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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박정희 대통령 핵개발 비화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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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핵개발 비화 

1945년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고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는 결정타가 된다. 핵의 강력한 파괴력을 본 많은 국가들은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린다. 1949년 소련, 1952년 영국, 1960년 프랑스, 1964년 중국이 핵개발을 성공하고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도 핵 보유에 나선다.

세계적인 핵 개발 경쟁에 뛰어든 또 한 사람은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였다. 

 

일본에서 두 번의 핵폭탄 투하로 10~20만 명이 사망했다. 1954년 미국은 마셜군도 해역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했다. 당시 일본 어선 제5 후쿠류마루 선원 23명이 방사능에 피폭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명한 고질라, 괴수마가 만들어졌다. 고질라는 심해에 살고 있던 괴생명체가 방사능을 맞고 변신해서 인간을 공격하러 온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중국군에 밀려 압록강에서 UN군이 후퇴했다. 당시 맥아더, 오마 브래들리는 핵 사용을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도 핵을 사용해서 빨리 전쟁을 끝내달라고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게 핵이라는 무기는 모든 공포와 두려움을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자 방어책이었다. 핵은 당시 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소련만이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은 핵을 보유했다.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기술은 있었음에도 핵을 보유하지 못했다는 것은 핵은 최고의 힘의 상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는 국가 안보에 강력한 방어책은 핵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있었다.

1968년 1월 21일 (1.21사태) 김신조 외 30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일어났다. 

1968년 울진.삼척울진. 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 120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울진. 삼척 지역에 침투해 2개월간 게릴라전을 벌인 사건이 발생한다.

 

1960~1970년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있었고 주한미군 2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주한미군에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1958년 1월 다섯 종류의 전술핵무기가 한반도에 배치되어 있었다. 

어네스트 존 지대지 미사일, 마타도어 순항 미사일, ADM 핵지뢰, 핵탄두, 핵포, 핵배낭이 있었다. 

1967년 중반 태평양에 배치된 전술핵무기 32,000여기 중 950 여기가 한반도에 배치되어 있었다. 

당시 북한은 사거리 약 70Km 소련에서 도입한 지대지 미사일 FROG를 보유하고 있었다. 

 

"외교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영국의 정치가 Herry John Temple

 

미국이 한국에 안보를 제공하고 주한미군이 배치, 핵무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64~1965년 사이 DMZ에서의 북한의 도발은 약 40차례였다. 1967년 445건, 1968년 500여 건 이상이 발생하고 1.21 청와대 기습사건으로 대통령 암살 시도까지 한다.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민들은 격분해서 보복 공격을 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미국은 보복공격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보복공격을 남한이 한다면 남한은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게 될것이다라고 말한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수렁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고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또 다른 전쟁을 하는 모험을 할 수 없었다.

1969년 7월 25일 발표된 닉슨독트린은 한국에 충격을 가했다. '아시아는 아시안인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1969년 8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정희와 닉슨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베트남 전쟁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한 한국에게 주한미군은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철수를 하게 되더라도 특별히 예외를 두겠다고 언질을 한다. 그래서 정상회담이 굉장히 성공적이라고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1969년 12월 김동조 주미대사에게 '비공식적'으로 철군하겠다고 통보를 하게 된다. 1971년 1개 사단 약 2만여 명의 주한미군이 철수했다. 결코 대한민국에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한미동맹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낸다. 한국이 핵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던것은 한미동맹의 안보에 대한 믿음이 점점 옅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하는 상황에서 보복하지 못하게 하고 닉슨 독트린으로 주한미군이 철수를 하자 불안과 공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핵 개발을 통한 한국 경제와 안보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후 각국의 국방은 과학기술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전쟁의 결과로 알게 된다. 1966년 2월 10일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을 설립하는데 미국의 도움을 받게 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과학을 통한 자주국방 실현을 추진한다. 1967년 3월 30일 대한민국 과학기술처가 발족된다. 본격적으로 무기 개발을 위한 국방과학연구소(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가 1970년 8월 6일 대통령령으로 만들어진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체 제작 무기개발연구에 돌입한다. 무기개발위원회를 발족한다. 모든 무기는 미국에서 받은 무기였으며 당시 주력 무기였던 M16소총은 라이선스를 얻어와 조립만 하는 단계였다. 1972년 소총 자체제작 개발에 돌입한다. 무기개발위원회의 공식 목표는 미사일 개발이었다. 

 

1971년 12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은 구상회 박사에게 극비사항 메모를 전달한다. 

<유도탄 개발 지시>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라!

사정권 200Km, 탄두는 파괴효과가 큰 것을 개발하되 탄두의 교환성을 유지하라 

 

지금 사용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은 사거리 5,500Km 이상의 탄도미사일이며 주로 핵탄두를 탑재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당시에는 1970년대 ADD의 미사일 개발 당시 다른 나라의 미사일 사거리 기술은 200Km였다. 

1972년 최형섭과학기술처 장관 일행은 프랑스에 방문한다. 시용 후 핵연료재처리시술을 도입하는 문제를 이야기한다. 

 

국제사회에는 평화적 핵사용을 위한 원자력 개발을 공표하고 미국의 차관을 들여와서 고리 원자력발전소를 준공한다. 한국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 고리 1호기는 1971년 착공하여 78년 준공한다. 한편으로는 프랑스로부터 재처리기술 도입을 시도한다. 1970년대 초반 1974년 말까지 의도를 감춘 채 여러 핵기술을 도입하려 노력했다. 

 

미국의 지원을 통해 원자력 발전 개발을 진행중이었다. 그러면서 캐나다와 접촉 정황이 포착된다. 캐나다의 NRX, 중수 조절식 원자로 도입을 시도했다. 캐나다의 NRX는 1947년 원자력 발전의 근본 원리 연구를 위해 가동했다. 유난히 중성자를 많이 내던 원자로였다. NRX 도입은 고속 증식로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NRX 원자로는 연구용이라고 하지만 핵무기 개발에 필수적이었다. 

NRX 중수로형 발전소는 경수로형 발전소보다 건설 경비가 훨씬 많이 들었다. 굳이 비싼 중수로형 NRX를 도입하려 한 데는 핵개발의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1974년5월 프랑스와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 도입을 협의한다. 1975년 12월 프랑스 정부의 최종승인을 받기로 한 날 아침 납득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프랑스의 일방적인 계약연기를 통보받는다. 

75년 6월 18일 런던 주재 미 대사관이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 따르면 미 국무부가 프랑스에 접근해서 '한국이 재처리 기술 도입하는 것을 단념시켜달라'라고 했다. 며칠 뒤 미 국무부 차관이 백악관 안보보좌관에게 '우리는 프랑스 측에 한국의 재처리 시설 구입을 최소 시키려는 미국의 입장을 전달했다'라고 보고한다. 

 

핵무기를 보유했던 나라들은 2차 대전 승전국이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이었다. 1967년 NPT(핵확산금지조약)에 합의한다. 1967년 1월 1일부터 핵보유국과 비보유국을 구분했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한다. 강대국만 가질수 있는 핵을 개발도상국 최초 핵 보유 국가가 된다. 비핵화와 평화를 고수해 온 인도의 핵실험에 전 세계는 경악했다. 핵무기 확산을 우려해온 미국은 각국의 핵무기 개발에 촉각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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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5월 15일 인도의 핵실험 성공에는 배경이 있었다. 중국과 인도가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분쟁이 있었다. 인도-중국 전쟁(1962.10월~1962.11월)은 중국과 인도 사이 히말라야 일대 국경을 놓고 벌어졌던 국경 분쟁으로 인도가 패전했다. 중국이 1964년 핵실험에 성공했다. 1967년에는 수폭실험을 했고 1970년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중국의 핵개발에 나서고 있는 와중에 1971년 12월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난다. 미국은 파키스탄 편을 들어준다. 인도는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했지만 미국이 핵우산을 제공해 줄 거라고 믿었고 도리어 믿었던 미국은 파키스탄 편을 들어주자 인도는 핵개발을 하게 된다.

 

처음에 평화적으로 진척되던 인도 핵개발은 캐나다는 중수로, 미국은 중수, 독일은 기술을 제공했다. 평화적 핵개발을 주창한 인도는 여러 국가가 핵기술을 전수했던 것이다. 인도는 방사성 물질 토륨이 매장되어 있었다. 핵무기 개발에 나서서 결국 핵실험에 성공한다.인도는 핵확산방지조약 NPT를 거부했고 핵 사찰을 거부하고 포괄적 핵 금지 조약 시험을 거부했다. 미국, 캐나다는 인도에 7차례 이상 경제 제재를 한다. 

캐나다와 한국의 NRX 중수로 거래가 미국에게 발각된 것이다. 인도가 핵개발을 하자 인도와 국경전쟁을 벌이던 파키스탄도 핵개발에 참여한다. 1988년 인도의 5차례 핵실험 이후 파키스탄은 핵 실험을 하고 핵 보유를 선언한다.

 

미국은 당황했고 전 세계 핵무기 개발 상황을 수집한다. 박정희 정부의 프랑스, 캐나다, 벨기에 등 핵 기술을 수입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했다. 

1974년 12월 2일 주한 미국 대사관 국무부 전보에 따르면 '남한이 핵개발 계획의 1단계를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보고한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에 있던 CIA 한국 지부의 요원, 리처드 로리스는 청와대 무기개발위원회로부터 비밀문서를 확보했다. 

'한국은 향후 10년 내에 제한적인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할 능력이 있다'

'남한의 노력은 무산시킬 수 있게 남한의 핵 폭파 능력, 운반시스템 개발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핵무기의 개발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1975년 6월 12일 워싱턴 포스트

 

1975년 4월 인도차이나 반도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가 공산화되었고 한국은 패닉상태가 된다. 

1975년 4월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한다. 마오쩌둥 등 중국 수뇌부와 협상을 한다. 이때 김일성은 남침 의사가 밝히며 도와달라고 제안을 했다고 알려졌다. 한국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것은 미군이 철수하는 것을 저지하고 미국 핵우산 제공 등 대미 협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였다. 핵개발 카드를 외교적 지렛대로 사용해야 할 만큼 대한민국을 둘러싼 정세는 한국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프랑스 재처리 기술 도입은 연기되었었다. 핵 개발이 가능하기 위해 일단 원자로가 있어야 한다. 고리 원전 1호는 미국의 도움 하에 짓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이 핵개발을 하면 원전 짓는 것을 도와주지 않겠다고 한다. 1976년 1월 말 프랑스로부터 재처리 기술 도입을 포기한다. 미국의 원조로 원전을 건설했다. 한미원자력공동상설위원회가 설치되고 한국의 원자력 산업에 기술, 경제적 지원을 했으며 감시하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주한 미 대사관에는 핵물리학자 출신 CIA 요원이 상주하고 있었다. 청와대는 도청되고 있었고 대덕연구단지 상공에는 미 정찰기가 다녔다는 증언도 있다. 한국정부에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핵 개발은 좌절되었지만 처음 의도대로 미사일 개발에 성공한다. 1978년 890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지대지 미사일 '백곰'미사일을 개발했다. 백곰(NHK-1)은 1978년 개발 성공한 사거리 200Km의 대한민국 첫 국산 단거리 지대지 탄도 미사일이다. 당시 이 정도 미사일 기술을 가진 나라는 6개 나라 정도였고 한국은 7번째 기술 보유국이 된다. 

 

 

한미미사일양해각서는 1979년 한국이 미국에게 미사일 개발 제한을 약속하며 써준 각서이며 2001년 폐지된다. 사정거리 180Km 미만, 탑재중량 500Km 미만으로 제한한다. 미국 통제 하에 허락된 범위에만 미사일 개발이 가능했다. 때문에 로켓 개발에도 제약을 받자 3차례 협상 끝에 사거리 800Km로 확대된다. 

현재 한국이 가지고 있는 미사일 중 사거리가 가장 긴 현무 2호 (현무-2C)를 개발했다. 현무는 '북쪽을 지키는 신'이라는 뜻이다. 

 

1960년대 말~1970년대까지 한미 관계는 불편했다. 이상주의 인권 외교를 표방한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를 하려고 하자 카터와 달리 백악관 참모, 미 국방부 등은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했다. 1979년 결국 한미공동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은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한국에 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것이다'라고 한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카터에게 한국 인권 상황을 개선시키겠다'라고 답한다. 그리고 실제로 회담 이후에 6개월 이내에 총 180명 정치범 석방을 하겠다고 약속을 한다. 1979년 7월 20일 주한미군 철수 중단을 발표한다. 

이 무렵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 이후 언론을 통해 핵무장에 대한 여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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