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월드컵 16강 도전의 여정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첫 본선 진출한 대한민국의 두 번째 월드컵 본선 진출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었다. 무려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었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 본선 진출국은 48개국이지만 당시에는 1986년 본선 진출국은 24개국이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후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참가 신청서를 깜빡해서 출전이 불가했다. 참가 신청서를 깜빡한 것을 스웨덴 월드컵 예선전이 한창 치러지고 있는 중에 알게 되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대한민국은 아무런 설명 없이 출전을 포기했다. 당시 아시아 축구 최강국이 북한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나섰다가 북한에 지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
북한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예선 시작전까지 29승 1패를 기록했다.
당시 분위기는 북한에 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60년대는 북한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북괴라고 부를 정도로 적대감이 강했던 시기였다.
대한민국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 북한에 패할 것을 의식해서 출전 의사를 번복했다. 결국 FIFA에 벌금 5천 달러를 납부해야 했다.
반면 북한은 아시아 축구 역사를 다시 썼다. 북한과 이탈리아 조별리그 3차전에서 전반 42분 북한은 선제골을 넣으면서 최종 스코어 1:0으로 우승후보 이탈리아를 탈락시킨다. 조 2위로 아시아 최초 월드컵 8강에 진출한다.
북한 월드컵 8강 진출 소식을 들은 박정희 정부는 국가기관 중앙정보부에서 축구팀을 창설한다.
당시 중앙정보부 부훈은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그래서 축구단 이름이 '양지축구단'이었다.
양지축구단(1967~1970)은 당시 중앙정보부 김형욱의 주도로 만들어진 축구팀이다.
이회택, 김호, 김정남, 이세연 등 당대 최고 실력을 자랑하는 선수들이 소속되어 최고의 지원을 받았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16강 이탈리아전 카드 섹션 문구 'AGAIN 1966"은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고 8강 진출을 상기시켰다.
1978년 남북은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맞붙었다. 결승전에서 만나서 연장전까지 갔는데 한국과 북한은 0:0이었다. 당시는 승부차기 제도 도입 전이어서 남북 공동 우승이었다. 1980년 9월 29일 다시 맞붙게 된다. 쿠웨이트 아시안컵 준결승전이었고 전반전 페널티 킥으로 북한은 선제골을 넣었다. 그리고 이어진 후반전에서 정해원의 동점골이 터졌다. 후반 44분 정해원의 역전 결승 골이 터졌다. 한국과 북한은 2:1로 사상 최초로 남북대결에서 한국이 승리했다.
60년대는 북한이 축구 강국이었고 1978년 아시안게임에서 남북이 공동우승했고 1980년대 한국이 역전승했다. 축구 실력은 남북 국력의 흐름과 비슷하다. 1960년대 한국보다 북한이 부유했다. 1965년 북한의 국민소득은 162달러 남한은 105달러였다. 1971년에는 북한은 395달러, 남한은 694달러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북한은 750달러, 남한은 1,592달러가 되었다. 남북 간 국력 차이는 남북 축구 대결 결과와 유사하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1974년 서독 월드컵,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1982년 스페인 월드컵까지 도전했지만 번번이 호주, 중동의 벽에 가로막혀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숙적 일본과 맞붙게 된다. 1954년 이후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에 도전한 한국은 아시아 최종예선 한일전 1차전(일본 도쿄 1985년 10월 26일)에서 중앙 수비수 정용환 선수가 전반 30분 일본의 골망을 흔들었다. 선제골로 기선을 제압한 대한민국은 이어서 이태호의 추가골로 최종 스코어 2:1로 원정경기에서 승리한다. 2차전 (서울 잠실 1985년 11월 3일)에서 허정무 선수는 결승골을 터트린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개막했다.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린 한국의 본선 첫 경기에 상점들도 문을 닫고 모두 모여 경기를 지켜봤다. 한국의 첫 상대는 아르헨티나(1986년 6월2일)로 전설적인 축구 선수 마라도나가 속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우승후보였다. 3:0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 28분에 터진 박창선의 골은 온 국민이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월드컵 본선 사상 첫 골이었다.
이어서 불가리아전에서 김종부선수, 이탈리아전에서 최순호, 허정무 선수가 골을 넣어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4골을 기록했다. 이탈리아전 최순호 1:1 동점골은 한국 월드컵 역사상 가장 멋진 골 중 하나였다. 영국 더타임스 선정 역대 월드컵 골 베스트 26위에 빛나는 최순호 선수의 골이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한국과 같은 조였던 아르헨티나가 우승했다.
1980년대 프로리그가 출범했고 그 바탕으로 많은 성과를 냈다.
유공 코끼리, 국민은행 까치, 대우 로얄즈, 할렐루야, 포항제철 돌핀스 축구단이 등장했다. 유공 축구단은 제주 유나이티드의 전신이다. 당시 할렐루야 축구단은 공을 넣으면 기도 세리머니를 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 시절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돌리기 위해 시행한 우민정책, 3S정책을 펼쳤다. 3S 중 하나가 스포츠였고 집중 지원했다.
32년만에 월드컵 본선에 다시 진출한 대한민국은 86년 멕시코 월드컵에 이어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94년 미국 월드컵, 98년 프랑스 월드컵에 모두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
2002년 일본과 공동으로 한일 월드컵이 공동 개최된다. 한국과 일본은 치열한 월드컵 경쟁을 펼쳤다. 한국은 1990년부터 월드컵 유치 의사를 밝혔다. 1994년에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유치위원회'를 출범하고 유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일본은 1989년부터 2002년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미 국가들의 지지를 많이 받아야 했다. 브라질 펠레 선수는 2002년 월드컵 개최지로 일본을 지지했다. 마라도나가 있는 아르헨티나는 브라질과 앙숙관계였고 한국을 지지했다. 아르헨티나의 도움을 받던 우루과이도 한국을 지지했다. 아르헨티나와 사이가 안 좋았던 칠레는 브라질을 지지하려고 일본을 지지한다.
개최국 지지를 두고 남미 국가 간 팽팽한 자존심 싸움이 벌어졌다.
아시아 6개국이 참가한 1994년 미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 북한과의 최종전을 앞두고 이미 자력에 의한 본선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한국 vs 이란 3:0 승리 한국 vs 이라크 2:2 무승부 한국 vs 사우디아라비아 1:1 무승부 한국 vs 일본 0:1 패배-자력 진출 불가 |
한국 대표팀이 본선에 진출할 한 가지 방법은 마지막 경기 북한과의 경기에서 두 골 차 이상 승리하고 일본이 이라크에 비기거나 져야 했다. 승부 조작을 막기 위해 동시에 치러진 두 경기,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한국은 북한과의 경기에서 경기 후반 연달아 3골을 몰아넣었다. 하지만 승리해도 본선 진출은 불확실했다. 북한에 3:0으로 승리했지만 기뻐할 수 없었다.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일본과 이라크가 2:2로 비긴 것이었다. 일본이 이라크에 이기고 있던 상황에서 경기 종료 10초를 남겨두고 이라크가 동점골이 터진 것이었다.
희비가 엇갈린 한국과 일본, 일본에서는 이 경기를 '도하의 비극'이라 부르고 한국에서는 '도하의 기적'이라 부른다. 도하의 기적으로 대한민국은 네 번째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었다. 3회 연속으로 월드컵 본선 진출을 한다. 반면 일본은 단 한 번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다.
동점골을 넣었던 이라크의 움란 자파르 선수는 1994년 1월 높아진 인기로 한국에 방한했다.
스포츠 명언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다"
"각본 없는 드라마다"
1994년 FIFA 부회장에 대한축구협회장 정몽준이 선출된다. 정몽준은 한 번도 월드컵 진출을 못한 일본이 월드컵 개최를 하는 게 맞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과열된 한 일 간 월드컵 유치 경쟁으로 1995년 아시아축구연맹 사무총장 피터 벨라판이 한일 공동 주최 중재안을 내놓았다. 이것을 한일이 받아들이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이 개최된다. 공동 개최 결정 당시 해결해야 했던 월드컵 문제가 있었다. 어느 나라를 앞에 두고 명칭을 만들 것인가였다. Korea Japan 한국을 앞에 쓰는 것으로 결정했다. 대신 월드컵 하이라이트 결승전은 일본에서 치르기로 한다.
조별리그 1차전 2002년 6월 4일 한국vs폴란드, 이을용의 센터링을 발리슛으로 연결 황선홍이 첫 골을 터트렸다. 유상철의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슛이 골망을 흔들었다. 폴란드에 2:0으로 승리했다. 48년이나 기다려온 월드컵 본선 첫 승리였다.
2002년 6월 14일 한국 vs 포르트갈, 유로 2000 4강에 막강한 상대 포르투갈을 상대로 이영표의 패스를 이어받은 박지성의 왼발 슛이 터졌다. 1:0으로 승리한 한국 사상 첫 월드컵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다. 대한민국은 곳곳이 축제의 장이 되었고 붉은 악마 유니폼을 입은 대한민국은 온통 붉은색이었다.
2002년 6월 18일 한국 vs 이탈리아, 한국을 이기는데 1 골이면 충분하다던 이탈리아에 전반 18분 이탈리아 비에리에게 선취골을 허용했다. 후반 43분 설기현의 기적 같은 동점골이 터졌고 기회가 찾아왔다. 원점으로 돌아간 승부로 연장전에 돌입했다. 117분간의 사투 끝에 안정환의 발 끝에서 터진 짜릿한 골든골로 최종 스코어 2:1로 대한민국이 승리했다. 대한민국은 월드컵 8강에 진출했다.
2002년 6월은 낮보다 밤이 뜨거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태극기를 들고 나와 노래를 부르고 환호하고 열강했다. 대한민국은 하나의 거대한 축제의 파티장이 되어 버렸다.
2002년 6월 22일 한국 vs 스페인, 양팀 모두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골은 터지지 않았다. 승부차기로 이어진 경기에서 극도의 긴장감 속 슈팅 성공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슈팅을 막아낸 거미손 이운재, 주장 홍명보의 마지막 한 골은 아시아 최초 대한민국 월드컵 4강 진출 골이 된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도로를 매웠다. 쏟아져 나온 인파에 차들이 멈춰버렸다. 급기야 흥분한 사람들이 남의 차 위로 올라갔다. 차 주인들도 같이 손을 내밀고 환호하고 있었다.
월드컵 신화를 이루고 난 뒤 한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 거스 히딩크는 인터뷰를 했다.
"나는 선수들과 매일 열심히 연습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지난 18개월 동안 한국 선수들의 경쟁역이 높아지도록 발전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선수들은 나의 지도를 잘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한국 국민들의 응원은 선수들의 플레이 방식 등 많은 것에 변화를 이끌어냈습니다
그 점에서 한국에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거스 히딩크 2002년 월드컵 한국 축구 국가 대표 감독 인터뷰 中
대한민국 4강 신화의 주역은 히딩크 감독이었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월드컵 이후에도 히딩크 신드롬은 계속 이어졌다.
히딩크 감독의 가상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희동구'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상암 희 씨의 시조 '희동구'로 부르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실제 당시 법무부 장관 지시로 히딩크 감독을 위해 명예 국민 제도가 만들어진다. 명예 국민이 되면 언제든지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하고 조건. 심사 없이 한국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다.
초창기 히딩크 감독은 오대빵, 오대영 감독이라고 불렀다. 월드컵 직전 평가전 연달아 5:0 대패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프랑스 출신의 트루시에 감독을 기용했다. 신임 초창기 두 감독은 대비를 이룬다. 히딩크의 한국 대표팀은 연이어 큰 점수차로 패배했고 트루시에 감독이 이끈 일본 대표팀은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컵 준우승을 한다. 한국과 일본은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고 한국 상황이 우려스럽기만 했다.
히딩크는 수직적인 서열문화를 타파했고 선후배 문화 개선을 위해 식사 순서. 자리 배치를 바꾸기도 했다.
히딩크 감독은 전문적.선진적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했고 수직적인 선후배 문화를 개선해야 된다는 목소리를 냈다. 수직적 문화를 없애고 철저한 능력 경쟁을 도입했다.
유럽 축구에 비해 기술이 떨어진다는 스스로 가졌던 편견을 지울 수 있는 객관적인 평가 시스템을 도입했고 이를 통해 선수들의 부족했던 체력을 강화시켰다.
불과 1년 전 5:0 패배를 안겼던 강호 프랑스와 대등한 경기를 펼치게 되었다. 더 이상 한국팀은 강팀을 만나 주눅 들지 않았다.
"한국팀은 더 이상 강팀을 만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불안에 떨거나
뒤로 숨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은 영원히 사라졌기를 바랍니다"
-거스 히딩크 2002년
히딩크 신드롬은 축구를 넘어 사회적 현상으로 번졌다. 히딩크에 대한 여러 책들이 출판됐고 히딩크가 미친 사회적, 경제적 영향 '히딩크 효과'를 연구하기도 했다. 히딩크식 리더십은 여러 기업에서도 벤치마킹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태극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태극기를 이용해서 두건을 만들고 옷을 만들어 입었다. 신성시되던 태극기를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빨간 티셔츠에 새겨져있는 문구는 'Be The Reds'이다. 이 뜻을 그대로 해석하면 위험한 뜻을 가진 문구가 되었다. 과거라면 오해받았을 상상하기 어려운 금기어가 사용되었다. 2002년 전에는 광장에 모이는 것은 궐기대회. 시위를 할 때였다. 축제나 응원을 위해서 광장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2002년 이후 광장이란 공간을 친숙하게 여기게 되었고 활용하는 광장 문화가 시작되었다.
2002년은 한국 축구의 역사를 새로 쓴 시기가 된다. 그 시기에 유럽리그에서 활약했던 선수는 안정환 선수 뿐이었다. 2002년을 계기로 이영표, 박지성, 기성용, 구자철, 이청용, 지동원, 손흥민, 황의찬, 김민재, 이강인 등 계속해서 세계 무대에 진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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