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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3대 왕 태종 이방원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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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3대 왕 태종 이방원

태종은 조선의 3대왕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왕권을 확실하게 강화한 왕이다. 조선 제3대 왕, 태종(1367~1422)의 재위기간은 1400~1418년이었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활동할 때 1367년에 함흥부 귀주에서 출생했다. 고려시대에는 동시에 두 명의 부인을 두는 사례가 많았다. 그래서 시골에 둔 부인을 향처라고 했고 서울에 둔 부인을 경처라고 했다. 방원의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는 향처였고 신덕왕후 강씨는 경처라고 했다. 조선시대 개념으로 정비, 계비가 된다. 

 

 

태종이 되는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도 문과적인 자질도 있었다.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무과에도 탁월해서 태종 이방원은 문무를 겸비했다. 

1382년에 진사과에 합격을 하고 1383년에는 문과에 급제한다. 고려 시대에는 과거 제도가 있었고 생원이나 진사가 되면 대과인 문과에 진출할 수 있었다. 고려 시대에도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관문이었다. 

이방원은 문과적인 재질과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이방원은 고려 말 새로운 왕조 건국에 가장 방해가 되는 인물이었던 신흥 사대부 핵심  정몽주를 개성의 선죽교 부근에서 부하들을 시켜서 살해하면서 본격적으로 활약한다. 

정몽주(1337~1392)는 고려를 대표하는 충신이자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유학자이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자 아버지 태조는 분노하였고 괘씸죄로 이방원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버지 이성계 생각은 정도전과 정몽주를 새로운 왕조에 함께 갈 인물로 판단을 했는데 아들이 허락도 없이 단독으로 살해해 버렸다. 이방원은 조선이 건국되기까지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이성계의 눈에 들었던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정도전(1342~1398)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유학자이며 조선 건국을 이끈 일등 공신이다. 

조선 건국직후에는 정도전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이방원은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히 정도전이 주도했던 사병 혁파, 왕자들이 보유하고 있던 군사력을 혁파하는 과정에서 태종이 절치부심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중요한 명분이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태조 이성계의 후계자 , 세자 책봉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는데 예상을 깨고 막내 방석의 세자 책봉이 단행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신덕왕후 강씨는 그때까지 살아있었고 신의왕후 한씨는 돌아가신 상태에서 왕비 입장에서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신덕왕후는 자신의 막내아들 방석을 확실하게 밀었고 이성계는 받아들인다. 

 

 

또한 정도전이 방석의 세자 책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도전은 조선은 왕보다 신하, 재상 중심으로 권력이 운영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은 세습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보완하기 위해서는 가장 능력있는 나라의 재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방석의 세자 책봉을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이방원은 마음속으로 칼을 갈고 있었다. 기회를 엿보다가 1398년 거사를 일으킨다. 이때는 신덕왕후 강씨가 사망한 상황이었고 이성계도 병석에 누워있었다. 정도전이 친구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 마시고 있었는데 정도전을 습격을 해서 완전히 제거한다. 방석을 유배 보냈다가 처형한다. 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1차 왕자의 난(1398)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이다.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은 바로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실질적으로 적장자인 두 번째 형, 정종을 잠깐 왕으로 올리는 조치를 단행한다. 

정도전을 제거한 후에는 정도전 집을 몰수해서 사복시로 삼는다.

사복시司僕時는 궁중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보통 집을 몰수해서 짐승을 기른다는 것은 큰 모욕이다. 정도전 집터는 사복시를 거쳐 훗날 종로구청이 들어선다. 형 정종이 왕이 된 후에 이방원이 실질적인 권력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이방원은 결국 형님의 양보를 받는 방식으로 1400년에 조선 3대 왕, 태종으로 즉위한다. 

 

이때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가장 분노했던 인물은 병석에 누워있던 아버지 이성계였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면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이라고 호칭한다. 

두 사람의 갈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자성어가 있다. 함흥차사. 원래 '차사'는 '사신으로 뽑히다'라는 뜻이다.

태종이 왕이 된 후에 태조가 화가 나서 고향 함흥으로 가버렸다. 유교 국가에서 제일 중요한 충忠과 효孝다. 그래서 태종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를 모시러 가면 태조가 화가 나서 사신들을 족족 죽여버린다. 그렇게 해서 돌아오지 않는 사신, 함흥차사라는 말이 나온다. 결국 태조 이성계가 설득이 되어 돌아온다. 

 

정종이 잠깐 왕이 되었다가 태종이 왕이 되어야 겠다고 확실하게  결정한 사건이 있다. 

1398년 방석과 정도전을 제거한 1차 왕자의 난에 이어 1400년에는 네 번째 형 방간이 방원에게 대들었다가 완전히 박살이 나는 사건이 2차 왕자의 난이다. 이때 방원은 자신이 정면에 나서기로 결정하게 된다.

 

태종이 왕이 된 후 강력한 왕권 수립에 중점을 두었다. 정종은 개성으로 도읍지를 옮겼었다. 태종은 즉위한 후 다시 새로운 왕조의 수도는 한양으로 옮기는 것이 맞다고 판단하여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한다. 

수도 천도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새로운 수도 후보지는 개경, 무악, 한양이었다. 종묘에 가서 척전擲錢, 동전을 던져서 점을 봤다. 개경과 무학의 점괘는 이흉일길(二凶一吉), 동전 세 개를 던졌는 데 하나를 길하고 두 개는 흉하였다.  반면에 한양의 점괘는 이길일흉(二吉一凶)두 개는 길하고 하나는 흉하였다. 따라서 한양이 제일 좋다고 해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한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에는 새로운 궁궐을 완성한다. 태종은 경복궁을 좋아 하지 않았다. 경복궁은 왕자의 난이 일어난 곳이며 남북으로 긴 궁궐이었고 창덕궁은 동서로 긴 궁궐이면서 후원영역이 잘 발달되어 있다. 창덕궁은 경복궁이 이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이 한양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면서 새롭게 완성한 궁궐이다. 조선 후기에 정궁 역할을 했고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어서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는 유일하게 조선의 궁궐 중에 창덕궁이 지정되었다.

 

태종이 도읍을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 했는데 한양도성을 쌓으면 국방이나 도성민들을 관리하는 데에 유리하지만 비가 오면 산에서 흘러내려온 물에 계속 홍수가 났다. 그래서 대책으로 1406년 청계천을 조성했다.

처음에는 다리를 흙으로 만들었다. 비가 많이 와서 흙으로 만든 다리가 휩쓸려서 유실된다.

 

 

태종은 청계천 다리를 튼튼하게 만들려면 돌다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광통교를 돌다리로 만들면서 돌은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태종의 계모)의 무덤에 있는 돌을 가져와서 석축에 활용한다.

2002년 청계천 복원을 하며서 현장이 드러났다. 600년 전 신덕왕후와 태종의 갈등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 드러났다고 해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태종은 경복궁 안에 경회루慶會樓를 처음 조성한다. 경복궁의 설계자는 정도전이었다. 태종은 뭔가 마음에 안 들었고 특히 제일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이 왕과 신하가 함께 모이는 공간이 없는 것이었다. 

경(경사 경慶) 회(모일 회會) 루(누각 루樓)는 경사스럽게 모이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경회루는 왕권을 과시할 수 있는 곳이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 태종이 했던 대표적인 정책은 호패법이다. 지금의 주민등록증과 같다.

호패법은 조선 시대 신분증명서인 호패를 반드시 지니고 다니도록 한 법이다. 

6조 직계제를 만든다. 6조 직계제는 조선 시대 6조의 판서가 나랏일을 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한 제도이다. 

6조의 판서들에게 직접 명령해서 바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게 했다.

 

태종은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했을 때 분노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었으므로 왕자들의 사병 보유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병 혁파를 실시한다. 또한 왕권이 안정시키기 위해서 외척을 제거한다. 왕실의 외척이 권력을 잡으면 안 된다는 신념 속에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를 유배 보냈다가 처형시킨다. 조선시대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들이 다 제거된다. 

 

이런 여러 가지 왕권 강화 정책을 써서 기틀을 안정 시킨 후에  태종은 후계자 지명에도 신경을 쓴다. 태종부터 본격적으로 적장자가 후계자가 되게 하기 위해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이 열한 살 되던 해에 세자로 책봉한다. 후계자 수업을 확실하게 받게 하기 위해 최고의 스승을 붙여주고 시설도 갖춰준다.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부터 수업에 빠지고 매사냥을 하러 돌아다니고 하면서 문제를 일으킨다. 도저히 후계자로 안 되겠다 판단한 태종은 세자를 교체한다. 세 번째 아들 충녕대군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택현擇賢, 현명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장자 상속이 원칙이기는 하지만 현명한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는 논리로 양녕대군을 폐하고 충녕대군(세종대왕)을 후계자로 삼았다. 

이러한 태종의 결단으로 세종대왕이 탄생한것이다.

 

양녕대군은 경기도 쪽으로 추방된다. 동작나루를 건너서 관악산 쪽으로 들어가면서 현재의 서초구 방배동쯤에서 '다시는 서울에 안 온다' 하면서 양녕대군이 등을 돌렸던 곳으로 방배方背동 이름이 생겨났다. 

 

 

태종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왕권을 행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혹시라도 자신이 죽어버리면 또 다른 정치적 변수가 발생할 우려도 있어서 살아생전에 스스로 상왕으로 자리 잡고 세종에게 1418년 8월 세자를 책봉한 지 두 달 만에 왕위를 물려준다. 그래서 경복궁 근정전에서 거행되었던 세종의 즉위식은 조선 왕실의 즉위식 중에서는 가장 경축적인 행사였다. 대부분 조선왕의 즉위식은 상당히 슬픈 행사였다. 장례식이 많았고 장례식에서 왕이 잠깐 즉위식을 하는 상황이었다. 세종의 즉위식은 경축할 만한 즉위식이어서 실록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재연 행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난 후에 태종은 상왕으로 있으면서 대마도 정벌을 지휘하기도 했고 세종의 장인이자 자신의 사돈인 심온을 처형함으로써 왕권이 자리 잡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태종은 조선의 기틀을 잡은 왕이었다. 태종은 사냥을 좋아했다. 태종이 어느날 말을 타고 노루사냥을 갔다가 실수를 해서 말에서 떨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사관들이 있어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한다. 태종이 신경이 쓰여 적지 말라고 했다. 태종이 이렇게 말했다고 사관이 모두 기록했다. 태종의 인간적인 면이 보이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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