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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격동의 근대사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 순종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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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근대사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 순종

고종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조선은 왕의 나라에서 황제의 나라가 됐기 때문에 호칭은 고종 황제, 순종 황제라고 부른다. 

 

조선 제26대 왕, 고종(1852~1919)의 재위 기간은 1863~1907년이다.

 

1863년에 12살의 나이로 왕이 된다. 이 과정에서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1821~1898)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왕실의 어른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이 있었던 조대비, 신정왕후 조씨였다. 조대비는 효명세자의 부인이었고 실질적으로 왕비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후대에 추존이 돼서 신정왕후라고 한다. 순조.헌종.철종의 왕비가 다 안동 김씨였고 안동 김씨가 견제 받던 시기에 신정왕후 조씨는 풍양 조씨였다.

 

안동 김씨의 권력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조대비는 흥선대원군을 눈여겨 본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명복(고종)을 왕으로 올린다면 안동 김씨를 견제하겠다고 한다. 이런 과정으로 고종이 철종 뒤를 이어  조선의 26번째 왕으로 올랐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은 10년 간 섭정을 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안동 김씨의 좌장 김흥근, 김좌근 등을 정계에서 은퇴시킨다.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에는 안동 김씨의 좌장 김흥근의 별장, 석파정石坡亭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별장이 마음에 들어 김흥근에게 팔라고 했지만 거부했다. 하루만 빌려달라고 해서 고종을 대동하고 나타나서 고종을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게 했다. 관례적으로 왕이 한 번 잠을 자면 왕의 소유가 된다. 석파정을 강제적으로 뺏은 것이다. 안동 김씨를 배척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때 흥선대원군이 호를 '석파'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견제하려고 세도정치의 본산 비변사를 혁파를 한다.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서원을 정리한다. 서원은 노론 세력들이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해서 당시 600여 개의 서원 중에서 47개만 남겨두고 다 철폐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경복궁 중건 사업을 착수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폐허가 된 이후에 창덕궁, 창경궁은 복원을 했지만 경복궁은 그대로 방치가 되어 있었다. 왕실의 위상과 권위를 보여주려면 경복궁을 중건해야 했다. 1867년 완성을 하고 고종이 경복궁에 들어가면서 다시 한번 경복궁 시대가 열린다. 

 

 

경복궁은 왕실의 화려한 위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늘진 면도 있었다. 무리한 토목공사에 따른 비용이 많이 들어 고종은 고액 화폐 '당백전當百錢' 발행으로 물가가 폭등했고 기부금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했다.

원해서 납부하는 돈이라는 뜻이었는데 백성들은 대원군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원납전願納錢은 원망한다는 뜻의 원납전怨納錢으로 불렸다.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 1871년 미국이 조선을 무력 침략한 신미양요를 겪었다. 대원군척화비大院君斥和碑를 세우면서 '서양의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다'라며  강력한 외세 배격 정책을 썼다.

 

흥선대원군의 정책, 서원 정리는 유림들의 반발을 불러오게 한다. 1873년 유림 최익현이 대원군 하야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고종 황제의 나이는 22살이었고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계속되자 불만이 있었다. 마침 최익현이 상소문을 올리자 흥선대원군의 하야를 촉진시켰고 양주의 직동으로 낙향을 하게 된다.

 

고종의 부인은 명성왕후였다. 명성왕후 민씨 세력들이 권력의 중심에 나선다. 민씨 세력들은 대원군과 달리 개방의 시대라고 하면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부산.원산.인천 세 항구를 개방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일제의 경제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새로운 일본식 훈련을 받은 신식 군대 '별기군'에 대한 대우는 아주 강화되면서 구식 군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해져 반란을 일으킨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한다. 

 

분노한 구식 군인들은 민씨 척족戚族을 살해하자 청나라 군대가 개입된다. 청나라 군대가 와서 임오군란을 어느 정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대원군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대원군은 명성왕후의 국장國葬을 선포한다. 명성왕후는 그때 충주 장호원 쪽으로 피신을 했다. 청나라는 대원군을 움켜 잡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대원군을 청나라 텐진으로 납치를 한다. 국장國葬이 선포되었던 명성왕후는 다시 권력으로 돌아온다. 

 

1884년 10월 우정국 개국하는 축하연에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 인사들이 창덕궁에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납치하여 감금시킨다.

근대 시민 국가를 지향하는 혁신 정강 14개 조를 발표한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삼일동안 권력을 잡았지만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고종 황제와 명성왕후는 격동의 근대사에서 많은 수난을 당한다. 1894년 동학농민 운동이 발생하고 청나라 군대가 먼저 들어오자 이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일본 군대가 들어오면서 조선에서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 벌어진다. 1894년~1895년까지 조선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한다. 1894~1896년 갑오개혁을 함으로써 일본 간섭하에 조선은 놓이게 된다. 명성왕후는 일본의 세력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세력을 찾았고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일본은 명성왕후가 걸림돌이었다.

 

 

일본은 1895년 10월 암호명 '여우사냥' 아래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왕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킨다. 일본 측에서는 마치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의 갈등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무마시키려고 했지만 건청궁 내 갑문각에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이 현장을 목격함으로써 일제는 발뺌을 할 수 없었다. 을미사변을 일으켰던 주동자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고종은 건청궁이 불안했다. 그래서 소위 친러시아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서 1892년 2월 고종 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일제의 영향력이 강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은 선조 때 임진왜란 시기 처음 피난 와서 행궁으로 쓰였다가 광해군 시기 경운궁으로 이름을 명명했던 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을 하게 된다. 덕수궁 주변은 미국, 러시아, 영국 공사관 등 서양 세력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판단에서 경운궁으로 환궁을 한다. 

 

경운궁으로 돌아온 고종 황제는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한다. 왕의 나라에서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

황제국皇帝國이 되면 가장 큰 변화는 황제가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제후국諸候國에서 지낼 수 있는 최대의 제사는 토지와 곡식의 신,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대제社稷大祭를 할 수 있다.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은 네모이다. 

 

 

환구단阛丘壇은 '청원지방天圓地方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 황제가 하늘에 직접 제사 지내는 제단을 둥글게 조성했다. 국호를 옛 삼한을 계승했다고 해서 큰한 대한大韓과 황제의 나라 제국帝國을 합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되었다.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닌 황제의 나라로 대한제국의 고종의 연호는 광무光武를 쓰기 시작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일본이 승리하여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통해 부국강병을 꾀하고 근대식 산업을 하려고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1907년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파견한다. 

1907년 일본이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마지막 황제 순종 황제를 즉위시키면서 일본의 야심 강제병합의 길로 조선은 들어가게 된다. 

 

조선 마지막 황제, 제27대 왕, 순종(1874~1910)의 재위 기간은 1907년~1910년이다. 

순종은 고종과 명성왕후 사이의 적자로서 창덕궁 관물헌에서 출생했다.  

왕세자로 책봉이 되고 첫 번째 맞이했던 왕비는 순명왕후을 세자빈으로 맞이했다가 사망하고 계비로 맞이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가 된다. 순종 황제는 1907년 7월에 고종 황제에게 형식적으로 양위를 받는 형식으로 덕수궁 돈덕전에서 순종황제 즉위식을 올리고 연호를 광무光武에서 융희隆熙로 변경한다. 

거처는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다.

 

 

고종 황제는 그대로 경운궁에 머무르게 했는데 이때부터 이름이 덕수궁이 되었다. '덕을 지니시고 장수하십시오'라는 뜻을 담아 덕수궁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일제가 완전히 조선을 삼켜버린다.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己酉覺書로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박탈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강제병합을 한다. 강제병합 조약이 체결됐던 곳은 순종 황제가 거처했던 곳이 창덕궁이었기 때문에 창덕궁 흥복헌에서 체결이 되었다.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다. 마지막 황후 순종효왕후는 끝까지 옥새를 치마폭에 숨겼는데 친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왕비의 삼촌 윤덕영이 옥새를 빼앗아 옥새를 찍게 했다. 흥복헌은 우리 역사에서 비극적인 장소이다. 

 

1910년 순종 황제는 물러났다. 이왕李王으로 격하된다.  1926년 4월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를 했고 고종 황제의 인산일, 즉 장례식에 일어났던 운동이 3.1 운동이었다면 1926년 6월 10일 만세 운동 역시 순종 황제 인산일因山日이었다. 

 

 

순종 황제는 경기도 남양주의 유릉에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가 묻혀있고 고종 황제 무덤 홍릉에는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있다. 순종황제와 고종 황제의 무덤을 합해서 '홍유릉'이라 부른다. 무덤의 형태는 대한제국 황제의 지위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무덤 양식은 황제국의 면모에 맞게 조성되어 있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는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던 왕이며 쓰러져 가는 제국을 바라보면서도 손을 쓸 수없었던 왕이었다. 치열했던 근대사의 현장에서 제국과 자신의 운명을 같이 쓸쓸하게 마감했다. 

 

세도정치의 기세에 눌린 왕 순조. 헌종.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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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의 기세에 눌린 왕 순조. 헌종. 철종순조. 헌종. 철종 시대는 왕의 권한이 축소되었고 세도정치라는 이름으로 많이 기억되고 있다. 3대 60여 년간은 세도정치 시대였다. 세도정치勢道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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