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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조선 왕조 가장 위대한 세종과 아들 문종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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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가장 위대한 세종과 아들 문종

역사 속의 최고의 왕이자 조선왕조를 빠른 시일 내에 번성할 수 있게 한 왕은 조선 제4대 세종이다. 

세종(1397~1450)의 재위기간은 1418~1450년이다. 

세종대왕은 1397년 아직 태종이 왕이 되기 전에 한양의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울 서촌 통인시장에서 조금 내려가면 사거리에 세종대왕 탄생 표지석이 있다. 음력 4월 10일 출생했고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 15일, 스승의 날이 세종대왕 탄신일이다. 세종은 태종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태종의 장자, 적장자로 책봉되었던 양녕대군을 세자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세 번째 아들(세종)을 선택했다. 택현 擇賢, 현명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태종은 세종의 능력을 본 것이다. 태종의 기대대로 세종은 조선 역사상 최고의 시대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세종은 시대 정신을 잘 읽었다. 세종시대의 정신은 자주, 민본, 실용이었다. 정신이 잘 드러나는 것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왜 내가 문자를 만들었는가'를 보여주는 어제서문이다. 어제서문御製序文은 훈민정음해례본에 수록된 서문이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끼리 서로 맞지 아니하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드느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우리 언어는 중국말과 다르다는 자주 정신, 민본사상, 문자를 편안하게 사용했야 한다는 실용 정신이 들어있다. 한자는 일반 백성들이 쓰기에는 너무 장벽이 높다는 것이다. 

문자를 조금 더 쉽게 자음과 모음을 결합한 엄청난 발명이었다.

 

훈민정음은 1443년 12월 창제하고 3여 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446년 9월 훈민정음을 반포한다. 훈민정음을 반포한 9월 12일은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9일이며 한글날이다. 세종대왕과 관련된 날은 스승의 날, 한글날이다.

훈민정음이 창제 되면서 어려운 한자 시대가 가고 쉬운 한글시대가 되었다. 의사 결정을 매우 빨리 할 수 있는 과학적인 문자다. 세종의 자주. 민본. 실용 정신이 담겨있는 대표적인 성과물이 <농사직설>이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은 1492년 정초, 변효문 등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농업 서적이다. 

이전까지 농사와 관련된 책이 있었지만 주로 중국의 농사법을 정리한 <농상집요>와 같은 책이었다. 

농상집요 農桑輯要는 고려 시대에 이암이 들여온 중국 원나라 농서이다.

우리와 기후, 토양이 다른데 중국책을 가지고 농사를 지어보니 생산적이지 못했다. 농사에 경험이 풍부한 농부들, 특히 농작물에 수확량이 많은 농부들을 관리들이 찾아가서 어떻게 농사짓는가를 직접 적어 오게 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방법들을 기록했다. 곡식의 종류에 따라서 종자를 보관하는 법, 김매는 법, 물 대는 법 등을 정리했다. 세종은 직접 경복궁 후원에 직접 1결의 땅을 갈아서 농사를 지었고(친경親耕) 문제점이 발견되면 다시 고쳐서 최종적으로 반포한 책이 농사직설이다.

 

 

의약분야에서 <한약집성방>은 1443년 간행된 향약에 관한 의학 서적이다. 이전에는 병에 걸리면 처방법이 중국산 약재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중국산 약재를 '당재'라고 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는 '향약'이라 불렀다.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를 다 조사하게 해서 처방법을 제시했다. 질병을 크게 57개의 큰 항목으로 나누었고 다리가 삐엇을 때, 화상을 입었을 때 등 소항목으로 달아서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하다 보니 약재를 구하기도 쉽고 효과도 좋았다. 의학 환경이 향상되었다.

 

농업국가에서는 인구 증가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이 생산력의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이다. <향약집성방>보급으로 영유아 사망률이 많이 줄어들었고 국가의 경제력이 향상되었다. 천문 관측기구들을 만들어 과학 분야의 발전을 향상시켰다. 농업과 천문 관측은 중요하다. 그래서 시계들을 많이 만들었다. 처음에는 해의 그림자를 이용한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만들었다.

 

 

앙부일구(仰釜日晷) 는 1434년 제작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해시계이다.

우러를 앙仰, 가마솥 부釜, 해 일日, 그림자 구晷, '솥이 위를 향하는 해의 그림자를 이용한 시계'들을 많이 발병했다. 하지만 비가 오거나 실내에 있으면 해시계는 작동을 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세종은 장영실을 발탁한다. 장영실의 어머니는 부산 동래현의 관기여서 장영실 신분은 낮았다. 관청에서 일하는 기생들은 조선 시대 천민 신분이고 자식도 천민이 된다. 

 

 

하지만 능력을 보고 장영실에게 관직을 주어 연구소를 차려주면서 해시계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물의 힘을 이용해서 스스로 치는 시계, 자격루自擊漏를 발명해서 조선시대 표준 시계로 활용했다. 

독자적인 달력을 만들면서 세종시대에는 농업, 의학, 과학 분야에서 큰 성과를 이뤘다. 세종 때는 조선 시대의 관청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출산 휴가를 부여했다. 세종의 출산 휴가 정책은 산모 100일, 남편 휴직  30일 부여했다가 조선 헌법에 완전히 정착될 때는 출산 전 30일, 출산 후 50일, 남편 육아휴직 15일을 부여한다.  세종은 시대를 앞서가는 복지 정책까지 썼다. 

 

세종은 최대한 인재를 활용해서 국정을 운영했다. 세종 시대 하면 떠오르는 역사적 인물이 많다. 과학 장영실, 음악 박연, 국방 김종서. 최현덕, 명재상 황희, 허조, 맹사성 등 분야별 전문가가 가장 많이 배출되었다.

집현전集賢殿이라는 인재 양성기관까지 만들어 집현전의 학자들로 하여금 정책 과제들을 연구하게 하고 그 성과들을 국정에 직접 활용함으로써 체계적으로 여러 가지 성과들을 낸다. 

 

 

집현전集賢殿은 1420년 학문 연구를 위해 궁중에 설치한 기관이다. 

집현전에 발탁된 학자들은 당시 최고의 학자들이었고 세종은 이들에게 많은 지원과 후원을 해 준다. 당시 왕실의 진상품 귤을 하사하거나 집현전은 감찰을 하지 못하게 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집현전을 설치했던 곳은 지금 경복궁의 수정전 건물이 예전에 집현전이 설치된 곳이다. 

 

세종은 항상 집현전에 관심을 가지고 자주 둘러 보았다. 어느 겨울날 밤에 불빛이 새어 나와 들어가 보니까 신숙주가 연구하다가 깜박 잠이 들어있었다.

신숙주는 조선전기 병조판서, 대사성,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세종은 입고 있던 곤룡포를 덮어 격려하면서 나왔다.

 

집현전 학자들은 장기 근속자가 많아 유급 휴가를 처음 부여했고 사가독서제 (賜暇讀書制)라고 한다.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는 임금이 하사하는 휴가이다. 

세종은 여러 업적과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했던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상당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질병으로 고생을 했다. 20대 중반에는 두통. 이질, 30대는 풍병. 종기, 40대에는 소갈증(당뇨)으로 고생했다.

 

<세종실록> 세종 21년 6월 21일 기록 

"...또 소갈증이 있은 지 열서너 해가 되었다....

또 임질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거 조금 나았다

지난 봄 강무한 뒤엔 왼쪽 눈이 아파

암막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어두워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으나 누구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다

한 가지 병이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 쇠로함이 심하다"

 

 

세종의 43세 기록을 보면 당뇨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 만 원짜리 지폐에는 세종이 표준형으로 나오지만 사실 조금 뚱뚱했다. 운동을 할 시간이 부족했고 '육식이 아니면 수라를 드시지 않았다'는 기록에서 보이듯 육식을 많이 했다. 육식 위주의 식단이 세종의 건강을 해친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소갈증(당뇨)으로 많이 고생했고 망막 손상은 당뇨 합병증으로 보고있다. 각종 질환에 시달리면서도 최고의 업적을 남겼다. 

 

세종대왕이 말년에 각종 질환으로 힘들어할 때 세종의 아들 문종이 아버지를 많이 도왔다. 문종은 8살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조선에서 최초로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했다.

문종(1414~1452)은 조선 제5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450~1452년이다.

 

29년간 세자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 세종을 도와서 많은 것들을 완성하는데 주역이 되었다. 세종이 왕으로 재위했던 시절에 이룩했던 업적들은 대부분 세종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문종은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잘 드러내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상당한 역할을 했고 최근에는 문종의 여러 가지 능력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문종은 효심이 지극하여 손수 후원에 앵두를 심어서 세종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이 이를 맛보고 원래 앵두는 왕실의 진상품이라서 다른 지역에서 올라오는 앵두도 많은데 세자가 직접 심은 것이어서 정말 맛있다고 하였다. 세종은 문종이 준비된 왕으로서 여러 가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세자의 거처를 처음으로 따로 만들어준다. 

 

경복궁에 자선당 건물은 세자의 독립된 거처였다. 세자는 항상 궁궐의 동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동궁'마마라고 불렀다. 경복궁 동쪽에 가면 자선당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창제하는 과정에서도 문종이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문종은 화차를 개발해서 4군 6진 개척에 아주 혁혁한 공을 세웠다. 4군 6진은 여진족을 몰아내고 설치한 행정 구역이다. 

 

 

과학분야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강우를 측정하는 기구, 측우기測雨器도 최근에 와서 문종의 업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고려사 역사를 정리한 책 <고려사절요>의 편찬 작업이 세종 때 시작해서 완성이 되는 것은 문종 때였다. 문종은 29년간 세자 생활을 했는 데 왕으로 즉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한다. 사인은 종기로 되어 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큰 요인은 문종의 어머니, 세종의 왕비였던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 돌아가시자 효심이 지극하여 어머니상에서 계속 곡을 하면서 체력이 많이 소모가 되었다. 체력을 회복했을 무렵에 아버지 세종이 승하했다. 삼년상을 치르고 체력이 떨어졌다. 연이은 국상으로 온몸이 바싹 여위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서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

 

문종이 일찍 사망하자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고 문종의 동생이자 세종의 두 번째 아들이었던 수양대군이 '왕권을 더 강력하게 안정시키려면 신하들의 권력을 제거해야 한다'라는 명분으로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사건이다.

결국 단종은 삼촌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영월에 유배당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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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단종. 세조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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