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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4.19 혁명과 이승만대통령 하야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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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과 이승만대통령 하야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한 소년의 주검이 떠올랐다. 시신은 발견되자마자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마산시민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저지하는 경찰을 제치고 시신을 보러 나온 사람들은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얼굴에 수류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에 소년, 마산상고 입학을 앞둔 예비 신입생 17세 김주열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민 혁명이라 불리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사건이었다. 얼굴에 최루탄이 박혀있었는데 일반적으로 경찰이 쓰는 최루탄은 아니었고 군대가 전투상황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투용 최루탄이다. 프로펠러가 달려 있어 날아가서 벽을 뚫고 들어가서 적을 제압하는 데 사용한다.  경찰들이 군사용 최루탄을 일반 시민들의 시위를 진압하는 데 사용했다. 김주열 열사의 눈을 뚫고 들어가서 얼굴에 박혀서 사망했다. 

 

"김군의 눈에 포탄이 박혀 있던 이유가 해명이 되지 않아서 수사의 초점이 여기에 집중될 것이다.

부검한 의사들도 발사에 의해 박힌 것인지 인위적으로 사람이 박은 것인지 아는 바가 없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16일>

 

 

시위 과정에서 경찰이 전투용 최루탄을 투하했고 무차별 총격을 했다. 3.15 마산 시위에서 8명이 사망했다. 시위현장을 수습하던 경찰들이 김주열 시신을 발견하였다. 너무나 참혹한 모습이어서 공개를 하면 더 큰 시민들의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한 경찰은 노끈으로 시신을 묶고 6개의 돌을 달아서 바다에 빠트려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는 엄청난 부정선거로 치러졌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나와서 항의를 한다. 김주열도 나와서 시위를 벌였다. 

 

김주열은 마산에서 자란 학생은 아니었고 전라북도 남원 출신으로 당시 마산상고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문 고등학교여서 진학을 위해 외갓집이 있는 경상도 마산으로 와서 이미 시험을 치렀고 합격자 발표가 3월 16일 날 예정되어 있었다. 합격자 발표를 하루 앞둔 상태에서 시위에 동참했다. 3월 15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됐고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것은 4월 11일이었다. 실종에서 발견까지 27일이 걸렸다. 

 

김주열이 실종이 되자 남원에서 어머니가 마산으로 올라와 아들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마산 사람들이 김주열 이름을 모두 가 알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들을 애타게 찾아 헤맸다. 시민들이 같이 동참해서 저수지에서 물을 뺀다든지 하면서 김주열을 찾는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시신을 연못에 버렸다는 제보가 이어지자 마산 시민들이 연못의 물을 포두 퍼냈다. 어머니는 아들을 찾기 위해 영안실을 다 뒤졌다. 4월 11일 결국 포기하고 돌아갔다. 4월 11일 오전 남원으로 돌아갔다. 3시간 뒤 아들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르게 된다. 

 

김주열이 시위에 나가려고 하자 외할머니가 못 나가게 한다. 할머니를 속이고 몰래 나가기 위해서 교복을 벗어놓고 하얀 셔츠를 입고 나갔다. 밤에는 하얀색 옷이 눈에 훨씬 잘 띈다. 다른 학생들은 까만색 교복을 입었는데 김주열은 흰색 옷을 입어서 경찰 눈에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참혹한 사진을 본 마산 시민들은 독재와 폭력적인 진압에 대한 저항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김주열 시신 사진을 찍은 사람은 부산일보 故 허종 기자의 특종이었다. 우연한 제보로 경찰보다 한 발 앞서서 현장에 도착해 찍은 사진이었다. 

 

 

우리 역사 속 1960년 3월 15일은 희대의 부정선거가 있었던 날이다.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자유당 이승만 후보가 단독 후보였고 부통령은 자유당 이기붕과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경합이었다.

 

 

3.15 부정선거에서는 <4할 사전 투표>가 이루어졌다. 동네에 살지 않는 사람, 살다가 이사 간 사람, 살았는데 이미 죽은 사람, 허위의 인물들을 다 기재해서 그 사람들 명의로 투표를 해서 투표함에 넣어둔 것으로 40%를 차지했다.

4할 투표는 유권자의 40%가 이미 기표한 투표용지를 미리 넣어둔 부정행위다. 

3.15 부정선거는 <3.5.9인조 공개 투표>였다. 정치 깡패를 동원해서 협박하고 회유해서 자유당을 안 찍으면 큰일 난다고 이야기한다. 투표소 자체를 자유당과 깡패가 장악했다. 투표소에서 야당 참관인을 쫓아내고 공개적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투표에 자유당 후보를 찍었는지 확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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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때 투개표 부정이 여러 선거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 

개표 시에도 부정을 저질렀다. 표를 개표하면서 자유당 후보 표가 아닌 야권 후보 찬성표에는 인주를 여러 군데 일부러 뭍여서 무효표를 만들었다. 피아노표라 불렀다.

피아노표는 개표 도중 손가락에 인주를 묻힌 뒤 반대표에 마치 피아노를 연주하듯 문질러 무효표를 만든 것을 말한다.

쌍가락지표는 반대표에 표시를 하나 더 해서 무효표로 만든 것을 말한다. 

샌드위치표는 야당 표 뭉치 위아래 여당 표를 한 장씩 끼워 모두 여당 표인 것처럼 만든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붕 찬성표가 부족하다면 개표를 하다가 힘든 개표 요원들을 위해서 닭죽에 수면제를 타서 준다. 닭죽 먹은 개표 요원들이 잠이 들면 이기붕 표를 더 만들었다. 

 

 

3.15 선거는 이승만 단독 출마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이승만 대통령 득표율은 100%였다. 대통령은 86%, 이기붕 부통령은 74% 투표율로 당선되었다. 투표함을 열었을 때 이승만, 이기붕 표가 쏟아져 나왔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유권자 명부까지 조작해서 투표를 하다 보니 실제 살고 있는 유권자보다 표가 초과되기도 했다. 결국 숫자를 다시 고쳐서 결과를 조작해서 투표율로 발표했다.

 

4.19 이후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공판에서 치안국장 이강학의 진술에 따르면 감표 지시를 받고 난 다음에 "이 사람들 참 우습다, 역사상으로 봤을 때 표를 늘리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줄이라는 이야기는 처음이다"이러면서 그 지시를 따랐다고 진술했다. 

 

 

선거 전 한 달 전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수술 받고 사망했다. 이승만후보가 단독 후보가 됐다.

당시 법에 따르면 단독 출마 시에 유권자의 1/3이상만 투표를 하면 당선으로 인정됐었다. 

 

"대통령. 부통령선거법 제12조(1952년 7월 18일 제정)

대통령 또는 부통령의 후보자가 1인인 경우 득표율이 총선거인의 1/3 이상에 달하도록 한다."

 

당시 이승만의 나이는 86세였다. 1960년 남성 평균 수명은 통계청에 따르면 51세였다. 86세의 대통령은 임기 중 사망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이 사망하면 부통령이 대신하게 된다. 만약 부통령을 야당에게 뺏기면 이승만 대통령이 죽는 순간 정권이 교체되는 것이다.  자유당 입장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 자유당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결국 이 선거에 모든 것을 걸었다. 특히 부통령 선거에 사활을 건 3.15 부정선거였다. 

 

"헌법 제55조(1954년 11월 27일 개정)

대통령이 궐위된 때에는 

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잔임기간 중 재임한다."

 

당시 이기붕 부통령 후보는 여러가지로 인기가 하락세였다. 본인도 건강 악화로 선거운동이 쉽지 않았다. 

이승만대통령은 2인자를 키우지 않는다. 일인자로서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하게 구축한 사람이고 이인자들이 자신에게 협력을 해도 어느 순간 자기 권한을 넘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기붕이 이승만 곁에 계속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야심이 적고 온순했기 때문이다. 

 

김주열은 예비 고등학생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은 사회의 영향력과 자부심, 책임감이 지금과는 달랐다.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결혼을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지금과는 위상이 달랐다. 

당시 학생들은 정치적으로 익숙하게 동원되고 정치적인 현장에 나섰던 그런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다. 학도호국단이라는 조직이 국가로부터 수직적으로 학교에 만들어졌고 학생회를 대체하면서 학생들을 군사적으로 훈련하고 동원하고 반공 이념을 주입하면서 거기에 맞춰서 학생들이 움직이도록 한다. 원하든 원치 안 든 정치적으로 민감한 성장 과정을 거치게 된다.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은 국가가 학생들을 직접 통제하기 위해 1949년 창설한 학생조직이다. 이승만 정권은 학도호국단을 통해 군대식 집단 훈련과 반공 교육을 주입한다.

학생들이 관제데모에 차출되면 출석 체크를 해서 불참을 할 수 없었다.  관제데모를 통해 익힌 시위 경험으로 거리에 나가는 시위를 하는 것이 익숙했다. 

 

 

학생 시위 중 가장 먼저 일어난 시위은 1960년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이다. 

2.28 대구 학생 시위는 3.15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의거이다.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학생들을 학교에 나오게 했다. 시험을 보겠다, 영화를 보여주겠다, 등으로 학교에 나오게 한다. 하지만 학생들은 속내를 알고 있었다. 2월 28일 민주당 후보 장면의 대구 선거 유세가 있을 예정이었고 학생들이 거기에 참석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었다. 선거는 유세대결이어서 얼마나 많은 청중이 유세장에 모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자유당은 야당 유세장 참여를 막기 위한 일요일 등교 조치를 했다. 전날은 자유당 유세였다. 그날은 학교에 가는 날이었는데 단축 수업 후 자유당 유세에 동원했다. 

학생들은 뛰쳐 나와서 외쳤다. 

 

"학생을 정치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학원의 자유를 달라"

"민주주의를 지키자"

 

당시는 6.25 전쟁 직후의 상황으로 북과의 관계가 대한민국 정부에게 중요했고 학교에서 민주주의 교육을 철저히 배웠다.  3.15 부정선거는 전형적인 수법 '공개투표'였다. 이것에 학생들은 분노했다. 책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독재의 괴리감이 컸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이 되면 시가행진, 의장대, 경축 편대 비행, 학생 수천 명이 동원해 매스게임, 경축 마라톤 대회, 경축 무술대회, 글짓기 대회, 합창 대회, 임시공휴일 지정 등을 했다. 

 

사회 각계 각층에서 아부를 한다. 이승만대통령의 호는 우남雩南이다. 우남이라는 이름을 사방에 붙인다. 우남공원, 우남회관, 우남로 등이 생겼고 서울시를 우남시로 바꿀 뻔했다. 

1955년 3월 26일 이승만대통령 80회 탄신일이었다. 이승만을 우상화하는 작업들이 활발히 벌어진다. 남산, 파고다공원에 초대형 동상을 설치한다. 우남회관은 광화문 앞에 짓게 된다. 4.19 이후에 완성이 되어 시민회관으로 바뀌고 시민회관은 오늘날 세종문화회관이 된다. 서울시를 우남특별시로 바꾸자는 주장들이 나오고 여론 조사를 했는데 사람들이 선호하는 수도 명칭 변경 여론조사 1위는 우남시였다. 

미국의 수도는 워싱턴 초대 대통령 이름을 따서 지었으니 이승만 호를 따라서 우남시로 하자는 주장이었다. 

 

"쌍팔년도"라는 말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시대를 비유하는 말이다. 쌍팔년도는 단기 4288년도를 뜻한다. 1955년이 쌍팔년도이다. 미국에서 이승만대통령은 민주주의를 많이 배우고 접해왔지만 어린 시절 체득한 유교적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본인은 양녕대군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해외에 소개할 때는 본인을 '조선의 왕자'처럼 소개하기도 했다. 

 

4.19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시신이 떠올랐고 사그러 들었던 부정선거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된다.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시작은  4.18일 고려대학생들이 학교에서 모여서 대거 거리로 나서면서부터이다. 국회의사당(서울시 시청 옆 서울시의회) 앞에 모인 3천여 명의 고대생들은 구호를 외친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김주열 죽인 책임자를 처벌하라"

 

시위를 마치고 해산할 때 사건이 벌어졌다. 을지로를 따라서 해산을 했다. 그러다 일부 학생들이 종로로 방향을 틀었다. 천일백화점 앞에서 깡패습격을 받는다. 정치 깡패의 무차별 폭력에 고대생 200여 명이 부상당했다. 이승만 정권에서는 정치 깡패가 경찰의 보조 경찰 노릇을 했다. 

 

정치와 결탁한 정치깡패

 

정치와 결탁한 정치깡패

정치와 결탁한 정치깡패  1961년 5월 21일 사회정화의 일환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깡패들의 참회 행진이 시작됐다. 그리고 깡패들의 맨 앞에는 암흑세계는 물론 정치권력 앞에서도 주먹을 휘둘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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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대생들을 습격한 깡패 단체는 대한반공청년단으로 3.15 부정선거를 위해 조직한 선거 전위대였다. 

1960년 4월 19일,  4.18 고대생 피습 사건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4월 11일은 김주열 시신이 발견됐고 4월 18일에는 고대생이 깡패에게 습격을 당하자 당시 사람들은 충격에 빠진다.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여러 대학교 학생들을 움직여서 4.19일 날 한꺼번에 나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대광고등학교 학생들이 아침에 제일 먼저 시위를 시작했고 서울대학교 앞을 지나면서 시위를 준비중이던 서울대학교 학생들과 합류했고 서울 곳곳의 대학생들이 합류를 하면서 거리는 학생들로 가득 채웠다. 

오전 10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모여 시위를 벌이다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향한다. 오후 12시 10분 경무대 앞에서 시위를 한다. 바리케이드가 있자 부수고 수도관을 굴리면서 학생들은 나아갔다. 

 

오후 1시 40분 경찰의 최초 발포가 있었다. 시위대는 정치 깡패의 온상, 반공회관에 불을 지른다. 정부는 더이상 경찰력으로 시위대를 막을 수 없자 오후 3시경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한다. 

120여 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고 4.19일은 화요일 이었는데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렀다. 계엄령 선포 이후 정부의 진압으로 시위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4월 25일 대학 교수들이 거리로 나선다. 4.25 교수단 시위는 4월 25일 대학교수 257명이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온 가두시위이다.

계엄령을 위반해 가면서 시위를 감행한다. 당시 교수는 한국 사회의 최고 원로 지성인이어서 군도 막을 수 없었다. 교수단 행렬을 뒤따른 시민들은 만여 명이 되었다. 다음날 26일 아침이 되면 10만 명 정도 군중이 시위에 동참한다. 이전에는 시위 구호가 '부정선거 다시 하라, 폭력 진압의 책임자를 처벌하라' 였다면 4.25일 교수단이 명백하게 대통령 하야를 외치자 4.19 혁명의 최종적인 목적은 이승만 하야로 집중된다. 

 

계엄령이 선포되기는 했지만 군은 시민들을 향해 총을 발포하지 않았다. 군은 시민들이 전차에 올라타도 위협을 하지 않았다. 군은 사실상 시위를 방조했다. 군은 이승만정부를 적극적으로 지킬 의지가 없었다. 

당시 군이 시위를 막지 않은것은 정치적 중립을 하면서 시민 요구를 감지했었기 때문에 시민 편에 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군은 미군 작전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더이상 상황을 악화하지 않으려고 했고 이승만 정부의 지지를 철회해서 시위를 막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4.26 시위에 초등학생들도 나섰다. 

"부모 형제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당시 초등학생이 쓴 시가 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 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오빠와 언니는 왜 총에 맞았나요, 강명희 作>

 

4.19 당시 총에 맞아 사망한 故 전한승 어린이는 13세 나이로 최연소 희생자로 기록되어 있다. 故 전한승 어린이는 수송초등학교 6학년 재학생이었다. 친구의 죽음에 분노하여 4월 26일 시위에 나섰다. 

4.19 혁명 사망자는 196명이었다. 

피의 화요일부터 승리의 화요일까지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이끌어 낸 결정적 순간들이었다.

1960년 4월 26일 시민 대표와 면담 후 이승만대통령은 성명을 발표한다.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다음날 이승만대통령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12년 만에 막을 내린 독재정권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막을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 하와이 망명길에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독립 운동가이면서 초대 대통령이고 독재자였던 이승만대통령을 향한 국민들의 마음은 착잡했다. 

 

4.19 이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대통령은 1965년 사망한다. 향년 91세 였다. 하와이 망명 이후 병상에 있었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이 사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4.19 혁명 때 다친 사람 병문안을 간다.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라고 말한다. 당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미국 CIA 문서 (1959년 8월 1일)

이 대통령은 1959년 5월 하순부터 정무에 관심을 쏟는 능력이 떨어지고 새로운 발상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개념조차 파악할 수 없어 보인다. 

 

 

4.19 혁명은 헌법 전문에 담겼다. 

<헌법 전문>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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