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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사라진 완행열차 비둘기호 추억과 애환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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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완행열차 비둘기호 추억과 애환

객실이 1등, 2등, 3등 칸으로 구분되어 있던 완행열차 시절이 있었다.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고래사냥

 

"목포행 완행열차 마지막 기차 떠나가고"

-목포행 완행열차 

 

 

서울에서 부산까지 완행열차를 타면 12시간이 걸렸다. 비둘기호, 통일호 완행열차였다. 지금의 KTX의 조상 격 기차였다. 용산에서 비둘기호를 타면 목포까지 12시간이 걸렸다. 정거장마다 섰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1967년 비둘기호가 처음 생겼을 때는 완행열차가 아니었다. 서민들의 발이 되어준 특급열차 '비둘기호' 탄생이었다.

 

 

1984년부터 완행열차로 열차 등급을 조정했다. 역마다 다 세우고 심지어 동네 주민이 '여기다 세워달라'하면 역이 아닌 곳에 세워주기도 했다. 

지금의 마을버스같은 개념이었다. 학생이 학교 갈 때 매일 같은 시간에 기차를 탔는데 어느 날 아침 같은 시간에 학생이 안 보이자 기관사 재량으로 기차를 멈추고 학생을 기다려 주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열차와 만나면 항상 비둘기호가 양보했다. 지금처럼 선로가 복선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단선이었고 옆 쪽에 대피선로가 있어서 앞 쪽에 통일호, 새마을호가 오면 비켜준다. 정차했다가 다른 열차가 지나가면 출발한다. 3등 칸에는 기본적인 냉난방 시설이 부족했다. 겨울철에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면서 부산, 목포까지 갔다. 

석탄재가 날리고 선풍기는 있었고 심지어 깨진 창문사이로 비가 들어오기도 했다. 창문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집게 창문이었는데  열리지 않아서 열다가 손이 찌어서 다치기도 했다. 

 

비둘기는 가장 큰 장점은 가격이 싸다는 것이었다. 다른 열차와 비교해서 요금이 절반이상 저렴했다. 

1972년 서울에서 부산가는 열차 요금을 비교해 보면 새마을호는 2,690원 통일호는 1,570원  비둘기호는 810원이었다. 

 

 

비둘기호에 있던 화장실은 비산식 화장실로 오물을 선로 밑으로 버리던 과거의 화장실이다. 그냥 구멍만 있어 용변을 볼 때 구멍에 조준을 잘해야 했다. 비둘기 열차뿐만 아니라 1980년대 대한민국 모든 구형 열차에서 흔히 보이던 화장실이었다. 

달리던 열차에서 오물이 날려 선로에 떨어진다. 아래가 뻥 뚫려있는 철도 교량 형태라서 가능했다. 기차가 다니는 천로 밑으로 사람이 지나가는 곳도 있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는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았다. 비산식 화장실이 있는 열차를 탈 때 탑승구나 객차 맨 끝에 서면 안 된다. 문 열고 열차가 다니다가 자칫하면 소변을 맞는 수가 있다. 

열차마다 경고 문구가 있었다.

 

"정차 중 화장실 사용을 금함"

 

화장실 입구마다 붙어 있었는데 비산식 화장실이어서 기차가 정차중이면 기차역에 용변이 떨어져서 기차역이 더러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철도청에서는 오물을 치우고 기차역 위생관리를 위한 전담부서를 두기도 했다. 

1980년대부터 오물을 수집하는 탱크가 객차안에 설치되면서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시설이 됐다. 

 

한때 대세였던 비둘기호는 1990년대 후반부터 노후화되면서 안전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2000년 마지막 비둘기호가 운행을 종료하면서 더 이상 비둘기호를 탈 수 없게 됐다. 완행열차 비둘기호의 추억과 애환이 사라졌다.

 

 

통일호는 비둘기호의 다음 열차로 선보였으며 초창기 특급열차로 주목 받았다. 통일호는 객차 안이 칸칸이 앉도록 설계되었다. 1960년대 무궁화호를 탈 수 있었고 1969년 새마을호가 전기냉방이 있었고 식당칸이 있으면서 특급 열차의 명성을 가졌다. 2004년 3월 통일호 운행을 종료한다. 

 

 

 

새마을호와 통일호는 항상 사람이 붐볐다. 새벽잠을 떨쳐 내고 나온 우리네 어머니들, 장사하러 가는 사람들의 보따리로 늘 넘쳐났다. 장에 닭을 팔러 가는지 묶어 논 닭이 탈출해서 작은 소동이 나기도 했다. 특히 명절이 다가오면 고향가는 사람들과 선물 꾸러미들로 객차가 가득 찼다. 여름 바캉스 철에는 기타와 텐트, 큰 라디오 등 각종 물놀이 여름 도구들을 가지고 바다로 떠나는 사람들로 객차는 가득 채워졌다. 

 

 

 

60~70년대 귀성길 기사를 보면 정원이 87명인 객차안에 230명이 들어가서 선반을 침대 삼아 가는 사람도 있었다. 선반 위로 올라갈 때면 밑에서 밀어주기도 했다. 기나긴 열차 여행을 하다 보면 지루하고 배도 고프고 하기 때문에 삶은 달걀과 사이다는 필수였다. 객차안에서 간식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음식을 팔기도 했다. 

삶은 달걀을 꾸러미로 묶어서 팔았다. 겨울에는 귤을 꾸러미로 묶어서 팔았고 보통 양념된 오징어, 쥐포, 초콜릿, 과자, 소주, 맥주 등을 팔았다. 

 

 

비둘기호 객실 복도에서 술을 한 잔씩 잡수시던 아저씨들은 간식 카트 지나간다고 하면 술과 몇 안 되는 안주거리를 주섬주섬 챙겨서 일어나서 옆으로 붙는다. 간식 카트가 지나가면 다시 자리를 펴고 술을 잡수신다. 

간식 카트는 철도가 깔린 이래로 80년 동안 운영이 되다가 2017년 매출 부진으로 중단됐다. 

 

 

대전역에서 가락 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당시 기술적인 문제로 호남선과 경부선이 선로를 바꾸느라 대전역에서 정차하는 시간이 다른 역 보다 길었다. 10여분 정도 시간에 기차역 플랫폼에 국숫집이 성황이었다.

열차가 멈추고 동시에 사람들이 힘껏 달려간 곳은 역 플랫폼에 지어진 작은 국수집이었다. 10여분 동안 부랴부랴 먹고 다시 열차를 탔다. 뜨거운 국수에 입천장은 데고 급하게 먹다 기차가 떠난다고 소리 지르면 다 먹지 못하고  열차를 타기도 했지만 국수맛은 끝내줬다. 기차 여행의 또 다른 별미 '가락국수'를 꼭 먹어야 했다. 1분 국수라고 부르기도 했고 우동처럼 면 크기가 둥글고 컸다. 기차 떠나려고 하면 역장이 호루라기를 부른다. 그럼 먹다가 이빨에 쑥갓 붙이고 열차를 향해 달려가기도 한다. 

 

역에 열차가 잠깐 멈추면 지역마다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열차로 올라왔다. 보따리 장사꾼이었는데 생굴도 팔고 대구에서는 사과 팔고 지역마다 파는 물건이 달랐다. 사람이 많아 열차안에 못 올라오면 창문 밖에서 물건을 팔았다. 사고 싶은 사람은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돈을 주고 물건을 창문을 통해서 받고 하다가 기차가 떠나는 수가 있었다. 

 

열차 시간이 길다 보니 기타를 치는 젊은이가 타고 있다가 지루해질 쯤 통기타 치고 흥겨운 노래를 부르면 손님들이 따라 부르곤 했다. 당시 젊은 청춘들 사이에서는 '경춘선' 타고 여행 가는 것이 청춘들의 필수 코스였다. 기타와 녹음기는 필수였다. 신촌역에서 백마 가는 열차가 있었다.

 

  

1970~80년대 대학생들은 경춘선 열차를 타고 갔다. M.T열차였다. 강촌, 대성리, 청평, 남이섬은 대학생 M.T 명소로 자리잡았다. 새벽부터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청량리역에서 모여 기차를 탄다. 열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했다.

당시에는 여행을 간다고 하면 다 기차를 타고 갔다. 

기차와 사람사는 곳의 경계가 불분명한 곳이 많았다. 그래서 크고 작은 열차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그 시절 열차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추억을 쌓아주기 위해 노후 열차들이 관광열차로 새 단장했다. 

호텔식 관광전용 열차는 효도 관광 상품으로 주목 받고 있다. 바다의 절경을 감상하도록 만든 특별 관광 열차, 동해 바다열차도 인기가 있었지만 2023년 말에 노후화로 인해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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