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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희망을 주는 비결서, 토정비결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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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주는 비결서, 토정비결

예부터 전해오는 길흉화복을 내다보는 비결, 안채에는 토정비결, 사랑채에는 정감록이 있었다. 

토정비결(土亭祕訣)은 1년 열두 달의 신수를 판단하는 비결서, 조선 후기에 널리 펴져 인기가 있었다.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데 주역을 바탕으로 하면서 주역보다 간단하다. 주역은 생년, 월, 일, 시까지 포함되는데 토정비결은 생시를 제외하고 년, 월, 일을 괘에 마쳐서 숫자를 분류한다. 숫자를 곱하면 144괘가 된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사람은 토정土亭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다.

 

"장성하였는데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건장한 체격에 

얼굴은 둥글고  살이 붙어 있지만 검은 피부에 눈은 빛나고 목소리는 웅장하였다"

-토정유고 

 

토정은 박학다식하여 성리학 외에도 풍수지리도 능하고 심지어 예언도 하고  관상도 보면서 사람들의 여러 가지 관심을 끄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은 인물이다. 

 

"토정은 천문, 지리, 의약 복서(점), 율려(음악), 산수, 소리에 능했다

그리고 관상, 신방과 비결에 통하지 않았던 분야가 없었다."

-토정유고 

 

이지함은 작은 배를 타고 배 양쪽 모서리에 표주박을 달고 제주도를 세번이나 왔다 갔다 했지만 풍랑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이지함의 예지력은 세간에 유명했다. 

 

"이지함은 사람들을 관찰할 때 그들의 현부와 길흉을 먼저 알아맞히곤 했다"

-<선조수정실록> 11년 

 

혜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10여 년 뒤에 천하에 반드시 큰 난리가 있어 백성이 참살당하여도 세상이 이를 감당할 사람이 없을 조짐이다"라고 말하며 제자 조헌에게도 "15년 후에 피가 천리를 흐르게 넘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지함의 예언대로 15년 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충주 처가에 기거하던 이지함은 어느 날 난데없이 짐을 챙기며 떠날 준비를 한다. "부인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으니 지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큰 화가 미칠 것이오" 라고 말한다. 이지함은 처자를 이끌고 다급하게 서쪽으로 떠난다. 그리고 얼마 후 왕실 종친인 장인이 역모 죄로 처형당한다. 이지함은 앞 날을 내다보는 신통한 능력으로 처가의 멸문지화를 예언했다. 토정 이지함의 장인은 모산수(毛山守) 이정랑이다. 수守는 조선시대 왕실종친의 정4품 관직이다. 고조할아버지가 왕인 경우이고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집안의 자제라는 뜻이다. 

 

토정 이지함은 조선 대표적인 명문가의 자제였다. 1517년 충청도 보령 출생이고 고려 말 학자 목은 이색의 6대 손이다. 조선시대 천재 집안이다. 이지함의 친조카는 이산해(1539~1609)는 조선 선조 대의 영의정을 지냈다. 

 

조선에 기인이 등장해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토정 이지함이었다. 이지함은 늘  솥을 가지고 다녔고 솥을 머리에 쓰고 잠을 잔다. 

 

"솥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패랭이를 얹어서 밤낮으로 다녔다,

잠을 자고 싶으면 길가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잤다

오고가는 소나 말이 부딪쳐서 동서로 옮겨 다니다가 5,6일 후에 비로소 깼다"

-동패락송 

 

이지함은 나막신을 싣고 구부정한 모습으로 저잣거리에 나오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선조수정실록>11년 

허기가 있으면 솥을 벗어 시냇가에 걸어두고 밥을 지어 먹은 후 씻고 말려 다시 머리에 썼다. 10일에 한 번 정도 밥을 지었다. 이지함은 화식을 10여 일 정도 먹지 않고도 너끈하게 생활했다. 한 달 정도는 여름에 물을 마시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국조인물고> 권 33

믿기 어렵지만 모두 사료에 기록된 내용이다.

 

명문가의 자제였던 이지함은 왜 기인이 되었을까?

토정 이지함의 장인 이정랑을 역모에 휘말리게 한 '이홍남 고변 사건'이 있었다. 

이홍남 고변사건(1549)은 충주 이홍남 이홍윤 형제의 다툼이 역모 사건으로 확대되어 충주 일대 수많은 선비가 죽거나 유배된 사건이다. 이홍남은 왕족 이정랑을 왕으로 추대한 것이다. 이지함이 미리 처가를 떠나 이지함의 처자식만 간신히 살아남은 상황이었다. 

 

이지함에게 충격을 준  또 다른 사건이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 명종 대 수렴청정을 하던 문정왕후 일가의 권력 다툼으로 사림이 크게 화를 입은 사건이다. 

이지함의 절친한 벗, 승정원 사관 안명세는 을사사화를 비판한 기록을 남겼다는 이유로 체포되고 모진 국문을 받은 끝에 목숨을 잃고 만다. 신념을 지키고자 했던 벗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이지함은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출사의 뜻을 접고 유랑을 시작한다. 

 

안명세는 매일 이지함의 집에 찾아와 어울릴 정도로 절친한 벗이었다. 승정원 사관이었던 안명세는 을사사화를 주관했던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료를 남긴다. 을사사화를 일으킨 세력이 안명세가 남긴 사료를 보게 된다. 

안명세 필화사건(1548년)은 을사사화의 전말을 직필 한 사초가 동료사관의 밀고로 외척 세력에게 들어가면서 안명세가 고문 끝에 죽게 된 사건이다.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위한 원칙으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왕조차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이지함은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기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1519년 기묘사화,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며 사화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였다. 사화가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선비가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지함 외에도 뜻있는 선비들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지방에 은거하면서 지조를 지키고 학문활동을 한다. 이들을 처사處士, 유일遺逸, 은일隱逸이라 불렀다.

16세기 대표 처사處士가 토정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안명세의 처형을 보고 해도를 돌아다니면서 거짓 미치광이로 세상을 도피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19년 

 

조선 초기 토지제도 과전법(科田法)은 농민의 경작지에 대한 소유권을 보장하고 관리가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양반관료사회의 경제 기반이 된다. 16세기 과전법은 붕괴가 되고 관료들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 관료들이 불법적으로 땅을 차지하면서 백성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생업을 잃게 되어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지고 

얼어 죽는 사람이 잇따라 촌락이 쓸쓸해져서 열 집 중 아홉 집은 비게 되었다."

-<명종실록>9년 

 

농민들은 죽지 못해 도적이 되었으나 도적이라고 탄압하면 맞서 싸우게 되고 반란이 되는 현실이었다. 

의적으로 불린 임꺽정이 활약했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이지함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다. 

이지함의 유랑은 단순한 유랑이 아니라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 백성들의 삶을 직접 경험해 보는 시간이었다. 

이지함은 주로 서울 마포에 흙집을 짓고 거처한다. 흙으로 언덕을 쌓고 밑에 토굴을 파고 언덕 위에는 정자를 지었다. 흙으로 만든 정자, 토정(土亭)이라고 이름 짓는다. 토정정자가 되었다. 

마포대교 입구에서 상수동에 이르는 길 토정로이다.

 

 

16세기 마포는 해상교통로의 요지였다. 북한강, 남한강을 통해 조선의 모든 물산이 집결되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광흥창(廣興倉)이 있었다.

광흥창(廣興倉)은 현재 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일대에 위치하며 조선 시대 관원들의 녹봉을 보관, 지급하는 관아와 그 창고를 말한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물자는 소금이었다. 소금을 운반해서 소금 창고가 곳곳에 있었다. 염리동은 현재 서울시 마포구 동쪽에 위치하며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아 염리동이라 불렸다. 염창동은 현재 서울시 강서구에 위치하며 조선 시대 소금 보관창고가 있었던 데서 지역명이 유래했다. 

 

토정 이지함이 마포에 머물렀던 이유는 해상교통과 물산에 대해 알아야 백성들의 삶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강 사대문 바깥으로 신분이 낮은 이들이 거주했다. 이지함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두루 사람을 사귄다. 가장 훌륭한 사람은 유명한 학자, 정치가가 아니라 평범한 어부지만 도의를 지키고 사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지함이 말하기를 "최고가 될 만한 사람을 안다

한 사람은 해상에서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며 살고 있다"

-토종유고

 

이지함은 낮은 신분의 사람과도 어울렸지만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과도 교우했다. 서경덕, 조식, 성흔, 정철, 이이, 이황 등과도 교우한다. 정렴, 박지화, 남사고는 신분이 낮지만 자기 분야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었고 신분이나 당색과는 상관없이 어울렸다. 

화담 서경덕은 스승과 같았다. 서경덕(1489~1546)은 조선 중기의 개성 출신 학자로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 불리기도 한다. 

 

개성양반은 조선시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상업활동을 했다. 개성 사람들은 상업의 발달과 함께 유연하고 관대한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지함은 개성 출신 서경덕의 영향과 마포에 살면서 겪은 경험으로 상업에 개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개성이 낳은 역사 속 인물은 절세미인 황진이, 신출귀몰 전우치, 명필 한석봉이 유명하다. 개성 출신 유명인이 많은 이유는 개성상인의 역할 덕분이었다. 돌아다니면서 퍼트린 것이다. 

 

결국 이지함은 스스로 상업활동에 뛰어든다. 

 

"이지함이 무인도에 들어가 박을 심었는데 그 열매가 수만 개나 되었다

그것을 갈라서 바가지를 만들어서 곡식을 사들였는데 거의 천 석에 이르렀다"

-어우야담 

 

천석의 곡식을 모두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준 다음 소매를 펄럭이며 떠나가 버렸다. 

토정 이지함이 양반의 상업 활동을 주장한 이유는 이윤을 추구하다 보면 부정한 행위를 저지르기 쉽고 사적으로 쓰게 되기 마련이므로 양반 중 도덕을 갖춘 군자가 상업 활동을 해서 그 이윤을 백성에게 돌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상업을 천시했던 조선시대에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사화의 시대가 끝나고 다시 현실 정치에 사림이 참여하게 된다. 과거를 보지 않아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학자들이 추천을 받아 등용되기도 한다. 사림들이 이지함을 추천한다. 

 

"대신들이 천거한 선사 5인 중에서 

이지함, 정인홍, 최영경, 김천일은 다 6품의 벼슬을 받았다"

-<선조실록> 6년 

 

1573년 포천 현감에 부임한다. 낡은 옷에 나막신을 신은 신임 포천 현감 이지함이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를 찾아 천거하는 인재 등용책, 유일遺逸로 등용된다. 온 조선땅이 도탄에 빠져 있었으나 포천현은 그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지역이었다.  

이지함은 구체적인 민생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제시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러나 조선 대신들의 반대로 이지함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래 벼슬에 뜻이 없던 이지함은 병을 핑계로 현감직을 사직하고 돌아갔다. 

이지함이 포천 현감에 부임하고 9첩 밥상을 받았는데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면서 물리고 다시 차려 오라고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잔칫상처럼 차려온다. 

이번에도 다시 먹을 것이 없다고 하며 다시 차려 오라고 한다. 잡곡밥에 나물국을 가져오라 한다. 백성들이 먹는 것과 같은 밥상을 내오라는 의미였다. 

 

 

포천 현감 이지함이 상소한 내용이다. 

 

"전라도 만경현에 고기잡이할 수 있는 섬이 있고

황해도 풍천부에 소금을 구울 수 있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들을 임시로 빌려주시면 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겠습니다.

2~3년 안에 몇 천 섬의 곡식을 장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포천에서 무리한 세금을 걷는 대신 가능성 있는 지역에 백성들을 보내 이윤을 창출하겠다는 상소문이었다. 민생 해결을 위한 정책을 실행할 수 없다면 현감 직이 무의미하므로 관직을 버린다.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질서를 무시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리였다. 이지함의 상소문이 가진 의미는 시대를 앞서가는 사회, 경제정책이었다는 것이다. 

 

상소문 중의 핵심 내용이다. 민생을 위한다면 사농공상 성리학의 명분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필요한 자원은 적극적으로 개발을 해서 활용하자는 것이다.

 

"땅과 바다는 백가지 재용의 창고입니다.......

은銀은 가히 주조할 것이며 옥玉은 채굴할 것이며

고기는 잡을 것이며 소금은 굽는데 이를 것입니다.

이 창고를 열 수만 있다면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이익과 혜택은 한이 없을 것입니다"

 

명분 중심의 조선사회를 개혁할 힘이 부족했던 비주류(非主流) 토정 이지함이었다.

물러난 지 5년 뒤 1578년 아산 현감으로 다시 부임한다. 아산 현감 이지함의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산 백성들은 못에서 물고기를 기르고 잡아서 공납으로 바치고 있었다. 이지함은 부임하고 난 후 그 못을 메워버린다. 백성들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너무 힘겨워해서 못을 없애버렸다. 못은 메운 것은 공납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알리는 정치적 행동일 것으로 추측된다. 

아산 현감 토정 이지함이 추진한 정책은 걸인청(乞人廳)을 만든다. 걸인뿐 아니라 흉년으로 유랑민이 된 농민들을 위한 것이다. 단순히 먹이고 재우는 곳이 아니라 기술을 가르쳐 자립할 방법을 알려줬다.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볏짚을 주어 미투리를 만들게 시켰는데

그 일을 친히 감독하여 하루에 10짝씩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게 하였다"

-어우야담

 

국부와 백성의 자급을 위한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펼친 사상가였다. 1578년 아산 현감으로 부임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지함은 이질을 얻어 오래지 않아 세상을 버렸다, 나이 62세였다"

-석담일기

 

그가 평생 동안 백성들을 위해 구상했던 정책들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사그라 졌다. 

그의 허망한 죽음에 고을 사람들은 마치 친척이 죽은 것처럼 슬퍼했다고 전한다. 

이지함은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나는 아산에서 죽을 것이고 자네(조헌)는 금산에서 죽을 것이니

... 그 후에 이 말은 과연 증명이 되었다"

-동패락송

 

조헌(1544~1592)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700명의 의병과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 모두 전사했다. 조헌은 이지함의 핵심 제자였다. 제자 조헌도 이지함의 애민 정신을 이어받았다.

송시열은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평가되는 조선 후기 유학자였다. 송시열도 이지함을 칭송하는 글을 남겼다.

 

"신은 세분의 스승을 섬겼는데 이지함, 이이, 성흔이 그분들입니다

세 분이 성취한 덕은 제각각 다르지만, 그 마음을 맑게 하고 사사로운 욕심을 부리지 않아,

지극한 행적이 세상의 규범이 된 점만은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의 명분을 중시하는 송시열이 진보적 민생주의자 이지함을 칭송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북학파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은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고 상공업과 대외무역을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훗날 북학파의 사상과 이지함의 경제관은 통한다.

북학파 사상의 핵심은 이지함이 주장한 상공업 진흥, 이용후생 사상과 닮아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이지함의 주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토정 이지함이 일찍이 외국 상선 수 척과 통상하고자 했다

그분의 식견은 탁월하면서도 원대했다고 하겠다"

-북학의

 

북학파의 사상은 청나라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보다 먼저 이지함의 사상이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토정비결의 저자는 이지함이 아니다.

토정비결의 저자는 토정 이지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토정비결의 저자는 이지함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토정비결은 이지함 시대가 아닌 19세기 후반에 널리 유행했다. 

토정 이지함이 토정비결을 쓰지 않았다는 증거는 이지함의 현손이 훗날 이지함의 글을 모아서 편찬한 시문집 <토정유고>에 토정비결이 언급되지 않았다.

 

조선후기 세시풍속지 <경도잡지>, <동국세시기>에 언급되지 않았다. 음력설 전후로 토정비결을 본 다는 이야기가 없다. 만약 대중화가 됐다면 19세기 저술에 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이후에 토정비결이 퍼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후대의 저술가들이 이지함의 이름을 통해 권위를 빌린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시점에 백성들에게 희망을 준 비결서에 토정의 이름을 붙인 자체가 의미가 있다. 토정비결은 70%가 긍정적인 내용이다. 30% 불운한 괘가 나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법을 알려준다.

토정 이지암은 단순한 기인 奇人 아니라 시대를 고민하고 모순을 혁파할 수 있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려 했던 인물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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