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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잘 살아 보세, 새마을운동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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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 보세, 새마을운동

1970년대 초 농촌에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은 도시와 공장, 학교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새마을운동을 지휘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새마을운동은 소외된 농촌의 민심을 사로잡을 해결책이었다. 

 

 

새마을운동은 1970년부터 시작된 일종의 지역사회 개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농촌의 환경개선, 농가의 소득 향상, 농촌 경제 발전을 목표로 했다. 1970년 대 새마을운동 정신을 우표에 담았다. 

혼분식 장려운동을 시행했는데 쌀 소비를 줄이고 다른 곡식을 먹자는 식생활 개선 국민운동이다. 이때 쌀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 혼분식 장려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된다. 

도시락을 싸오면 선생님이 검사를 해서 혼분식은 칭찬을 하고 쌀밥을 싸 오면 꾸중을 들었다. 

 

새마을운동 노래 <잘 살아 보세>

1절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금수나 강산 어여쁜 나라

한마음으로 가꾸어가면

알뜰한 살림 재미도 절로

부귀영화도 우리 것이다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2절

일을 해보세 일을 해보세

우리도 한 번 일을 해보세

대양 너머에 잘사는 나라

하루아침에 이루어 졌나

티끌을 모아 태산이라면 

우리의 피땀 아낄까 보냐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3절

뛰어가 보세 뛰어가 보세

우리도 한 번 뛰어가 보세

굳게 닫혔던 나라의 정문

세계를 향해 활짝 열어

좋은 일일랑 모조리

배워 뒤질까 보냐 뛰어가 보세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1절 가사에는 경제발전에 대한 강한 열망이 돋보이고 2절 가사에는 간절한 목표 의식과 함께 경제발전의 롤모델을 언급한다. 새마을운동 노래 <잘 살아 보세>는 새마을운동을 기폭제 삼아 경제 발전 의지를 담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작사. 작곡한 <새마을 노래>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나의 조국(1974년)>이라는 노래도 작사. 작곡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스스로 창시해 농민을 각성시킨 새마을운동이었다.

1969년 수해 피해가 심각했다. 수해 피해 지역을 시찰하던 중 기차를 타고 가다가 경상북도 청도읍 신도리에서 기차가 멈추게 한다. 자발적으로 수해 복구 중인 주민들을 목격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주민들이 자신의 지역을 자발적으로 복구하는 것을 보고 새마을운동을 기획했다. 

 

"자동차가 들어올 길도 없어 마을 십 리 밖에서 짐을 나르자면 

지게로 져야 하는 이런 고장이 발전하겠느냐 금년에는 우리 힘으로 길을 닦자

들어오는 데 다리를 하나 놓아야 하는데  (중략) 그 운동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고 <알뜰한 마을 만들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지방장관 회의 (1970.4.22)

 

농촌환경개선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시멘트였다. 1970년 10월부터 농한기에 정부에서 전국 3만 3,267개 리/동에 시멘트 335부대 무상 지급했다. 무상으로 배포된 시멘트로 농촌 환경개선 사업을 독려한다.

우리나라 지하자원 중 매장량이 가장 풍부한 것이 시멘트 원료가 되는 석회석이다. 석회석 원료가 풍부해서 시멘트 공장이 많이 생겨났다. 너무 많이 생산되어 시멘트가 시장에서 소비가 안 되고 남아돌았다. 

당시 가장 큰 쌍용 시멘트 소유주는 김성곤이며 민주공화당 재정의원장 역임을 했다. 김성곤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시멘트 소비를 건의했다.  마을길, 교량, 공동목욕탕 등의 건설에 시멘트가 많이 쓰였다. 

초가지붕들이 슬레이트, 함석으로 교체되었다. 돌, 싸리나무 담장들이 시멘트, 벽돌로 교체가 됐다. 시멘트로 마을회관들이 건설된다. 

 

박정희 정부의 핵심 정책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1962년부터 1981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다.

1차는 경공업 중심, 2차, 3차는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공업 발전에 집중된 경제개발계획이었다. 그러다 보니 농촌경제는 보릿고개, 초근목피, 춘궁기로 상징되는 농촌의 가난이 이어졌다. 가난을 피해 농촌에서 도시로 떠나고 농촌 경제는 더욱 악화된다. 

당시 정부는 농촌에서 저곡가, 저미가 정책을 실시했다. 생필품 가격이 하락하면 도시 물가가 하락하고 노동자 임금이 억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만드는 물건에 가격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다. 저가 가격 경쟁력으로 수출을 활성화시키려는 최종 목적이었다. 수출중심의 경제 구조를 지탱했던 가장 밑바닥은 농민들이었다.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꺾고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대통령으로서 3번째 임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 대통령의 지지 기반 농촌 민심은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이전 농촌의 국회의원 선거 지지율은 67%였으나 1971년 총선에서는 58%로 감소했다. 공업발전과 수출경제를 강조한 박정희 정부 시대 농촌은 갈수록 더욱 소외되었고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특단의 농촌 대책이 필요했다. 

 

 

농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새마을운동도 추진된다. 박정희대통령은 스스로 빈농의 아들이라고 강조했다.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시기는 1969년 3선 개헌, 1971년 대선, 1972년 10월 유신 때이다. 권위주의 정부 확립 시기에 새마을운동 전개 시기이다. 

새마을운동을 담당했던 내무부 소속의 지방 공무원들은 확실하게 추진해서 성공시키겠다고 하는 서약의 의미로 '백지사표'를 제출했다. 또한 각 마을에 경쟁, 포상제도를 도입했다. 

 

 

가족계획사업을 실시한다. 가족계획사업은 혼분식 장려와 마찬가지로 1970년대가 되면 새마을운동과 결합하여 더 적극적으로 추진된다. 정관수술자는 예비군 훈련을 면제해 주기도 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정관수술을 하기도 했다. 1970년 평균 자녀 수는 4.71명이었다.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농민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청와대 비서실, 내무부 관장으로 새마을 지도자 합숙 교육을 했다. 새마을운동 취지, 관련 내용들을 훈련했고 주로 정신교육을 시켰다. 새마을 지도자 양성 교육 과정을 3만여 명이 받았다. 

 

새마을운동은 유신체제와 닿아있다. 양성한 새마을지도자들을 활용해서 국가가 필요할 때 주민 동원을 했다. 박정희대통령은 새마을운동으로 농촌 민심을 회복하고 정권 유지를 위한 정신교육, 국민 통제력을 강화했다. 

 

 

1970년대 하루는 새벽 새마을 노래 들으며 기상했다. 오전에는 국민체조를 했다. 오후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이런 것들이 나중에 새마을운동과 연결돼서 강화된다. 

 

박정희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통해서 안보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당시 냉전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말레이반도, 필리핀, 베트남 등에서 농촌을 근거로 한 농촌 공산 게릴라 활동이 많았다. 동남아시아 사례를 경계했다. 박정희대통령이 만들고자 했던 새마을은 경제적 자립 마을이면서 지역 사회 방위를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마을(반공 마을)이었다. 

 

이 무렵 고등 교육을 받은 농촌 출신자가 증가한다. 특히 장남은 선산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농촌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고등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농촌도 도시처럼 발전시켜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새마을운동 정착에 중요 요인이 된다. 초가지붕을 없애고 슬레이트, 함석, 기와집에 살고 싶어 하는 농민들의 마음을 새마을운동이 충족시켜 준다. 덕분에 수 백 년 동안 변하지 않았던 농촌의 풍경이 단 십 년 만에 변화했다.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미신 타파를 명분으로 고목, 장승, 성황당 등 문화유산을 많이 파괴했다. 농촌의 고유한 문화와 풍경이 상실된 것은 새마을운동의 그늘이다. 

1970년대 후반 농촌 관광 산업 진흥을 시도한다. 뒤늦게 장승 및 문화유산을 복구를 시도한다.

 

 

 

좋은 성과를 거둔 새마을지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포상을 했다. 봉황이 그려진 만년필을 선물로 받았다. 

새마을지도자를 3년 이상 활동하면 공무원 특채 기회가 제공되었다. 성공한 새마을지도자는 명성을 얻었고 만화책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새마을 만화 <섬마을 박목사>는 당시 경기도 강화군 삼산면 석모리에 자원해서 현대식 교회와 학교를 세운 인물에 관한 만화이다. 

새마을운동을 하는 동안 수많은 고난 속에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본인의 한쪽 눈을 팔기로 결심하자 정성에 감복한 주민들이 나서 교회와 학교 건설에 성공한 이야기이다. 

 

새마을운동을 연구한 미국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는 '캔두이즘'이라고 말한다. 새마을운동(1970~1979) 자료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1983)'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새마을운동은 농촌 빈곤 극복 사례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새마을운동은 공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농민들이 사회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줬다. 

1979년 10월 27일 오전 충격적인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 박정희대통령 죽음 후 새마을운동은 동력을 잃었다. 잘 사는 농촌건설을 새마을운동으로 이루고자 했던 박정희대통령의 시도는 그의 죽음과 함께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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