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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이승만 정부 탄생

by 소시민스토리 2024.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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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 탄생 

미군의 한국 도착 다음날 1945년 9월 9일부터 38선 이남에서 본격적인 미군정 통치가 시작되었다.

미美군정 최고사령관 하지 중장은 미국에 우호적인 한국정부를 세우기 위해 한국정치인들과 다양하게 접촉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백범 김구, 미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승만, 해방직후 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도좌파의 여운형,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하고 좌우 합작 운동에 힘쓴 김규식은 대한민국 정부탄생까지 이들 사이에서 치열한 정치드라마가 펼쳐졌다.

 

 

해방직후 좌파 세력이 우세했다. 미국의 판단은 이런 분위기를 바꾸면서 미군정 지지와 대중 설득을 위해 이승만을 지지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랫동안 있었고 미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친미성향이었다. 맥아더 장군과 반공주의를 공감해서 지지를 받았다. 미국의 이승만 지지 배경이 된다. 

조선인민공화국은 해방 직후 여운형이 주도로 수립했다. 2/3가 좌익 인사들이었다. 좌파성향의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을 이승만에게 제의했다.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좌익에서도 신망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후손이어서 조선왕조의 후계자라는 점도 부각이 되었다. 

 

미군정은 이승만이 이런 사상과 활동들이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국빈급 대우를 한다. 미군정은 이승만에게 입국했을 때 특급호텔 숙소를 제공한다. 거액의 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지원했다. 다른 조직에는 10만원, 20만 원 정도를 지급했는데 이승만에게는 천만 원을 지급했다. 김구의 정치자금은 中 장제스가 지원한 정치자금을 미군정의 협조 부족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승만을 계속 지지하지는 않았다. 미군정의 기대와 달리 美에 완벽히 협조하지 않았다. 

한국 통일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의결. 모스크바 3상회의(1945년 12월) 이후에 김구와 더불어 이승만은 반탁운동을 지지한다. 당시 미국의 한반도 계획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해서 소련과의 협의를 통해 임시 통일정부를 구성하려고 했다. 이승만 박사는 소련과 절대 안 하겠다고 했다. 미국 국무성과 미군정이 추진하는 정책에 이승만은 방해물이 되어 버렸다. 

 

해방 직후 당시 상황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미국은 연합국이었다. 미국은 소련과 협의를 통해서 한반도에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이 목표였다.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의원회 중 남쪽 지방 순회를 시작한다. 다른 정치 지도자들은 근대 정치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승만은 미국에 오래 있었고 미국 경험으로 선거와 유권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방 유권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좌파 조직이 많던 지방을 방문함으로써 우파 지지세력을 확대했다. 

 

이승만의 지방 순회는 지역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제1차 미소공위 (1946.3~1946.4) 서울에서 좌우합작 정부 논의 중 (4월 17일 천안, 18일 대전, 21일 옥구 22일 옥천. 김천, 25일 영천, 26일 경주, 27일 울산, 29일 부산, 30일 동래), (5월 1일 진해, 3일 진주, 4일 하동, 5일 순천, 6일 보성. 장흥, 8일 목포, 9일 광주), (6월 3일 정읍, 4일 전주, 5일 이리, 6일 군산, 9일 장호원)으로 순회 연설을 했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는 전부 체포하라"

-1946.5.8 목포 발언 中

 

미국과 소련은 조속히 합의하고 한반도에서 철수를 원했다. 이승만은 미국 입장에서 방해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소련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었던 미국으로서는 이승만의 반공.반소 행보가 불편했다.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위가 무기한 휴회를 했다. 한달 후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논란이 된다. 

"무기 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야..."

-이승만의 정읍 발언 中

 

남한 단독 발언에 대해  이승만이 제 정신이 아니며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도록 해준 적도 있었고 이승만은 군정에서 쓸모 있는 역할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함으로써 파멸로 이끌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고 하지 사령관은 로버트 올리버에게 말을 했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승만의 정치고문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연설문을 영어로 고쳐주었다. 

 

'하지 장군은 어떤 정신병 의사로 하여금 이 박사와 다소 은밀하게 면담을 가지도록 일을 진행시킨 바 있다'

-<이승만 비록>. 로버트 T. 올리버 

 

이승만이 극단적, 극우적으로 방공을 외치고 다니자 하지 사령관은 이승만과 함께 할 수 없다는 발언을 했다. 

이승만의 반소. 반공을 거부한 이유는 미소공위 결과로 통일 임시정부 수립 시 주도권 상실을 우려했고 미.소 협력이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승만이 외친 캐치프레이즈였다. 이승만이 귀국한 직후에 한 말이다. 해방 직후 중요한 의제는 일제 식민 잔재 청산과 친일파 척결이었다. 거기에 집중하고 있는 와중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정치 캐치프레이즈를 던지면서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서구 민주주의를 체험했다. 민심을 잡으려면 정치적 수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1919년 한성 임시정부에서는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이승만은 외국에 공무. 편지를 보낼 때는 자신의 이름으로 대통령 직함을 써서 보냈다. 

 

임시정부 측에서 대통령 직함을 고치라고 하면 보냈는데 어쩔수 없다고 하기도 하면서 대통령 직함 사용으로 임시정부와 갈등한다. 

이승만박사가 한국으로 귀국을 할 때 도쿄를 거치면서 들어온다.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을 만나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이 前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라고 소개한다. 

안창호는 화가 나서 편지를 보냈다.

 

"그 어느 정부에서도 당신은 대통령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은 정부의 집정관 총재 직함뿐입니다

헌법 개정 없이 계속 대통령 행세를 한다면 

이는 분명히 헌법 위반"

-안창호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中

 

이승만은 여기에 편지를 보냈다.

 

"집정관 총재란 

대통령의 다른 명칭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고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 나의 대통령 명의를 

바꿀 수 없습니다"

-이승만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中

1919년 9월 임시정부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1925년 이승만은 탄핵당했다. 

 

소련과의 협의를 중시한 미국은 이승만 카드를 포기한다. 소련도 받아들일 수 있는 지도자 김규식과 여운형을 염두에 두기 시작한다. 김구는 반공, 반탁운동을 강하게 해서 미군정은 배제한다. 

1946년 6월 20일 하지 사령관은 김구와 이승만을 불러서 2선 후퇴를 제안하고 김규식 지원을 요청한다.

이승만은 정치 위기를 느끼고 2선 후퇴를 제안한 미군정 문제 해결을 위해 위싱턴 D.C로 날아간다. 

미국 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기 위해서 갔으며 미 권력의 핵심 워싱턴 D.C를 공략하러 갔다. 

이승만은 미국에 가서 하지 사령관은 공산주의자에 친화적인 사람이라고 몰아세운다. 미정부는 이승만의 反 하지 주장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박용만 모함 사건(1918년)은 이승만이 미 당국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인 일 군함을 폭파시키려 한다고 박용만을 모함한 사건이다. 당시 이승만과 박용만은 하와이 독립운동 단체 재정 문제로 갈등 중이었다. 

 

이런 와중에 국제 정세가 변한다. 당시 그리스 내전 중이었는데 미.영 지원 그리스 정부군과 소련지원 그리스 反 정부군이 내전을 벌이게 된다. 지중해에 있는 그리스가 소련에 영향으로 서유럽의 공산주의 확산을 우려한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1947.3)을 발표한다.

트르먼 독트린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그리스.튀르키예를 지원한 미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이다. 

본격적으로 미.소냉전 시기가 시작된다. 

 

미군은 남조선에 대규모 원조 6억 불을 제공하겠다는 정책(1947년 3월)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승만이 미국 가서 설득해서 성사된 것으로 가짜뉴스가 퍼졌다. 6억 불 정도의 원조는 제공되지 않았다.

원조를 성사시켰으므로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할 것이라는 가짜 뉴스가 퍼졌다. 

1947년 4월 21일 이승만은 미국에서 귀국했고 지지자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이승만이 지방행, 미국행으로 분주했던 그 빈자리를 김구가 채우고 있었다. 한때 이승만과 김구는 정치적으로 반탁.반공으로 협력했다. 1947년 말 이후에는 단독선거 찬반 여부로 결별했다. 

미군은 이승만을 절대 반대했다. 이승만이 한국 지도자가 될 경우 미국에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다. 

하지 사령관과 이승만 관계는 악화됐다. 하지 사령관은 배신을 당했다며 크게 분노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미군정은 김규식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여운형을 김규식 지원으로 내세워 통일 임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군정은 좌파 성향의 여운형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여운형의 친일 경력 여부를 밝히기 위해서 해방 직후 은밀하게 조사한다. 일본에 요원들을 파견해서 조선 총독부 일본인 전 관료들을 조사했다. 여운형은 친일 행위자가 아니라 애국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여운형을 제거하기보다는 포섭해서 조선공산당과 단절을 유도한다. 박헌영 중심 조선공산당과 단절을 시키고 좌우합작으로 데려와서 정치적 리더십이 약해 보이는 김규식이 박헌영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게 한다는 정책을 마련한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1945년 5월~10월까지 열린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여운형이 탄 차가 지날갈 쯤 갑자기 차량 한 대가 가로막는다. 괴한이 쏜 총에 심장과 복부를 피격당하여 여운형은 사망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통일 임시정부를 향한 좌우합작위원회는 흔들렸다. 

좌우합작의 핵심 인물이며 미군정의 유력 파트녀였던 여운형의 죽음이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반대하는 세력들로 부터 암살 위협을 많이 받았었다. 12번이나 테러 위협을 겪었는데 마지막 12번째 테러에 암살당했다. 범인은 극우파 청년 한지근이 지목되었다. 암살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었다.

 

여운형의 죽음으로 통일 한국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통일 임시정부 구성에는 미.소 모두 찬성하는 지도자가 필수였다. 

미군정은 서재필박사를 염두해 둔다. 재미 독립운동가였고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설립했다. 

하지만 미국에 있었고 당시 84세의 고령이었으며 오랜 미국 생활로 국내 정보와 기반이 부족했다. 

 

장덕수는 한국민주당의 정치부장을 역임한 최고의 전략가였다. 일제 강점기 좌파. 우파 활동을 했었고 머리가 명석하고 친일의 경력도 있었다. 와세다 대학을 졸업했고 미국 콜롬비아대 박사학위가 있었고 인맥도 넓었다. 

미군정이 구상한 헌법 초안은 의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었다. 내각제 총리로 장덕수를 세우고 의회에서 선출할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실권 없는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미군정의 구상이었다. 미군정은 실권을 한국민주당에 주려했다.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한국민주당은 제2차 미소공위 당시 반탁 진영에서 이탈했다. 제1차 미소공위 당시 김구.이승만의 반탁 진영에 참여했다가 제2차 미소공위에서 장덕수는 미군정 협조를 선택했다. 미군정에게 협조하는 장덕수에게 실권을 주고 인기 지도자에게는 명목상의 권력을 주기로 한다. 여운형이 암살되고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미군정이 생각했던 하나의 시나리오였다. 

 

 

1947년 12월 2일 한국 민주당 정책부장 장덕수는 자택에서 암살당했다.UN한국임시위원단 입국 한 달 전의 암살사건이었다. 암살범은 현직 경찰이었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 김구 암살 배후설이 보도되었다. 1948년 장덕수 암살범 재판에 증인으로 김구는 출두한다. 김구에게 트루먼 대통령이 법정 출석 요구서를 보냈다. 김구는 당시 아무런 직위가 없었다. 그런데 미 대통령이 김구에게 법정 출석 요구서를 보낸 것은 정치공작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난 후 한반도 문제는 UN에 이관되고 UN의 한국 총선거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북측은 거부한다. 남쪽에서만 선거를 하게 되는데 김구는 반대를 했다. 미군정은 김구의 단독 선거 반대가 부담이 되었다.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김구를 음해하려는 미국의 정치공작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김구는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정치적 타격을 받는다. 

 

1948년 2월 22일 하지 사령관의 초청으로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모였다. 

김구, 김규식은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했다. 김규식은 단독선거를 진행하면 "역사는 우리를 역적으로 규탄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승만은 "내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테니 염려 말라"라고 하며 남한 단독 선거를 찬성한다.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에서 첫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태극기가 곳곳에 개양됐고 투표를 하기 위한 유권자들의 행렬이 새벽부터 이어졌다. 오랜 역사의 왕정과 일제 강점기를 지나 민주공화국을 향해 내딛는 첫 도약이며 남북분단이 더욱 공고해지는 순간이었다. 

 

투표율은 95.5%였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 비밀선거였다. 만 21세 이상의 모든 국민이 선거에 참여했다. 특히 여성 참정권이 실현되었다. 

여성 참정권은 프랑스는 1944년, 이탈리아는 1945년, 스위스는 1971년에 주어졌다.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국가는 뉴질랜드이며 1893년이었다.

 

선거 전날, 술 판매가 금지되었다. 현재 선거 전 술 판매 금지 국가는 필리핀, 멕시코, 태국이다. 

1948년, 1950년 선거의 특징은 무소속 비율이 높았다. 제헌국회 선거에서 무소속 당선자가 전체 당선자의 42.5%였다. 두번째 선거에서는 무소속 당선자 비율이 더 높아진다. 정당보다는 협회. 사회단체 위주의 선거 참여가 많았다. 정당 시스템이 아직까지 확립이 되지 못했다. 

 

 

 

첫 선거 이승만이 출마한 지역구는 서울시 동대문구 갑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경쟁자는 없었고 무투표 당선된다. 최능진은 독립운동가이며 해방 직후 경찰로 복무하며 친일 경찰을 고발했다. 

최능진은 이승만과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려고 했지만 후보 등록이 무산됐다. 누군가 등록을 막아서 나가지 못했다. 극우단체의 방해를 뚫고 후보 등록을 했으나 결국 후보 등록 취소를 당했다. 

이승만은 포스터에 '국부'라는 명칭을 넣었고 스스로 국부라고 칭했다. 

 

 

5.10선거로 제헌국회가 탄생했다. 제헌국회는 헌법을 제정한 국회라는 뜻이다. 제헌헌법에는 공공성을 강조했다. 

'중요한 운수, 통신...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제헌헌법 제87조 

 

제헌헌법에는 이익균점권이 명시되어 있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 있어서는 근로자는 ...이익의 분배를 균점할 권리가 있다'

-제헌헌법 제 18조 제2항

지금보다 공공성의 원리가 제헌헌법에 훨씬 강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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