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월드컵 도전 역사의 시작
대한민국 월드컵 도전의 역사는 1954년에 시작됐다. 한국전쟁이 멈춘 지 1년도 안 된 1954년 대한민국은 오로지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FIFA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월드컵 본선 티켓 한 장을 아시아에 처음 배정했고 중국이 기권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맞붙게 되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일본과 대등한 입장이 된 한국이었지만 시합 한 달 전에야 한국대표팀이 꾸려졌다.
예선 2경기 모두 일본 메이지 신궁 경기장에서 원정으로 1954년 3월 7일 치러야 했다.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았고 많은 것이 한국에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상 한파로 폭설에 맹추위가 일본 도쿄에 덮쳤다. 눈이 녹으면서 운동장이 진흙밭이 되어 버렸다. 1950년대 경기장 시설, 축구 장비도 열악했다. 최악의 조건에서 한일전을 치렀다.
당시 선수들은 한파 때문에 축구화에 고춧가루를 넣고 뛰었다.
"6월 16일부터 스위스에서 열리는 세계 축구 국동에선 일본 대 한국 제1차전은
눈과 비가 내리는 최악의 컨디션 속 진흙 경기장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하얀 반바지가 일본, 파란색 반바지가 한국입니다"
-일본 방송 中
치열한 접전을 펼치던 한국과 일본, 선제골은 일본이 넣었다. 전반 16분 일본 최연소 공격수 나가누마 겐의 일격이었다. 한 골을 잃은 한국 선수들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전반 22분 한국의 동점골이 터졌다. 기세가 오른 한국은 연달아 4골을 추가한다. 일본에 5:1 대승을 거둬 값진 승리를 따냈다. 한일전 1차전에서 스트라이커 최정민 선수가 2골을 기록한다.
당시 축구화는 한 짝에 450g으로 두 짝을 다 신으면 900g이 된다. 요즘 축구화의 무게는 한 짝이 약 200g 정도로 한 켤레는 400g 정도이다. 당시 축구화는 가죽으로 만든 스터드를 못으로 박아 고정했다. 시합 도중 풀리면 선수들이 망치를 가지고 다니다가 하프 타임 때 망치로 박아서 단단히 고정한 다음 경기를 뛴다.
현재의 대표팀은 모집부터 훈련까지 철저히 관리하지만 당시에는 대표팀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시합을 앞두고 선수들을 모집했다. 경평대항축구전 출전 선수들과 군대에서 뛰던 선수들이 합류를 해서 팀을 만들었다.
※경평대항축구전은 일제 강점기에 경성 축구단과 평양 축구단이 지역대항으로 개최했던 친선 축구경기다.
정식 훈련도 하기 힘들었고 심지어 장비는 사비로 준비했다. 당시 대표팀 나이대는 20~40대까지 합류했고 평균 연령이 30대였다. 광복 후 9년, 한국전쟁 정전 직후였던 1954년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대한민국이었다. 가장 가난한 나라의 선수들이 전쟁의 아픔과 식민지 역사를 겪고 난 후 일본에 맞서 일궈낸 값진 승리였다.
"우리 한국 응원단 앞에 서서 인사를 할 때 저절로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故 홍덕영(1954 스위스월드컵 국가대표 골키퍼) 1998년 인터뷰 中
처음 진출 월드컵에서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대한민국의 월드컵 도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54년 월드컵 예선 한일전에 출전한 선수들은 목숨을 걸겠다며 시합 전에 서명을 했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 월드컵 출전을 반대했다. 혹시 경기에 나갔다가 일본에 지면 상처가 된다는 것이었다. 광복된 지 얼마 안 됐고 전쟁이 막 끝난 상황에서 일본에게 지면 상처가 깊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월드컵 출전 허가를 하면 두 가지 조건을 내건다. 첫째는 일본에 반드시 이긴다,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현해탄은 한일 양국 사이를 건너가거나 건너온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현해탄은 대한해협을 지칭하는 용어이므로 대한해협으로 고쳐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했다는 객관적 기록은 없다. 현해탄 발언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라 축구협회장 장택산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런 말이 실제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그만큼 엄청난 각오로 한일전에 임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내건 두 번째 조건은 한국에서는 절대 시합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해방된 지 10년도 안된 1954년이었고 만약 홈경기를 하면 일본팀이 한국에 입국해야 한다. 한국에서 일장기가 게양되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어야 하는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선 두 경기를 일본에서 치러야 했다. 경기 결과는 라디오 지연 중계와 신문으로 접할 수 있었다.
이기고 돌아오는 한국 축구단
"극동지대의 패권을 장악한 우리 축구선수단 일행이
시민들의 열광과 환호 속에 3월 23일 아침 서울에 개선했습니다
경무대를 예방한 선수단 일행을 대통령 각하께서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시고 반가이 마지하여 선수들의 손을 잡아주시고
그들의 건투를 높이 찬양하셨습니다"
-TV 방송 中
원조 도쿄대첩이라 부르기도 한다. 월드컵 도전 첫 시도에 바로 본선에 진출했다.
1954년 6월 9일 스위스월드컵 축구국가대표 환송식이 열렸다. 한일전 대승으로 아시아 지역 예선을 통과했으므로 월드컵 본선을 치르기 위해 스위스로 떠났다.
1954년 스위스로 가려면 멀고 먼 길이었다. 축구협회의 미숙한 행정으로 비행기표 확보를 미리 하지 못했다.
그래서 급하게 일본으로 이동한다. 일본에서도 표를 구하지 못해 3일이나 지나 겨우 표를 구입했다. 하지만 좌석이 부족해 1,2진으로 찢어져 이동한다. 태국으로 가서 인도 콜카타로 가서 파키스탄 카라치로 가서 이탈리아 로마로 가서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했다.
스위스 월드컵 개막은 6월 16일이었다. 한국 첫 경기는 6월 17일이었다. 한국 축구단 1진은 6월 14일 도착한다.
'한국 선수들이 55시간에 걸친 긴 비행 끝에 도착'
-취리히 자이퉁 (1954.6.15)
우여곡절 끝에 한국선수단은 스위스에 도착했다. 한국의 월드컵 첫 상대는 헝가리였다. 당시 헝가리는 우승 후보였다.
2019년 12월 7일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과 번리 경기에서 손흥민 선수는 수비수 7명을 따돌리고 73m 질
주 원더골을 넣었다.
손흥민 선수가 2020년 12월 FIFA 푸스카스상을 수상했다. 푸스카스상은 성별, 나이, 국적을 떠나 한 해 동안 가장 뛰어난 골을 기록한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헝가리 '페렌츠 푸스카스' 선수의 이름을 딴 상이다. 당대 헝가리 최고의 공격수였다.
당시 헝가리 대표팀은 4년 동안 무패 기록을 자랑했던 강력한 팀이었다. 헝가리는 4년 동안 무려 30여 경기를 치렀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헝가리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서독이 이겼다. 서독이 헝가리에 승리한 것은 '베른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헝가리는 강팀이었다. 헝가리가 우승할 줄 알았는데 서독이 승리하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서독과의 예선전에서는 헝가리가 승리했었다. 그 정도로 헝가리는 당대 최고의 강팀이었다.
당시 헝가리팀에 페렌츠 푸스카스 선수가 있었고 한국 선수들과 경기를 했다. 힘들게 스위스까지 갔는데 한국팀은 헝가리를 만난 가혹한 운명이었다.
푸스카스의 별명은 '질주하는 소령'이었다. 푸스카스는 군인이었다. 당시 헝가리는 사회주의 국가여서 국가 체육으로 축구 발전을 지원했다. 헝가리의 전략은 좋은 선수들을 한 팀에 몰아넣는 것이었다. 헝가리팀은 일상적으로 호흡을 맞춰 조직력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대회를 앞두고 소집되었던 한국팀과 비교할 수 없는 조직력을 보유했다.
"17,000명의 관중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취리히 경기장에서 한국팀이 경기를 시작합니다
우상권이 뒤에 있는 수비수에게 공을 패스합니다"
-스위스방송 中
경기 이틀 전 밤에 현지에 도착했던 한국팀은 경기 초반 헝가리와 대등한 경기를 펼친다. 하지만 상대는 당대 최고의 헝가리에게 첫 골을 허용하며 급격히 기울어버렸다. 시차 적응할 새도 없이 경기에 뛰었던 한국 선수들은 근육 경련으로 쓰러지기 시작한다.
'지친 한국 선수들이 경기장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습니다
아무리 관중들이 격려의 응원을 보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스위스방송 中
"같은 시간에 세 사람이 지쳐서 주저 않아버렸어요
그만큼 수비하느라고 뛰어다녔다는 얘기지
(골키퍼인) 저도 얼마나 왔다 갔다 했으면 쥐가 났겠습니까?
-故 홍덕영 1954년 스위스월드컵 국가대표 골키퍼. 1998년 인터뷰
대한민국 0:9 헝가리, 한국의 완패였다. 하지만 현지 언론들은 완전히 일방적인 경기였지만 한국 선수들은 훌륭한 팀플레이를 많이 보여줬다-취리히 자이퉁 (1954.6.18)
월드컵역사에서 9점 차 패배는 3번 있었다.
1954년 헝가리, 한국 9:0
1974년 유고슬리비아, 자이르 9:0
1982년 헝가리, 엘살바도르 10:1
월드컵 사상 최다 점수차 패배, 한국 축구의 첫 월드컵 본선 경기는 막을 내렸다.
아무 기대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 선수단은 투지를 보여줬고 감동을 줬다. 최선을 다한 한국 선수단에 감동받은 사람들이 경기 종료 후 한국 선수단을 격려하고 선물을 건네기도 했다.
당시 골키퍼 홍덕영 선수 회고록에는 40여 번의 세이브를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축구의 기원
신라시대 화랑들은 축구를 즐겼다. 축구를 축국蹴鞠이라고 불렀다. 신라 화랑은 물론 23대 법흥왕도 축국을 한 기록이 존재한다. 축구공은 가죽에 동물 털을 넣거나 돼지나 소의 오줌퉁을 부풀려 공으로 활용했다.
삼국시대 축국은 오늘날의 축구와는 규칙이나 방식이 다르다.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계속 주고받기. 골대를 만들어 공을 넣기. 족구처럼 상대편으로 주고받기를 했다.
1882년 고종 19년 인천 제물포항에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호가 들어왔다. 군함 갑판에서 승무원들이 축구를 했다. 제물포를 떠나며 축구공을 두고 갔다. 이렇게 남기고 간 공을 찬 것이 한국 근대 축구의 시작이라는 설이 있다.
삼국시대에 축국을 했다는 기록은 확실한다. 그러나 삼국시대 축국은 현재의 축구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공을 차고 노는 행위는 다양한 국가와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규칙과 방식은 다양했다. 축구의 기원을 특정하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많다.
현대 축구는 잉글랜드에서 완성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은 분명하다. 축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어 삼국시대 축국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에서 유일하게 월드컵 본선 10회 연속 진출 기록을 가지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 총 (한국 포함) 6개 국가뿐이다. 6개 나라는 브라질, 독일, 스페인, 아르헨티나, 이탈리아, 한국이다. 한국을 제외한 5개국은 월드컵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는 나라다.
일본이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해는 1998년이다.
올림픽 축구사상 첫 매달을 기대하던 2012년 런던올림픽 남자축구 동메달 결정전(영국 카디프 2012년 8월 11일), 상대는 숙명의 라이벌 일본이었다. 당시 주장은 구자철선수였다. 올림픽 첫 출전 후 64년 만에 메달에 도전하는 한국대표팀을 이끌게 됐다. 전반 48분 박주영 선수의 선제골로 기선을 제압했다. 양쪽 선수는 결전을 벌였다. 후반 12분 구자철은 쐐기골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올림픽 축구에서 최초의 메달, 동메달이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 4강전에서 대한민국은 브라질에 0:3으로 졌다. 한국 대표팀은 최초로 올림픽 결승에 진출해 보자는 다짐을 했지만 결승의 문턱에서 브라질에 패해서 사기와 체력이 모두 저하되어 있었다.
로커룸에서 동메달 결정전으로 한일전 소식을 접한 선수들은 마음을 다 잡고 투지를 불태웠다.
3.4위 전은 영국 카디프에서 열려서 '카디프 대첩'이라 부를 만큼 통쾌한 한일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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