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잡학지식

조선시대 건국 태조 이성계와 정종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6.
반응형

조선시대 건국 태조 이성계와 정종 

조선朝鮮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했던 왕조이다. 517년 간의 눈부신 역사, 조선을 건국한 군주 태조가 시작했으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으로 끝을 맺었다. 27명의 왕이 조선을 이끌었다. 

 

 

조선을 건국한 왕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재위 기간은 1392~1398년 간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시대 사람이다. 1335년에 출생해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10년 가까이 더 살다가 1408년 74세의 나이로 승하한다. 조선의 왕 중 최장수 왕은 83세로 승하한 영조였고 태조 이성계가 두 번째로 장수했다. 

이성계는 젊은 시절부터 전장을 누비면서 활쏘기, 말타기 등을 하면서 체력이 좋았기 때문에 장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버지는 이자춘이었고 원래 본관은 전주였다. 이성계는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목조 이안사는 이성계의 고조부이며 전라도 전주를 본향으로 살다가 이안사 때 강원도 삼척을 거쳐서 지금의 함경도 지역에 터전을 잡고 살아서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에서 출생했고 함흥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전주에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된 여러 유적지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고 있는 경기전(慶基殿)이 있고 경기전 옆에 조선왕조실록을 복원하고 있는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있다. 

 

 

 

경기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이목대와 오목대가 있다. 이목대(梨木臺)는 4대조였던 목조(이안사)가 살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 있다. 오목대梧木臺의 '오'는 오동나무 오梧 자이다. 오동나무를 많이 심은 곳이라는 뜻이다.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한 후에 승전을 기념하는 잔치를 열었다는 데서 이 누각이 세워졌다.

 

이성계는 고려말에 무장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서 주류 세력으로 부상했다. 고려 말에는 몽골족의 간섭 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이 큰 역할을 했다. 이때 몽골 세력과 빌붙어서 권력을 획득했던 권문세족들이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독점해 나갔으며 불교계 폐단도 매우 심했던 사회적 모순이 존재했던 시기였다.

 

사회적인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성리학 기반을 둔 신흥 사대부가 등장했다. 고려 말에 외적의 침입이 아주 심했다. 남쪽에는 왜구, 북쪽에는 여진족 명나라 때 한족 출신의 도적인 홍건적까지 일어났다.

홍건적의 난은 중국 원나라 말기에 중원에서 발생하여 명나라 건국의 계기가 된 종교적 농민 반란이다. 

외적의 침입이 아주 심한 시대로 전쟁 영웅 출현을 아주 고대하는 시점이 되었다. 

이때 부상한 장군은 고려 말을 대표하는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다. 이성계 장군은 함경도 함흥 시골 출신이었다.

 

이성계 이름이 결정적으로 알려진 계기가 있다. 1380년에 왜구가 지금의 지리산 일대에 처들어왔다. 

이때 왜구를 이끌었던 소년 장수 아지발도는 아지발도를 지리산 운봉 일대에서 완전히 사살을 하고 여세를 몰아 왜구를 크게 격파한 대첩을 황산대첩이라 한다.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대승을 거두면서 명성을 높이게 되었다. 왜구 장수 아지발도의 나이는 16세로 신출귀몰하게 고려를 유린하면서 왜구가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이성계의 대표적인 군사참모 이지란은 귀화인으로 여진족 출신이었다. 여진족 이름은 퉁드란이고 고려에 귀화해서 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 이성계가 아지발도가 쓰고 있는 투구의 끈을 맞췄을 만큼 활솜씨가 뛰어났다. 그래서 아지발도의 자세가 흐트러졌을 때 이지란이 재빨리 사살을 했다. 이성계의 활솜씨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에도 많은 언급이 있다. 

뛰어난 활솜씨, 무장으로서의 능력은 고려 말 민족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했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정도전(1342~1398)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유학자이자 조선 건국을 이끈 일등 공신이다. 

정도전은 고려 말 신흥세력의 중심 인물이었고 세상을 바꿔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고려 말 사대부 중에서도 정몽주 처럼 왕조의 테두리 내에서 개혁을 해도 좋다는 인물이 있었지만 정도전처럼 완전히 왕조 교체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도 있었다.  

정몽주(1338~1392)는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이자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온건파 유학자였다. 

 

정도전은 고려 말 전라도 나주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유배지에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세상을 바꿔야 된다고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라도 나주에는 정도전 유배지라는 표지석이 남아있다.  정도전은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군사력을 동원할 수 있는 무장 이성계를 주목하게 된 것이다. 

 

이성계의 군사력과 정도전의 혁명적인 이념이 만나 조선 왕조가 탄생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은 조선 왕조 탄생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원명 세력 교체기를 맞이해서 당시 공민왕이 수복한 땅을 원나라를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명나라 쪽에서 '이 지역을 다시 우리가 차지하겠다'라고 한다. '원나라 땅이었던 이 지역을 내놔라'라고 하는 상황이었다. 고구려가 원래 차지했던 요동지역을 정벌하자는 요동정벌이 본격적으로 추진이 되었다. 이성계는 정몽주, 정도전과 같은 신흥사대부들과 같이 하면서 명나라에 맞서는 것은 무례한 조치라고 판단하면서 명나라 요구에 일정 부분 타협하는 방안을 생각했지만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영 장군은 요동정벌을 적극 추진했고 이성계 장군은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요동정벌을 단행하게 된다.

 

조선 왕조의 서막을 연 대표적인 사건,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켜서 자신에게 명을 내렸던 우왕과 최영장군을 공격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 사건으로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게 되었고 여세를 몰아서 우왕의 아들 창왕을 잠깐 왕좌에 올렸다가 다시 창왕을 폐위시키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세운다. 

정도전, 조준과 같은 참모들의 지원을 받아서 고려 말 과전법이라는 전제 개혁을 실시한다.

과전법科田法은 1391년 신흥 사대부와 이성계가 대지주. 귀족 세력을 물리치고 제정한 토지제도이다. 

 

고려 말에는 세금으로 수확량의 거의 절반을 내야 했다. 그러나 과전법에서는 1/10만 내면 되었다. 20석을 수확한다면 이전까지 10석을 세금으로 냈다면 이제는 2석만 내면 된다. 

과전법을 실시하자 백성들은 이성계와 신흥 세력을 지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공양왕이 스스로 왕위를 양보한다. 이것은 '선위'를 했다고 표현한다. 

 

고려의 수도 개성의 수창궁에서 공양왕의 양보를 받는 형식으로 즉위식을 올린 날이 1392년 음력 7월 17일이다. 공식적인 조선 건국일이다. 

조선 왕조가 새롭게 건국이 됐지만 수도는 여전히 개성이었다. 개성은 5백년 가까이 고려 왕조의 수도였고 고려의 귀족이나 관리들이 새로운 조선 정부에 협조하는 것을 꺼려했다. 고려 시대 관리들이 주로 거쳐하는 동네가 두문동이었다. '두문동에 있는 관리들이 대부분이 출사를 거부한다'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성계는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천도를 결정했고 새로운 천도지로 대전 근처의 계룡산 일대가 물망에 올랐다가 정도전, 무학대사 같은 인물들의 주장으로 현재의 한양으로 도읍이 결정되었고 1394년 10월 한양 천도를 한다. 수도를 천도하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었고 정도전은 처음에 반대를 했지만 이성계의 강력한 의지로 천도를 지시했다.

 

 

천도와 더불어 왕이 거처하는 궁궐, 경복궁이 조성된 것은 1395년 9월, 북악산(조선시대 백악이라 불림)이었

다.  지금의 경복궁 뒤편에 있는 백악(북악산)을 주산으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왕은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자고 주장했지만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면 동쪽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백악(산)을 주산으로 한 궁궐, 경복궁(景楅宮)이 완성된 것은 1395년 9월이었다. 

 

규모는 755칸이었다. 일반 사대부들이 지을 수 있는 최대 규모는 99칸이었다. 경복궁은 왕이 먼저 검소하고 소박한 모습을 실천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규모가 작았다. 

경복궁 이름은  <시경時經>의 주아 편에 보면 '술에 취하고 덕으로 배부르면 군자는 만 년토록 경복(큰 복)을 누린다'에서 유래했다.

 

태조 이성계는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와 두 번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를 부인으로 두었다. 

신덕왕후 강씨가 먼저 사망하자 항상 경복궁에서 잘 보일 수 있도록 지금의 덕수궁 근처에 왕비의 무덤을 조성하고 '정릉'이라고 부른다. 덕수궁 일대를 정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태종 때 무덤이 지금의 서울 성북구 정릉 쪽으로 옮겨가서 정릉동이라는 성북구 동네 이름이 생겨난 유래이다.

 

건원릉, 태조 이성계의 능

건원릉健元陵은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이성계는 신덕왕후 강씨 곁에 묻히고 싶었지만 태조 이성계가 승하할 때 조선의 왕은 태종이었다. 태종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와 계비의 무덤을 함께 나란히 조성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아버지 무덤을 동쪽으로 조성하게 했고 동구름 자락의 중심이 되는 건원릉이다.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종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어 즉위한 정종(1357~1419)은 재위 기간은 1398~1400년이다.

 

 

정종은 이성계가 살아생전에 왕으로 즉위했고 1398년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이 권력을 잡았지만 본인이 바로 왕좌에 오르면 비난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다. 어린 동생 방석을 죽이고 정도전을 제거한 직후여서 실질적인 적장자 두 번째 아들 방과가 얼떨결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종은 42살이었다.  조선의 승계한 왕 중에는 최고령으로 즉위한 왕이다.

 

정종은 왕위에 오른 후에 한양이라는 신도시가 너무 부담스러워 다시 개경으로 재천도를 했고 나중에 태종이 다시 한양으로 천도를 한다. 정종의 역할을 동생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것까지의 임무 수행이어서 1400년 2년여 만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양보를 한 후에는 상왕으로 있으면서 취미 생활을 하다가 1419년에 승하한다. 정종의 무덤은 황해도 개풍군에 정종과 정안왕후의 무덤이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정종은 태조에서 태종으로 이어지는 잠깐의 완충작용을 했던 왕으로 평가된다. 

 

조선시대 태종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