"현재 왕의 나이가 어려 김조순, 박종경 등 권신의 무리가 

국정을 농단하기에 정치는 어지럽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서 

헤어날 길을 모르고 있다.(중략)

각 군현의 수령들은 동요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철기 5,000으로 밟아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라"

-홍경래의 격문 중에서 

 

홍경래의 반란군은 평안도 지역을 상당히 차지했다. 평안북도 정주성에서 관군과 대치하다가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홍경래의 난은 막을 내린다.  홍경래의 난은 훗날 철종 때의 진주민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효명세자(1809~1830)는 순조와 순원왕후의 맏아들이다. 순조는 몸이 안 좋았고 효명세자가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 대리청정을 맡긴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세도정치 척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궁중정재, 궁중에서 공연되는 음악, 무용 같은 경우는 왕권 강화와 관련이 깊다. 북학파 학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깊은 친분을 유지하면서 <연암집>을 간행한다.

창덕궁에는 효명세자와 관련된 공간들이 남아있다. 

 

 

연경당演慶堂은 경사스러운 행사를 연다는 뜻으로 아버지 순조를 위해 지은 집이다. 

연경당은 왕이 사대부의 생활을 체험할 수 있게 했고 연경당 사랑채 옆에 책을 보관하고 독서하는 서재 선향재善香齋를 만들었다. 

 

 

창덕궁에 가면 기오헌寄傲軒과 폄우사砭愚榭가 남아있는데 효명세자가 거처했던 공간이다. 

1830년 안타깝게도 효명세자는 스물두 살의 나이로 요절하게 된다. 

 

조선의 제24대 왕, 헌종(1827~1849)의 재위기간은 1834~1849년이다.

헌종은 여덟 살에 왕위에 오른 조선의 최연소 왕이다.

어린 나이의 왕, 헌종은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6년 정도 하면서 안동 김씨가 영향력을 크게 행사한다.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 김씨, 헌종의 첫번째 왕비 효현왕후 김씨, 철종의 왕비 철인왕후 김씨가 안동 김씨였다. 3대에 걸쳐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가 탄생했다.

 

이 무렵 19세기 천주교 박해 사건이 심하게 일어난다. 단순한 종교 탄압이라기 보다는 천주교 신자들이 남인이 많았다. 천주교 박해는 정치적으로 남인들을 탄압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창덕궁, 헌종의 거쳐였던 낙선재樂善齋가 있다. 승화루承華樓는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것처럼 헌종도 많은 도서들을 수집을 해서 학자 군주의 면모를 보였다. 젊은 군주 헌종은 정조를 닮으려는 노력을 보였다. 헌종을 가장 기억하게 하는 공간은 낙선재이다. 헌종은 스물세 살로 요절을 한다.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다음 후계자를 찾아야 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은 순조의 왕비 순원왕후 김씨였다. 여러 왕족 중 후보자를 물색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선택된 사람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고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을 선택한다. 은언군은 정조 때 역모 사건에 연루가 되어서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 은언군의 아들이 전계군(훗날 철종의 아버지)이었고 강화도에서 농사짓고 살았다.  왕실에서 항렬도 맞춰야 되고 현실 정치를 잘 모르는 인물을 원했다. 철종의 원래 이름은 원범이었다.

'강화도령'이라고 부른다. 원범을 왕으로 올리기 위해 강화도에서 모셔왔다.

 

조선 제25대 왕, 철종(1831~1863)의 재위 기간은 1849~1863년이다.

영의정 정원용이 강화도에 있는 철종을 모시러 가니까 처음에는 혹시 자신을 죽이려 왔는 줄 알고 원범은 놀랬다. 역모의 혐의로 할아버지(은언군)가 처형된 경험이 있어서 불안해했다. 실록 기록에 보면 철종을 모시고 올 때 무지개 빛이 서렸다는 기록이 있다. 철종의 아버지는 전계군에서 전계대원군으로 추숭이 된다. 

대원군은 왕의 아버지를 일컫는 보통 명사이다. 철종의 아버지는 전계대원군, 인조의 아버지는 정원대원군, 선조의 아버지는 덕흥대원군이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고 있어서 왕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강화도에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 용흥궁龍興宮이 남아있다.

'잠저潛邸'라고도 한다.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은 나중에 궁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철종이 선대에 역모사건에 휘말렸다는 것이 왕이 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정조의 세손시절 일기에서 시작해서 나중에 국정의 최고 기록이 된 일성록 기록물이 있다. 

일성록은 1760년(영조 36년)부터 1910년(융희 4)까지 약 150년간 조선의 역대 임금의 언동을 날마다 기록한 책이다. 

일성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성록 원본을 보면 몇 군데 걸쳐서 칼로 도삭된 기록이 있다. 도삭된 기록들을 찾아보니 철종의 선대 역모 혐의에 관한 기록들이었다. 철종 선대 역모 사건 기록이 부담이 되어 학계에서는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순원왕후가 주도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철종 때는 삼정의 문란이 일어난다. 삼정의 문란은 토지에 대한 세금 전정田政, 군역 군정軍政, 춘궁기에 곡식을 빌렸다가 추수기에 갚는 제도로 이자가 매우 비싼 환곡還穀의 문제를 말한다. 

농민들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1862년 철종 13년 전국 최대 규모의 농민 반란 진주민란(임술민란)이 발생한다.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확대가 되었고 30여 년 뒤의 동학농민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정감록에는 '세상이 어지러워졌으니 정진인(정鄭씨 성 진인眞人) 새로운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라는 예언들이 백성들에게 호응을 얻게 된다.

정감록鄭鑑錄은 조선 말기 작자 미상으로 등장해 민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였다. 

 

19세기말 힘든 백성들은 천주교와 서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최제우는 동학을 창시했고 백성들은 동학에도 관심을 가진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조선 사회 내부적으로 스스로 무너지는 수순을 밟게 되었으며 19세기 세도 정치의 영향이 컸다. 

순조. 헌종. 철종은 독립적으로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왕권은 약했고 소수의 세도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여 백성들의 삶은 힘들었고 민란이 심하게 일어나는 시기였으며 조선이 해체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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