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민주화 역사를 만든 박종철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경찰의 고문으로 끝내 사망한다. 경찰은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며 고문사실을 은폐했지만 진실은 세상밖으로 드러났다.
박종철 추모와 고문경찰 규탄이 이어졌고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외치기 시작했다.
한 대학생의 죽음이 대한민국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고문 경찰들은 우발적인 사고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종철 죽음 뒤에는 우발적인 사고로 치부할 수 없는 내막이 있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현대사에서 박종철의 죽음은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대통령 직선제를 이끈 계기가 되었다.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기부의 남산, 군 보안사 서빙고와 함께 악명 높았던 경찰 치안본부 남영동은 1985년 김근태 의장이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건물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메인 스터디움을 설계한 한국 대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다. 건물 안에는 철제 원형 계단이 있다. 좁은 공간을 잘 활용한 설계가 특징이다.
이곳에서 조사 받았던 피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수사관들에게 붙잡혀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다고 한다.
계단에는 특징이 있는데 1층에서 5층으로만 갈수 있게 연결되어 있는 계단이다. 5층에는 복도 양쪽으로 똑같이 생긴 16개의 문이 있었는데 취조실이었다. 문들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어 문이 열려도 다른 방을 볼 수 없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조사 받은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였다. 그곳에서 21살 청년이 있었다.
약 13㎡ (4평)의 작은 방에 환기창 수준의 창문은 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고문이 시작되면 커튼을 쳐서 작은 빛마저 차단했다. 좁고 긴 창문을 만들어 외부 시선을 차단하면서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이 투신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책상과 의자도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문 피해자들의 자해를 막기 위해 고정한 것이다.
작은 침대는 잠을 재우기 위한 수면용이 아니라 정신적 고문 장치였다. 피해자들이 몇날 며칠 한숨도 못 자고 진술서를 쓰고 고문을 당하다가 문득 침대를 보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조사실옆 벽면에는 방음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일부러 소리를 완벽히 차단하지 않도록 목제 타공판을 사용해 비명 소리가 낮고 음산하게 옆방에 들리도록 설계했다. 공포심과 절망감을 유발하기 위해 구석구석 신경을 썼던 것이다.
물고문 욕조가 설치되어 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했다.
고문 피해자 故김근태 의원은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피해를 당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고문 기술자의 딸의 생일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날 고문을 쉬었다고 한다. 고문을 하다가 전화가 오면 태연하게 전화를 받아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애정 어린 말들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가족과 통화 이후 고문을 재개했다. 이후 고문 트라우마로 치과 치료를 꺼렸다고 한다.
당시 일반인들은 고문 시설 남영동 대공분실을 전혀 몰랐다. 당시 간판에는 '국제해양연구소'로 은폐되었다.
1980년대 일반 가정집 화장실에는 욕조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고문 피해자 최연석(1982년 김제 가족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씨는 처음에 고문실 욕조를 봤을 때 저기서 목욕이라도 하라는 건가 싶었다고 한다.
거기에 고개를 처박히고 나서야 그게 물고문 도구였다는 것을 알았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도 욕조를 사용해서 물고문을 한 것을 시인했다. 남영동 509호 욕조 길이는 1m 20cm이며 일반 욕조는 약 1m 60cm였다. 길이는 일반 욕조보다 짧은 대신에 깊이는 60cm로 일반 욕조 약 50cm 보다 더 깊었다. 짧고 깊은 욕조에서 박종철은 물고문을 당했다.
수사관들은 박종철에게 수배중인 선배 소재를 다그쳤다.
박종철은 조사받기 전 수배중인 선배를 만난 것은 사실이다. 박종철이 그 선배의 도피처를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 선배는 박종철이 누나가 떠준 목도리를 건넬 정도로 서클 선후배 사이로 각별했던 선배였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84번 박종철은 과에서 학생회장을 맡았고 많은 시위와 집회에 참여해서 징역과 구류를 살기도 했다. 1980년대 운동권 학생이었다. 박종철은 감옥에 있을 때 가족에게 옥중 편지를 보냈다.
"우리 앞에는 외면할 수 없는 역사와 현실이 있다. 그리고 가난한 민중들이 있다
꼭 대학생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 특히 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진진하게 이 땅의 현실과 그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고민해봐야 한다"
-박종철이 감옥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986.6.9)
"저들이 비록 나의 신체는 구속을 시켰지만 나의 사상과 신념은 결코 구속시키지 못합니다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할 용기가 없다면
마음속으로나마 바깥에서 오늘도 열심히 싸우고 있는 우리 친구들과
저처럼 싸우다 갇혀 있는 친구, 선배들에게 힘찬 격려의 박수라도 쳐주십시오
엄마, 아버지의 막내는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박종철이 감옥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986. 7. 8)
사건 이후 박종철 열사 부친 故박정기는 기자 질문에 답을 했다.
"뭐요 뭘 쓰고 싶소? 우리 자식이 못 돼서 죽었소
이놈의 세상은 똑똑하면 못된 거지요"
故 박종철의 유해는 화장되어 임진강에 뿌려졌다. 박종철은 운동권 학생이었지만 연행됐던 이유는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으로 연행됐다. 수배자의 소재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고문당해 사망했다.
사건 전날 1987년 1월 13일 당시 김종호 내무부 장관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방문했다. 내무부 장관의 남영동 대공분실 방문의 첫 사례였다. 보름 전에 청와대 전두환 대통령이 경찰에 직접 지시를 내린다. '강압 수사를 하더라도 (학생 운동) 조직의 배후를 잡아들여라'였다.
1월이었고 3월이 되면 대학생들의 개강이므로 전두환 지시 사항을 '3월 개강 전에 이행해라' 를 독려하기 위해 김종호 내무부 장관이 직접 남영동에 방문했다. 내무부 장관의 남영동 방문 그날 밤 박종철은 연행됐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고문을 받다 사망하게 된다. 박종철 고문 담당 경찰 조한경의 진술에 따르면 청와대에서 지시 사항이 내려오고 장관이 직접 방문한 상황이 자신들에게 심한 압박을 주었다고 한다.
"만약 종철이가 죽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 희생됐을 겁니다".(신동아 2000년 1월호)조한경 인터뷰中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필사적이었다. 공안 수사에 경찰외에 군軍보안사, 안기부까지 국가 공권력을 총동원했다. 시국사건 수배범 검거 시 특진과 격려금까지 지급했다. 개인경쟁뿐만 아니라 부처 간의 공안 수사 경쟁이 일어날 정도였고 고문이 일상화되었다. 누군가 고문치사 당하지 않았다면 5 공화국의 고문 수사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 1월 운동권 학생들을 대거 체포하려고 나선 배경
1986년 10월 86아시안 게임(9월 20일~10월 5일)이 10월 5일 날 끝났다. 한국 대표팀이 선전한다. 종합 순위 중국에 이어 2위를 했다. 임춘애 선수는 86 아시안 게임 육상 3관왕을 차지했다. 금메달 숫자는 1위 중국과 겨우 한 개 차이였다. 1986년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은 분열되어 있었지만 민주화 운동 세력의 공통 목표는 대통령직선제 개헌이었다. 전두환 정권 입장에서는 이러한 민주화 운동, 즉 직선제 개헌 주장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강압적인 수사가 필요했다. 타이밍을 재다가 아시안 게임 직후 민주화 세력을 강경 탄압하게 된다.
1986년 10월부터 여러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987년은 강경 공안정국 속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1987년은 전두환 대통령 7년 임기 마지막 해다. 전두환은 퇴임 후 '섭정'을 하려던 의도가 있었다. 당시 청와대 비서실 비밀 문건이 1988년 공개되었다. 문건 내용은 당시 여당 민정당이 최소 2000년까지 집권해야 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담겨있다. 후계자를 양성하고 선정하는 방법도 구체적이었다. 후계자의 첫 번째 조건은 절대 충성이었다. 청와대 비서실 비밀 문건 제목은 '88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준비 연구'였다.
1987년 대통령 선거가 있기 때문에 개헌 투쟁과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는 조치들이 1986년 10월부터 본격화된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6년 10월 28일부터 10월 31일까지 있었던 소위 '건대 사건'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애학투련 조직의 결성식을 건국대에서 개최했다. 정부가 10월 30일날 헬기를 동원해서 강경 진압했다. 농성 중인 학생들을 모두 체포한다. 현장 체포된 대학생이 1,525명이고 구속대학생은 1,288명이었다. 구속 숫자는 일제 강점기 이후 단일 사건 최다 인원 구속이었다.
이 사건 직후 1986년 11월 3일 청와대 정무수석 비서관이 이 사건을 공산 혁명 분자의 폭력 난동 사건으로 명칭을 규정해서 보고를 하고 정부는 받아서 학생들을 집회 시위 관련 법률로 걸지 말고 방화, 파괴, 침입 등의 죄목을 적용해서 처벌을 해라고 지시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은 1986년 11월 15일 안기부 간부 회의에서 "구속된 학생 중 한 두명 정도에게는 사형 선고도 고려하라"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박철언)고 말한다.
건국대에서 학생들과 경찰이 한 창 대치중이었던 1986년 10월 30일 정부는 '북한이 금강산 댐을 터트려 서울을 침수시키려는 수공 계획 중'이라고 발표한다. 북한의 수공으로 서울이 침수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모든 국민을 거짓말로 공포속에 몰아넣고 그 와중에 건대 사건은 강경 진압한다.
1987년 1월 15일 박종철 사망 다음날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특종 기사로 그 죽음은 세상에 공개됐다. 동아일보 기자와 박종철의 시신을 처음 확인한 의사도 물고문 정황을 밝혀냈다. 부검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는 경찰 수뇌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경부 장기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사료됨'으로 부검기록을 남겨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짐작케 했다.
서슬 퍼런 보도 지침에도 불구하고 신문에 연일 물고문 기사가 보도되고 있었다. 박종철 사망, 첫 보도는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이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짧은 기사를 윤전기를 멈추고 실은 사회면 2단짜리 기사였다.
중앙일보 (1987. 1.15)
'검찰은 박 군이 수사기관의 가혹 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라는 기사를 썼다.
구타, 고문이 연상된다.
'박 군이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가정형편이 어려운 형편이다.'
시국 사범임을 알도록 기사를 작성했다.
보도지침은 제5공화국 당시 문화공보부가 언론사에 은밀히 하달한 보도 관련 지시였다.
보도지침이라는 언론 통제에 대해서 당시 기자들이 행간에 의미를 실어 보도지침에 저항했다.
이 기사는 한국 언론 100대 특종에 선정됐다. 이 기사로 인해 경찰은 많은 항의를 받게 되고 경찰의 허위 발표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을 한다.
고문 중에 박종철 상태가 좋지 않자 외부 의사를 급하게 부른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도착한 당시 중앙대병원 의사 오연상은 조사실 바닥에 흥건한 물과 박종철 복부에서 들리는 수포음으로 단순 쇼크사가 아님을 눈치챘다. 자신이 본 현장 상황을 윤상삼 기자에게 전달했고 기자는 신문에 실었다.
1987년 1월 19일 사건 발생 5일 후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기자 회견을 열어 고문을 시인한다.
처음으로 두 명의 고문 경찰이 구속되는 날 구속되는 고문 경찰의 신상 노출을 막기 위해 20명의 경찰이 같은 옷으로 동행했다.
1987년 2월 7일 박종철 열사 추도식이 기획된다. 이것을 계기로 분열되었던 민주화 운동세력들이 한 군데로 결집을 한다. 더욱 놀라운것은 정치권, 재야인사, 학생운동권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7만 2,674명이 국민 추도회 발기인에 참여한다. 1987년 3월 3일 박종철 열사 49재에서 고문추방민주화국민평화대행진 행사가 기획된다. 2월 7일, 3월 3일 집회의 경험이 6월 항쟁으로 이어진다.
박종철 가족은 불교 신자였고 경찰의 방해로 서울에 가지 못했다. 부산 사리암에서 49재가 치러졌다. 스님들도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어서 타종을 망설였다. 결국 어머니와 누나가 울면서 타종을 했다.
박종철 49재는 1987년 3월 3일 전투환 대통령 취임 6주년이었다.
민주화 운동으로 수감 중이던 이부영은 교도관들의 제보로 고문 경찰이 더 있다는 사실을 입수한다. 이를 감옥밖으로 알린다. 그 발표에는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이 앞장섰다. 박종철의 추모미사를 열며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알린 가톨릭신부들은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에 가담한 경찰이 더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당시 이부영 전 의원은 동아일보 해직 기자였다. 1986년 인천 5.3 사건으로 억울하게 투옥됐다. 처음 구속된 2명의 고문 경찰들이 이부영과 같은 교도소에 수감됐는데 구속된 경찰의 이상 행동들, 억울하다고 소리치거나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게 됐다. 대공수사관들이 경찰들을 면회하러 왔는데 고문 경찰 면회 참관 중 교도소 직원이 진실을 알게 된다. 기록했다가 이부영에게 전해준다. 또 다른 교도관에 의해 외부 전달됐다.
폭로된 진실앞에 정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고문에 직접 가담한 경찰 3명과 사건을 은폐 조작한 박처원 치안감 등 3명이 추가 구속된다. 그래도 민심이 수습되지 않자 문책 개각을 단행한다.
노신영 국무총리가 해임되고 정호용 내무부장관, 김성기 법부부장관, 서동권 검찰총장이 해임된다. 전두환 최측근 장세동 안기부장이 해임된다.
육사 16기 장세동은 베트남전에 참전하면서 전두환과 가까워진다. 전남 고흥 출신 장세동은 영남 출신 군인이 주축이었던 군대 내 사조직 '하나회'에 가입한다. 12.12 군사반란 때 장세동은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수도경비 사령관 장태완을 체포했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후 청와대 경호실장(1981년 7월 11일)으로 취임했다.
"대통령 마음이 편안해야 국정도 잘 되니 심기까지도 경호해야 한다" 심기경호를 시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민주화요구가 거세졌던 1985년 장세동은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취임한다. 5공 안기부의 주요 공작 사건으로는 수지킴 간첩 조작 사건, 평화의 댐 사건, 용팔이 사건 등 배후에는 안기부장 장세동이 있었다.
1983년 아웅산 참사에도 경호실장 자리를 지킨 장세동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안기부장에서 낙마한다.
5월 말 개각 직후 6월 항쟁이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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