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타버린 제너럴셔먼호와 신미양요
신미양요(辛未洋擾)는 미국에서는 'Battle of Ganghws 강화전투'라 부른다. 조선과 미국의 유일한 전투가 신미양요다. 미국은 군사적으로 승리했지만 외교적으로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미 함대가 치른 첫 전투이다.
신미양요의 출발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이었다. 윌리엄 테쿰세 셔먼 남북전쟁 당시 북군 장교의 이름을 딴 제너럴셔먼호는 전투함이 아니라 상선이었다. 무장은 했으나 기본적으로 상선이었고 이 배의 정체가 무엇이었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1866년 영국 메도우즈상사와 임차 계약을 맺고 조선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 중국 텐진항에서 출발하여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갔다. 길을 안내할 중국 정크선 4척과 대동강 하구까지 동행했다.
대동강 수위가 낮아지자 모래톱에 걸려 좌초된다. 그런 상황에서 평양 군민軍民들이 불을 질러서 전소시켰고 승선원들은 모두 사망했다. 제너럴셔먼호 전소 소식은 뒤늦게 미국에 보고된다.
이전에 조선에 표류했던 미국 배들이 있었다. 1853년 1월 미국 포경선이 경상도 동래 용당포에 표류했다. 1855년 미국 포경선 투 브라더스호 선원 4명이 강원도 통천으로 표류했다.
유원지정. 유원지의 柔遠之義라고 해서 멀리서 온 외국 배들을 예우하던 당시 조선의 전통이 있었다.
이런 전통이 있어서 외국배가 오면 환대한 기록이 많다.
1866년 6월 풍랑에 난파당한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는 조선에서 환대받았다고 미국에 보고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이전과 다르게 불을 질렀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당시 평안감사는 박규수였고 박규수의 할아버지는 북학파 연암 박지원이다. 북학파는 조선후기 실학의 한 분파이며 북학파의 시조가 연암 박지원이다.
박규수 문하에서 박영효, 김옥균, 유길준 등이 개화파로 성장했다. 문화 개방을 주장했던 박규수가 평안감사인데 왜 미국상선을 불태웠을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고 있다.
북한은 이 사건을 조작했다. 김일성의 증조부가 제너럴셔먼호의 화공에 앞장섰다고 역사 조작을 했지만 연구자들에 의해서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사학계의 추론은 박규수의 여러 활동상을 감안하면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우도록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추정했다. 그러다가 박규수가 쓴 장계 <평안감영계록>이 발견되었다.
사실은 평안감사 박규수가 제너럴셔먼호 화공작전을 지시했고 총 지휘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제너럴셔먼호가 평안감영에 통상. 교역 접촉을 했다. 1866년 7월 15일(음력) 평안감사 고위급 대표가 파견된다. 시종. 통역이 포함된 중군 일행이 탄 배를 억류하고 감금했다. 평양 군중들이 중군을 구출해야 된다고 소동이 벌어졌다.
퇴역장교 박춘권이 앞장서 중군을 구출했다. 당시 중군 계급은 현재 쓰리 스타 급이다.
순영중군은 관찰사를 보좌하면서 도道의 군사 실무를 총괄했다.
1866년 7월 22일(음력) 제너럴셔먼호는 지나가는 상선을 공격하고 식량을 약탈했다. 같은 날 함포를 발포해서 민간인 7명이 사망한다. 1866년 7월 23일(음력) 평안감사 박규수가 조정에 문서를 보낸다.
"우리 쪽에서 싸움을 도발할 리가 만무하지만 저들 스스로 죽을 방법을 택하니 어쩌겠습니까.."
제너럴셔먼호의 비극이 시작된다.
제너럴셔먼호는 조선에 온 목적부터 수상한 점이 많았다. 교역과 통상을 위해서 왔지만 잘 안된다면 약탈까지 생각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양으로 가지 않고 왜 평양으로 왔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길잡이가 중국인이어서 평양길을 잘 알아서 왔다는 설이 있고 당시 평양은 조선의 제2대 도시였기 때문에 교역이 활발했기 때문에 왔다는 설이 있다. 유력한 설은 당시 중국에 파다했던 소문 경신리 1호분 등 평양 왕릉에 보물이 많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고 처음 좌초됐을 때 물과 식량을 주었는데 되돌아가지 않고 다시 평양 상류로 갔다는 것이 도굴목적을 뒤바침한다.
배를 얻어 타기 위해 통역을 맡은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J. 토머스가 한문 성경이 전파되던 평양으로 포교활동, 종교적 접근을 위해 평양으로 왔다고 하기도 한다.
제너럴셔먼호는 국가적 차원에서 개항.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일개 상선의 비즈니스를 위해서 왔다.
2022년 9월 학술지 <한국사 연구> 제198호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영국 무역회사가 조선을 상대로 무기를 밀매하려 했다는 것이다. 영국 메도우즈상사가 신고한 교역물품 목록에는 의류, 유리, 양철 등이었고 무기는 없었다. 1867년 5월 10일 미 국무장관 수어드는 미국 주재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공사들의 회의에서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 갔는데 군수물자를 싣고 대단히 의심스러운 원정을 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당시 조선 황해감사의 보고서에 담긴 기록을 보면 제네럴셔먼호에 셀 수 없이 많은 조총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제너럴셔먼호의 승선 인원은 24명이었다.
당시 조선은 프랑스함대 파병을 요청한 <황사영 백서 사건> 이후 신식 무기가 필요했다.
영국 메도우즈 상사는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었고 파산직전 상황에서 엄청난 이윤을 얻기 위해 시도를 했다. 당시 무역회사의 무기 거래는 불법이었다. 청나라, 미국, 영국 등에서 불법이었다. 메도우즈상사는 그만큼 다급했다는 것이다. 대동강입구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나자 황해감영의 하급 관리가 급파되었을 때 조선의 고위직을 만나 무기 거래를 교섭하러 평양행을 가려고 했다. 사건 이후 영국은 메도우즈가 영국 상선임에도 불구하고 외교문제로 삼지 않고 조용히 넘어간다. 영국도 제너럴셔먼호의 불법 행위를 인지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온 제너럴셔먼호에서 중간에 길잡이 했던 중국인 선장이 내렸다. 중국인만 살고 전원사망했다. 증언할 생존자가 없었다.
1866년 병인년 늦여름에 일어난 제너럴셔먼호의 비극이었다. 윌리엄 수어드 당시 미 국무장관은 보고를 받고 격분한다.
서양의 배가 아시아 국가에서 배가 전소당했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이 달린 문제였다. 진상파악을 위한 교섭을 시도했으나 계속 실패한다. 1869년 그랜트 대통령이 취임한다. 전후 혼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다시 아시아 문제에 눈을 돌린다. 미 동인도전대가 아시아전대로 재정비했다. 미국의 조선 개항 논의는 남북전쟁이전부터 나오고 있었다. 조선은 주인이 없고 비어있는 곳이니 우리가 가서 뭔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은 1854년 일본을 페리제독의 흑선으로 개항시켰다. 하지만 다음 행동은 없었다. 아시아 진출을 위해 영국. 프랑스와 협력하는 정도였다. 영국과 러시아는 그레이트게임 중이어서 미국은 러시아보다 영국과의 협력이 우선이었다. 미국은 해양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1867년 대만에서 미국 상선 로버호가 대만 인근 해역을 지나던 중 풍랑을 만나서 대만 해안에 좌초됐다. 아미족. 파이완족 등 다양한 대만 원주민이 거주하고 있었고 자신들을 지배했던 서양 오랑캐에 대한 복수로 미국 상선 로버호 선원을 몰살시킨다.
이 사건까지 벌어지자 격분해서 대만에 보복해야 겠다고 다짐한다.
약 3개월 후 USS하트포드를 파견한다. 타이완섬에 상륙해서 정글로 진입하다가 실패한다. 대만 원주민들이 조금 싸우다가 내륙 정글로 후퇴해 버린다. 대만은 깊고 험준한 산지가 발달해 있어 원정기간도 짧고 낯선 정글에서 위험도가 커지자 철수한다.
아시아에 진출한 열강들 사이에서는 조롱거리가 되어 체면을 구긴다.
조선원정의 책임자는 전권을 위임받은 청나라 주재 미국대사 프레드릭 로우였고 '포함외교'를 맡은 사람은 미 아시아전대 사령관은 존 로저스제독이었다. 로우대사는 은행가 출신이고 연방 하원의원을 거쳤고 남북전쟁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1863~1867)했다.
난파선 선원 보호를 위한 조약을 체결하고 기회가 있다면 조선에서 상업적 이점을 추구하라고 미 정부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로저스제독은 미 해군 명문가 출신이었다. 남북전쟁 베테랑이었다. 노퍽을 남부 해군에게 빼앗길 때 메리백 등 군함을 자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군함을 건져서 철갑함 CSS 버지니아로 개조했다.
모니터함 USS 위하켄 함장으로 찰스턴항 공방전에 참전해서 섬터요새 공격에서 활약했다. 해안방어 요새를 공격하는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조선 원정군 미 아시안전대 기함 슬루프함 USS 콜로라도가 와서 배치된다. USS 알래스카, USS 팔로스, USS 베네시아, USS 모노카시 4척이 충원되어 포진한다. 4척 모두 뭍에서 멀리 떨어진 큰 바다에서 실시하는 군사 작전, 원양遠洋작전에 적합한 배들이 아니었다. 강상해군에 적합한 USS 모노카시 처럼 뒤에 스크류가 달린 배들이 아니라 미시시피강에서 봤던 외륜선이었다. 이런 배들이 조선 원정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5척의 군함에는 수병들이 있고 상륙과 지상전을 대비한 해병대가 탑승했다. 미 아시아전대 병력은 1,230명이었다. 보조원, 승무원들을 포함하면 총 1,400여 명이었다. 1871년 5월 16일 미 함대가 일본 나가사키항을 출항해서 5월 19일 서해상에 진입을 해서 5월 23일 입파도를 거쳐서 북상한다. 짙은 안개로 인해 항해가 지연된다. 정박지로 정했던 물치도에 5월 30일 정박한다.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외세 침입에 대처하는 나름의 대비책을 세운 조선이었다. 1871년 4월 14일 조선의 입장을 청나라를 통해 회신한다. '별로 살 것도 없고 별로 팔 것도 없다, 살 여력도 없다'라고 하며 통상수교를 거절한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은 박규수 평안감사가 이미 답신을 전달했다.
그래도 미국함대가 계속 이동을 하자 전날 연락관 방문에 이어 5월 31일 USS 콜로라도에 인천부 하급관리들이 찾아간다. 프레드릭 로우대사는 협상에 권위 있는 고위급을 요청한다. 제너럴셔먼호의 진상조사와 통상교섭을 위해 한양까지 가겠다고 통보한다. 이양선이 출현할 때 파견하던 조선의 문정관은 회담을 위해 뭍에서 대기 중이었다. 서로 어긋나고 있는 불통의 시간이었다.
모래톱에 좌초되면 안 되니 강화해협 수심을 탐색하고 측량을 하겠다고 통보한다. 1871년 당시에는 영어 가능한 조선인 통역은 없었다. 아시아전대에서 통역을 데리고 왔다. 로우 대사가 중국인 통역을 대동했다. 조선과 중국인은 한문으로 통역해서 중국인 통역사가 영어로 미국인과 통역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시아전대와 동행했던 종군사진가는 펠릭스 베아토이다. 이탈리아계 영국인으로 크림전쟁, 아편전쟁 인도 세포이 항쟁 등을 사진으로 담아 유럽. 미국 언론에 소개했다. 초기 종군기자로 유명했다. 서양은 아시아가 개항이 되면서 아시아 문물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는데 자료가 부족했다. 당시 일본에서 장기 거주 중인 베아토를 미 아시아전대가 동행시킨다.
신미양요 기간 동안 베아토가 찍은 사진은 47장이었다. 이 사진들을 언론사에 팔고 사진집을 발간하고 전시회 등을 하는 등 다양하게 활용한다. 언론사, 사진집 에디터, 전시회 디렉터가 그때그때 다양한 제목을 붙인다. 당시 아시아인을 무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당시 서구열강은 백인우월주의 성향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사진들의 제목에 담긴 의도는 개화를 위한 문명 전파의 뜻이 담겼다.
강화도는 서울 면적의 절반쯤 되는 약 303㎢이다. 강화도는 성, 요새, 포대 등 군사방어시설이 많다. 강화도는 수도 서울과 가까운 지역으로 몽골과의 전쟁 시기 38년간 수도 역할을 한 피란의 섬이다. 강화도는 천혜의 방어 요새이며 보장지保障地라고 부르는 섬이다. 강화도 방어시설을 구축한 것은 정묘호란 이후이다.
강화도 요새 구축 중점은 서울을 함락시킨 적이 육지에서 건너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866년 프랑스의 공격 병인양요를 겪은 이후 육지에서 오는 적이 아니라 바다에서 서해를 통해서 서울로 오려는 적을 막아야 했다.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해협 강화해협을 막기 위해 5보 7진 53돈대를 만든다.
강화해협의 최대 험로는 손돌목이었다. 물길 손돌목을 지키는 요새는 손돌목 돈대와 용두돈대가 있었다.
아시아전대 작전지도에는 미국은 손돌목돈대를 맥키요새, 용두돈대를 엘보요새라고 명칭했다.
손들목은 진도 울돌목, 태안 안흥량, 장산곶 인당수와 함께 험한 물길로 꼽힌다.
손들목 일대에 요새를 구축하고 방어했다. 건너편의 덕포진에도 요새를 강화한다. 강화해협은 양쪽으로 초지진, 덕진진, 덕포진, 손돌목돈대 요새가 있다.
1871년 6월 1일 USS 모노카시, USS 팔로스, 4척의 소형 증기 보트가 강화해협에 등장한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함대의 해도를 토대로 수심을 확인하면서 온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통과했다. 용두돈대에서 경고 사격이 시작된다. 병인양요 이후 강화해협은 조선의 배라도 통행증 없이는 항행이 금지되었다.
조선은 교전규칙에 따라 경고 사격을 날렸다. 조선군은 10여 분간 200여 발을 포격했고 미군은 응사했다. 미군은 앞서 관료를 만나서 측량하러 간다고 통보했는데 갑자기 공격을 하자 당황했고 조선군은 교전규칙대로 경고 사격을 한 것이다. 서로 엇갈리고 있는 모습이다.
미 해군은 조선의 실정을 잘 몰랐다. 용두돈대에 있었던 홍이포는 사거리가 약 10여 리(약 4Km)였다. 홍이포는 명중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USS 모노카시는 대포 8문을 장착하고 있었고 20파운드(약 9Kg) 달그렌 강선포가 탑재되어 있었고 최대 사거리 2,000m 정도였다. 60파운드 패럿포 포탄은 무게가 약 27Kg이 있었고 최대 사거리 약 7km였다.
8인치 달그렌 셸건 4문을 탑재했다. 셸건은 포탄 안에 화약을 충진 해서 시한신관을 장착하여 날아가다가 펑 터지면서 파편과 쇠공을 흩뿌리는 작렬탄, 유산탄으로 사격이 가능했다. 조선군과는 포탄 자체가 위력이 완전히 달랐다. 조선군의 쇠공으로는 강도 높은 미 군함에 타격을 주기는 힘들었다.
미 아시아전대는 조선에 마지막 경고를 보낸다. 6월 10일까지 사과하지 않으면 공격을 하겠다고 한다. 손돌목 포격전을 빌미로 이미 존 로저스 제독은 지상군을 상륙시켜 요새를 공격하고 파괴할 결심을 했다.
강화도만 뚫으면 수도 한양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은 열렸으니 조선이 협상 테이블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조선은 병력을 증파하여 강화도 방어 병력은 약 3,000명이었다. 피해는 컸지만 프랑스군을 몰아냈던 조선군이었다. 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지형상의 이점을 살려 정족산성 전투에서 격퇴했다.
마찬가지로 조선군의 전략은 이번에도 미군을 내륙으로 유인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미 아시아전대 전략은 함포사격과 상륙부대의 합동공격을 하려고 한다. 1871년 6월 9일 명령을 하달한다. 함포 사격 후 상륙하여 요새를 점령하라고 명령한다. 초지진, 덕진진, 순돌목돈대까지 장악하는데 작전 수행 시간은 22시간을 예상한다.
이틀 치 식량 배급 등 최소한의 전투물자를 휴대한다. 빠른 기동 속도 유지에 중점을 둔다.
미 상륙부대가 보유한 총기는 전장식 스프링필드 M1861가 있었다.
후장식 레밍턴 롤링블록 M1867을 가지고 있었다.
롤링블록은 총알을 넣는 약실을 막는 것을 블록이라고 한다. 회전식 블록을 젖힌 후 총알을 장전 후 블록을 밀어 닫은 후 발사한다. 빠른 장전 속도로 3~4초면 장전이 끝이다.
반면 조선군의 개인화기 화승총(조총)은 임진왜란 당시 사용한 화승 점화식 소총이었다.
병인양요 당시 서양 총기의 위력을 경험한 조선군은 면제배갑綿制背甲이라는 조선시대 말기 방탄복을 입었다. 면제배갑은 면을 13겹 덧대어 만든 방탄복이었다. 나름 효과가 있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 지휘관급 정도만 입을 수 있었다. 병사들은 솜옷에 물을 적셔 방탄복 대용으로 입었다. 하지만 전투는 6월이었고 날씨는 무더웠다.
1971년 6월 10일 신미양요 강화전투 1일 차 물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함대는 10시 45분에 출항한다. 11시 30분 정도 황산도에 이르자 미 군함 함포 사거리에 초지진이 들어왔다. USS 모노카시와 USS 팔로스가 포문을 열고 포지진을 향해 포격한다. 조류 때문에 팔로스함이 좌초된다. 상륙군을 실은 보트 22척이 뒤따르던 중이었다. 보트 22척에 탑승한 상륙군 병력은 651명이었고 곡사포 7문이 실려있었다. 낮 12시 30분 초지진 상륙을 개시한다. 초지진의 대포 사거리 밖 사각지대로 상륙한다. 갯벌에 상륙하자마자 발이 푹푹 빠진다.
200~300Kg 곡사포가 즉시 갯벌에 처박힌다. 포 1문을 끄는데 75~80명이 가세했다. 갯벌에서 육지까지 거리가 700~800m 정도였다. 갯벌 탈출에만 3~4시간 소요된다. 오후 4시 30분 미 상륙군은 교두보를 확보한다. 초지진에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조선군은 유인작전을 위한 전략적 철수를 위해 초지진에서 철수했다.
무혈입성한 미 상륙군은 초지진 일대에서 숙영한다. 그날 밤 낯선 이국땅에서 맞이한 칠흑 같은 밤이었다. 불침번을 선 미 해병대 1개 중대가 기습을 받는다. 총소리는 났는데 아무도 없었다. 낯선 땅에서 당한 신출귀몰한 기습은 유령인지 사람인지 그 자체가 공포스러웠다.
너무나 피곤하지만 무서워 잠을 잘 수 없었다. 새벽 4시 작전을 개시한다.
1971년 6월 11일 신미양요 강화전투 2일 차 새벽 4시에 작전을 개시한다. 미 상륙부대의 목표는 요새 점령 후 파괴하는 것이었다. 초지진을 파괴하고 새벽 5시 30분 기동을 시작한다. 다음 목표 덕진진을 향해 간다. 덕진진까지 거리는 2km 정도였는데 약 2시간 소요되어 당도한다. 일반 보병의 행군 속도는 시속 4~5Km 정도이다.
시간이 2배 이상 걸린 것이다. 진격하는 대오의 선두에서 경로를 찾고 속도를 조절하는 병사 '향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병만 가는 것이 아니라 대포를 끌고 가야 하는데 제대로 된 길이 없었다. 당시 덕진진은 습지대였고 지형은 산악지대였다. 오르막길 구릉 위로 무거운 포를 끌고 기동해야 했다. 덕진진의 조선군은 USS 모노카시의 맹포격을 받고 이미 철수하고 없었다. 무혈입성한 후 덕진진 요새를 파괴한 후 바로 이동한다.
6월 중순 한 여름이라서 덥고 피로가 누적되어 지쳐있었다. 조선군은 이동하는 미 상륙군을 측방에서 위협하고 있었다. 조선은 일종의 게릴라전술을 구사했다. 총을 쏘고 도망가고 보일 듯 말 듯했다. 덕진진에서 해안 가까운 구릉을 따라서 손돌목돈대를 향해서 미군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바로 옆 대모산 일대 고지에 조선군 일부 병력이 매복하고 있었다. 대모산부터 미군 기동부대 간 사이는 약 200m 정도였다.
조선군의 조총의 유효 사거리가 안 나왔다.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설령 총격으로 맞춘다 하더라도 살상력이 미약했다.
미 상륙군은 위협사격을 주고받으며 전진한다. 조선군은 미군을 내륙으로 유인해서 산 쪽으로 넘어오면 매복한 병력들이 일시에 공격하는 근접전을 전개하려고 시도했다. 미 상륙군의 계획은 빨리 손돌목돈대까지 점령하고 물러나는 것이어서 조선군의 계획에 말려들지 않았다.
대모산 일대 조선군 측방위협의 여파로 미 상륙군 기동이 덕진진에서 손돌목돈대까지 2km를 이동하는데 무려 4시간이 소요된다. 6월 11일 낮 12시 무렵 광성보 서쪽 고지 일부를 점령한다. 광성보에서 약 140m 떨어져 있는 광성보 고지정상까지 간다.
미 상륙군은 손돌목돈대 공격에 전 병력을 투입하지 못한다. 대모산 일대 조선군의 측. 후방 역습을 경계했다. 배 위에 고지에 3개 포병소대 곡사포 5문과 3개 보병중대를 배치한다. 측. 후방 엄호가 완성된 상태에서 주력 7개 중대가 손돌목돈대로 진격한다. 조선군의 계속된 위협이 있었기에 미 상륙군 병력 분산을 이끌어 냈다.
손돌목돈대를 지키고 있던 장군은 병인양요 당시 광성보를 지켜낸 어재연 장군이었다. 조선 정부는 어재연을 진무중군에 임명해 급파했다. 광성보 일대 방어병력은 의병 포함 600여 명이었다. 손돌목돈대에서 참호를 파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식 명칭은 광성보전투라고 불리지만 실체는 손돌목돈대전투였다. 미 아시아전대 지상군과 바다 합동작전을 한다. 함포사격을 하고 지상군이 공격하는 형태이다. 함포 사격은 USS모노카시 1척뿐이었고 손돌목돈대전투는 함포 사격에 무너지지 않았다. 후방 포격 차단 목적으로 덕포진 포격으로 이미 많은 포탄이 소모되었다. 함대가 아닌 지상군 공격에 손돌목돈대는 무너졌다. 손돌목돈대 앞 고지에 미 7개 중대가 포진한다. 건너편 손돌목돈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같은 시간 전초부대 역할의 해병대 2개 중대가 이동한다. 해병대는 해안으로 붙어서 손돌목돈대의 남쪽을 향해 침투작전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사방팔방으로 적이 오고 있었다. 해안에서는 함포가 퍼붓고 언덕에 배치되어 있는 곡사포가 퍼붓고 전면의 미 보병 5개 중대가 압박해 오고 측면에는 해병대 2개 중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유산탄은 치명적이었다. 손돌목돈대는 좁은 내부 직경 약 30m 원형이다. 공격 개시선에 지상군 포진이 완료되고 곡사포. 함포 포격이 종료되었다. 신호에 따라서 포진되어 있던 7개 중대가 양면으로 일제히 350명 되는 병력으로 손돌목돈대를 공격한다. 조선군은 남쪽 아래에서 접근하는 해병대를 방어하기 위해 성루 위로 상체를 드러내고 쏘려고 하면 미 해병대는 레밍턴 소총을 발사했다.
조선군은 면제배갑과 물에 적신 솜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작렬탄과 유산탄 공격으로 불길이 옮겨 붙으며 피해가 속출했다. 처음 경험해 보는 화력이었다.
조선군은 미군을 피해서 북쪽 통로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조선군의 퇴각 추정 경로는 광성보로 가는 해안 길로 가고 있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서쪽 고지에 뒤늦게 도착한 1개 포병소대 경곡사포 2문이 배치되어 있었다. 갑자기 조선군이 나타나자 경곡사포를 직사 한다. 이때 캐니스터탄과 유산탄을 집중 사격한다. 퇴각하던 조선군 100여 명 전사를 포함해 광성보전투 조선군 사상자는 총 350여 명이었다.
미군은 3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한다.
손돌목돈대에서 조선군은 끝까지 저항한다. 앨버트 캐스텔과 앤드루 C. 난 2명의 역사학자가 쓴 기록물,
<이교도와 싸운 우리의 작은 전투> 은둔의 나라, 조선(1882)에 광성보전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조선군은 아무도 항복하지 않고
죽거나 치명상을 입을 때까지 용감히 싸웠다
여러 사정으로 무기를 입은 조선인은
돌맹이를 들어 미군의 얼굴에 던졌다
결국 생존한 100여 명의 호랑이 사냥꾼은
언덕 아래 강으로 몸을 던지거나 스스로 목을 그었다."
1871년 6월 12일 미 아시아전대는 철수한다. 정박지 물치도에서 함선 수리를 마치고 20일가량 머물면서 그래도 조선정부의 통상수교 동의를 기대했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1871년 7월 3일 미 아시아전대는 조선을 떠난다.
미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도 이유였지만 당시 미군은 한양까지 진격하려면 3만 5천 병력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미군은 전투 중 총기가 불발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매클레인 틸턴 미 아시아전대 해병 대위는 총기를 점검한다. 군함 5척에 있던 레밍턴 소총 100정씩 테스트를 해보니 한 척은 50정, 한 척은 40정이 불량이었다. 어떤 한 척은 100정 중 단 8정만 멀쩡했다. 신형총이었기 때문에 운용 경험이 부족했다. 날씨가 다른 곳, 조선에서 총기 손질이 미숙했다. 탄피식 탄환이 처음 지급되기 시작했는데 구리 탄피(카트리지 케이스)가 상당수 녹이 슬어있었다. 녹이 슬어서 공이가 뇌관을 때려도 발사가 되지 않았다. 한양 진격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랜트 행정부의 신미양요에 대한 평가 기록이 있다. 1871년 대통령 연례연설에서 그랜트가 전한 메시지가 있다.
"조선 해안에서 조난된 선원들에 대한 야만적인 대우에 종지부를 찍고자
나는 베이징에 있는 우리 장관에게 선원들의 안전과 인도적인 대우를 보장하기 위해
조선과 협약을 체결하도록 노력하라고 지시했다
해안에 도착한 소규모 측량대가 불리한 상황에서 위험한 공격을 받았다
그들에게 모욕에 대한 설명과 사과할 기회를 줬지만 둘 다 오지 않았다
그 후 군대가 상륙했다. 험준하고 험한 나라를 넘어 고된 행군을 한 후
공격을 감행했던 요새들은 용맹한 공격으로 축소되고 파괴되었다
그리하여 범죄자들을 처벌하고 국기에 명예를 입증한 원정대는
원하는 협약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왔다"
조선 원정에서 공을 세운 15명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조선정부는 척화비를 세우고 최고군사기구 삼군부를 강화했다. 군비를 확충하고 중앙군과 지방군 전력을 강화했다. 서구의 총기와 탄약을 구매했다고는 하지만 실효성은 거의 없었다.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고 서양에서 만든 새로운 무기는 살상력을 강화하고 있었지만 조선은 그러한 무기를 살 능력도 만들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설사 만들었다 하더라도 서양문물을 교육받은 사람도 없어 운영할 수도 없었다. 새로운 문명이 밀려오는 가운데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일 만한 사고방식도 부족했다. 청나라도 서양의 영향력에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은 굳게 문을 닫아버리고 청나라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는 변함이 없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1894년 들불처럼 거세지는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잡아달라고 청나라 군대 파견을 요청한다.
병인양요가 끝났을 때도 이끈 주요 지휘관이 건설적인 제한을 했지만 바뀐 것이 없었다. 신미양요가 끝나고도 조선 정부의 대책은 효율성이 없었다. 신미양요는 오히려 일본 정부에게 교훈이 된다. 미 군함에 일본 관리를 동승시켜 정보 수집을 노렸던 교섭이 실패하자 직접 조선에 본격적으로 밀정을 심기 시작했다.
일본은 조선이 모르는 사이 조선의 정보를 세세하게 깨내고 있었다.
'잡학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심을 사로잡은 신흥 종교 지도자 장각, 황건적의 난 (1) | 2024.06.25 |
---|---|
삼국지를 탄생시킨 진수와 나관중, 모종강 (1) | 2024.06.24 |
2002년 월드컵 감동의 순간 (1) | 2024.06.23 |
한국전쟁의 대역전극 인천상륙작전과 잊혀진 영웅들 (1) | 2024.06.22 |
사라진 완행열차 비둘기호 추억과 애환 (0) | 2024.06.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