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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한국전쟁의 대역전극 인천상륙작전과 잊혀진 영웅들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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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대역전극 인천상륙작전과 잊혀진 영웅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순식간에 한 달여 만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다. 북한군에 맞서기 위해 연합군은 새로운 작전을 착수한다. 바닷길을 통해 적의 후방을 공격하기로 한다.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포성이 울렸다. 맥아더 장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전이 시작됐다. 집중 포격이 끝나자 상륙부대가 해안으로 향했다. 국군과 연합군은 단숨에 인천을 탈환했다. 한국전쟁의 대역전극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철저한 사전준비와 대규모 물량 공세로 성공 확률을 높였다. 인천상륙작전 정보는 공공연하게 알려진 상황이었다. 당시 미 극동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 발발 4일 후 1950년 6월 29일 날, 비행기를 타고 한강 전선을 시찰했다. 그때부터 인천으로 상륙해서 전쟁에서 승기를 잡겠다고 하는 블루하트 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블루하트 작전(Operation Blue hearts)은 북한의 남진을 막기 위해 최초로 구상되며 1950년 7월 22일 미 1기병사단이 인천에 상륙하는 작전이었다. 

 

 

Operation Blue hearts는 "My heart is in the Navy" 내 마음이 해군에 있다는 표현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려면 해군의 조력을 받아야 하는데 설득이 잘 안 되자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American blue hearts는 미 동부 해안에서 서식하는 야생화로 6~9월이 절정이다. 6월에서 9월까지만 피는 야생화에 의미를 담아 작전명을 고려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진격 속도는 예상보다 빨라서 블루하트 작전은 취소됐다. 전쟁이 시작되고 한 달여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난 상황이 된다. 맥아더 장군은 다시 한 번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다. 작전의 이름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라고 한다. 

상륙작전에는 세가지 조건이 필요한다. 들어갈 만한 충분한 이득, 상륙작전을 시행할 수 있는 여건 조성, 성공의 확신이 있을 때 상륙작전을 한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 초기부터 9월 15일 인천 상륙할 때까지 인천으로 들어가면 수세인 작전을 공세로 전환할 수 있다고 믿고 작전을 개시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전략은 섬 건너뛰기(Island-hopping) 작전이었다. 

섬 건너뛰기(Island-hopping) 작전은 적의 후방으로 우회해 보급 병참선을 공격하는 작전이다. 

적의 배후를 끊어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전략이다. 태평양전쟁의 노하우를 인천상륙작전에 발휘한다.

 

더글라스 맥아더장군은 1880년 출생했고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까지 20세기에 벌어진 주요 전쟁에 모두 참전했다. 아버지 아서 맥아더는 미 육군 장성으로 필리핀 초대 군정 총독이었다.

1910~1920년대 미국의 국가적 영웅이었고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최연소 육군 소장, 최연소 육군 참모총장, 육군 원수를 지냈다. 맥아더 어머니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맥아더가 웨스트 포인트에 입학을 했을 때 어머니가 학교 앞에 살면서 뒷바라지를 했다. 맥아더가 엘리트 군인으로 승승장구하는 데 있어서 어머니의 공이 컸다는 평가를 받는다.

 

 

맥아더의 트레이드마크 '구겨진 정모'를 쓴 이유가 있다. 정모안에는 모양을 잡아주는 링이 들어있다.  태평양 전쟁 시 지휘 장소는 함대였다. 함대에서 무전을 하려면 해드폰을 써야 했다. 그래서 링이 있으면 안 됐다. 당시 함정 지휘관들 사이에서 구겨진 정모가 유행이었다.

 

 

맥아더의 트레이드 마크 '선글라스'는 렌즈가 검정색이 아니라 녹색이었다. 

 

 

 

필리핀의 레이테섬에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이다. 상륙함이 수심이 얕아서 갈 수가 없었고 중간에 내려야 했다. 이 사진은 '거센 파도와 같은 고난을 이겨내고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상징적인 사진이 된다. 

 

 

필리핀 루손섬에서 상륙할 때 맥아더장군은 일부러 똑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었다.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주변으로 물을 헤치며 걸어가는 맥아더 장군 모습을 새긴 부조가 있다. 실제 인천에는 그렇게 들어오지 않았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 때 물을 헤치며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맥아더 장군은 한국인에게 영웅 이미지가 크다.

역사적인 맥락이 있다. 맥아더 장군은 끝까지 확전을 주장했다. 1950년대 북진통일을 외친 한국 사회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진 면이 있다. 또한 인천상륙작전을 통해서 전세를 역전시켰기 때문에 한국을 구해준 은인 이미지가 강하다.

 

1970년대 양담배 밀매를 단속했다. 당시 수입 사치품으로 규제하고 단속을 대대적으로 했고 많은 사람이 걸렸다. 양담배 단속 적발자 상당수가 무당들이었다. 무당들이 양담배를 많이 소지하고 있었던 이유는 맥아더를 신으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 장군의 트레이드 마크가 담배였기 때문에 양담배를 구해서 가지고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고집이 세기로 유명하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의 확신과 고집으로 추진했다. 상륙작전이 구상될 때 후보지는 인천, 군산, 주문진 여러 해안지역들이 후보지로 거명되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초지일관 인천상륙작전을 밀고 나갔다. 

 

인천은 수많은 신문물이 시작된 곳이다. 최초로 짜장면과 쫄면이 탄생했고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 고속도로 '경인선'이 있다. 한국 최초 극장, 감리 교회, 등대도 인천이 최초였다. 인천이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최초인 이유는 한반도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인천은 육로로 서울과 가깝기 때문이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을 주목한 이유는 인천으로 상륙하면 곧바로 수도 서울로 들어갈 수 있었고 서울 수복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수도 회복은 적에게 심리적 타격을 줄 수 있다. 인천을 통해서 서울로 들어가서 적의 후방을 끊어 보급로를 차단시킬 수 있다. 수도 서울을 수복하면 낙동강까지 내려간 북한군의 후퇴 시 포위 섬멸할 수 있었다. 

 

인천은 조수 간만 차이가 커서 대형 함정 진입이 어렵다. 미군합동참모본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배가 실제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좁다. 좁은 수로에 만약에 북한군이 기뢰를 설치한다면 진퇴양난의 위험성이 있었다. 인천 지역은 조수 간만 차이가 심해서 상륙작전 가능한 날짜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제한된 상륙 시간은 단 2시간이었다. 2시간 안에 상륙작전을 성공시켜야만 한다. 이때 북한군이 반격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었다. 

 

1945년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인천에 상륙했던 미 제24군단 작전계획에 인천의 지형적 특성을 꼼꼼히 기록해 놓았다. 인천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팔미도 앞에 두 개밖에 없고 팔미도 지나서는 한 군데로 밖에 갈 수 없었다. 1945년 이 자료로 미국 합동참모본부를 설득한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한 달 전 17명의 첩보부대를 인천으로 파견한다. 엑스레이 작전이었다.

엑스레이 작전은 17명의 해군 첩보부대가 인천에 미리 잠입해 북한군 동향 등 사전 정보를 수집했다.

민간인으로 위장을 하고 민간에 숨어 들어가 노무자로 공사판에서 일을 하는 등 첩보를 수집한다. 

17명이 이런 첩보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 주민들의 협조와 묵인으로 가능했다. 

 

첩보 부대원들이 수집한 정보는 북한군의 병력 규모 및 배치 현황, 보급선과 보급 현황, 해로의 기뢰 설치 여부, 상륙지점의 지형 정보들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철저히 준비된 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준비 과정에서 해군첩보부대의 희생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1950년 9월 14일 영흥도에서 북한군에게 발각이 되어 북한군과 교전이 벌어졌고 북한군에게 포위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가 첩보원으로서 임무 완수를 위해 자결한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날, 북한군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영덕 장사리로 함정이 향한다. 북한군 점령지역에 침투하기로 한 학도의용군 772명이었다. 대구 지역에 북한 포탄이 날아와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다. 대구를 중심으로 학도의용군이 자원해서 전쟁에 뛰어든다. 군사훈련을 2주간 받고 참전했다.

학도의용군은 평균 나이 17세이며 한국전쟁 때 학생 신분으로 참전한 의용병이었다. 

군의 지원은 충분치는 않았지만 학도병들이 스스로 작전 목표를 성공시키기 위해서 잘 싸웠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낙동강에서 반격해서 미8군과 한국군이 올라와야 했다. 그 여건 조성을 학도의용군이 들어가서 했다.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고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학도병은 군복이 아니라 교복을 입고 싸웠다. 고등학생은 당시 엘리트 였다. 학도병은 젊고 패기 넘쳤으며 잘 싸웠다. 학도병은 군복을 입지 않고 교복을 입겠다고 했다.  학도의용군 참가로 사기가 충전했고 전세를 역전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국학생들은 한국전쟁 발발 소식에 천여 명의 재일 학생이 학도병에 자원입대했다. 그중 642명이 인천상륙작전을 비롯한 한국전쟁의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해병대 3,4기의 고향은 제주도다. 1948년 제주 4.3 사건으로 자행된 양민학살로 인해 연좌제처럼 대대로 이어져 온 '빨갱이' 딱지가 있었다. 해병대에 입대해 나라를 위해 싸운다면 "빨갱이'딱지를 뗄 수 있고 내 가족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제주도민 약 3천 명이 입대해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10대 소녀들도 140여 명이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우리 집안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가족과 나라를 위해 더 용맹하게 싸운 해병대였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장군만의 승리가 아니고 한국인들의 수많은 희생과 힘이 합쳐진 승리였다. 

 

 

'귀신 잡는 해병'도 이때 등장한다.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마거릿 히긴스였다.

마거릿 히긴스(1920~1966)는 미국인 종군 기자이며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한국전쟁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인천상륙작전 한 달전에 해병대가 통영에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잘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을 했고 '귀신 잡는 해병' 시초가 됐다고 알려져 있다.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 (그들은 마치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 뉴욕헤럴드트리뷴(1950.8.23.)

 

한국전쟁 취재 내용을 책으로 출간했다. 책 속에 재미있는 내용이 나온다. (인천상륙작전은 극비리에 수행된 작전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작전이었다)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Around the Tokyo Press Club the landing was dubbed Operation Common Knowledge...

도쿄 언론 클럽 기자들 사이에서 상륙작전은  '누구나 아는 작전'으로 알려져 있었고... 

for many weeks in advance  몇 주 전부터 

인천상륙작전은 비밀이 아니라 몇 주 전부터 누구나 다 아는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소련과 중국은 북한에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경고를 보냈다. 미국이 상륙을 시도하려고 하고 중요한 지점 중 하나가 인천으로 보이니 대비하라고 정보를 주었다. 하지만 북한은 병력을 뺄 수가 없었다. 어디론가 상륙할 가능성이 있고 인천이 그중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지만 낙동강 전선이 접전인 상황에서 군대를 빼면 전선이 무너지는 상황이 된다. 낙동강에서 접전 중이어서 인천상륙작전을 알았다 해도 병력을 뺄 수 없는 상태였다. 

상황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김일성은 자신이 목표했던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을 밀어부치는 데 집중을 했다. 주변의 경고는 무시하고 목표 달성에만 집중한 김일성의 오판이었다. 

 

북한군의 오판과 더불어 유엔군의 압도적인 화력도 인천상륙작전 성공 요인이 된다. 인천상륙작전 때 월미도에 엄청난 포격을 가한다. 월미도 일대는 쑥대밭으로 변했다. 적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월미도 일대 민간인 희생자들이 발생한다. 민간인들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조사 결과 당시 폭격으로 월미도 거주 민간인 100여 명의 사망이 밝혀졌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민간인의 희생이 감춰져 있다. 

 

팔미도부터는 하나의 수로뿐이어서 팔미도 등대를 반드시 켜서 길을 안내해야 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신호탄 팔미도 등대는 해군첩보부대와 대북첩보부대 켈로부대(Korea Liaison Office. KLO)의 합작품이었다. 북한지역을 잘 알고 미국인들과 의사소통이 되는 엘리트 요원으로서 작전을 수행했다. 

 

인천상륙작전의 또 하나의 주역은 낙동강 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이 한 달 이상 버텨준 덕분이었다. 낙동강까지 밀렸지만 북한군과 치열하게 맞선 국군과 유엔군이 결사적으로 한 달간을 싸운 결과 상륙작전의 치밀한 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낙동강 전선이 총공세를 벌이고 연계가 되면서 빠르게 서울을 회복하고 10월 1일 38선까지 올라간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대한민국 영토를 회복한다.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중국은 '38선을 넘어 북진하면 중국은 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다'고 경고한다.

맥아더장군을 비롯한 미국 측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북진을 강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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