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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인도 대표 건축물 타지마할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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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대표 건축물 타지마할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끝이 보이지 않는 영토와 진귀한 보석을 거머쥔 남자, 인도 무굴제국 제5대 황제 샤자한은 사랑하는 아내 뭄타즈 마할이 있었다. 17년 동안 13명의 자식을 낳으며 황제와 황비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정복 전쟁에 나선 황제를 따라나섰던 황비는 전장에서 14번째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둔다.

20여 년 후 황제는 황비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낸다. 

 

 

 

타지마할은 198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뿐만 아니라 인도의 큰 관광 수입원이 된다. 타지마할은 역사적, 경제적 다방면으로 인도의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타지마할은 궁전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다. 신혼여행지로 유명하고 아름다운 외관 덕분에 웨딩 촬영지로도 사랑받고 있다. 

 

 

16세기 인도는 전쟁이 일상이었다. 샤자한이 황비를 데려간 곳은 데칸이었다. 데칸고원은 인도 중남부를 차지하는 험준한 고원으로 6월 10월에 기온이 70도에 육박할 만큼 무덥다. 

16세기 초기 무굴제국은 델리를 수도로 하여 북인도에 자리 잡았다. 차차 세력을 넓혀 인도 남쪽으로 제국을 확장했다. 북인도에서 남인도로 약 200년을 정벌 사업에 힘을 쏟았다.

 

한 번 원정을 떠나면 짧으면 1~2년, 보통 3~4년 이상이 걸린다. 황비 뭄타즈 마할이 원정을 따라간 후 임신을 했고 출산을 했다. 황비가 14번째 아이를 낳을 때는 39살의 나이였으며 날씨는 덥고 의료 상황은 열악했다.

17년간의 혼인기간동안 아이를 14명을 낳았다. 

 

 

16세 샤자한이 왕자시절에 궁정 여성들이 자주 가는 시장에 방문했다. 시장으로 물건을 사러 갔던 14세의 뭄타즈 마할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샤자한은 궁궐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다고 선언했고 약혼을 한다. 약혼 후에 5년간 결혼은 못 한다. 당시 5년간의 약혼기간은 이례적인 것이며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5년 사이에 샤자한은 다른 여성과 정략결혼을 한다. 뭄타즈 마할을 포함해서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다. 뭄타즈 마할과는 연애결혼이었고 나머지는 정략결혼이었다. 

샤자한의 아버지 자한기르도 역시 아내가 30명 이었다. 샤자한은 정략결혼으로 많은 부인을 두었지만 뭄타즈 마할을 가장 사랑했다. 

 

"그녀는 이 성공적인 지배자(샤자한)의 동반자였고, 이 둘 사이의 사랑과 화합은 술탄 계층의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또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결코 볼 수 없었던 정도였다"

-카즈위니 <빠드샤 나마>中

 

뭄타즈 마할은 지성미가 넘치는 여성이었다. 황제의 말 상대이자 정치적 조언자가 되어 주면서 정치적 야심은 없는 동반자였다. 사료에는 흠이 전혀 없는 여성이었다고 기록되었다.

이슬람 전통의 무굴제국은 왕위 계승 서열이 없다. 적자와 서자의 구분이 없으며 무조건 가장 강한 아들이 황제로 등극한다. 무굴제국은 황제가 바뀔 때마다 피바람이 불었다. 적수가 될 만한 형제들은 전부 제거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팽팽한 긴장 속에 샤자한 황제의 유일한 안식처는 뭄타즈 마할이었다. 

뭄타즈 마할이 죽자 샤자한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계속 우느라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이 필요한 정도였고 그의 수염은 잿빛으로 바뀌고 결국은 완전히 희게 변해버렸다."

-카즈위니 <빠드샤 나마> 中

 

실제 타지마할을 모티브로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 궁전을 만들었다. 타지마할의 실제 크기는 17ha (약 5만 평/ 약 16만 5천 제곱미터)이며 축구장 20개 크기정도이다. 타지마할은 본 건물, 정원, 시장. 부속 정원을 모두 다 합쳐서 타지마할이었다.

 

 

 

타지마할의 입구는 붉은색 돌 적사암이다.  당시 북인도 지역에서 가장 구하기 쉬웠던 돌이다. 타지마할은 적사암과 잡석을 섞어 골조를 만든 후 겉에는 흰색 대리석으로 붙여 완성했다. 

 

 

타지마할은 하늘빛에 따라 색을 달리한다. 해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여러 모습 중 최고로 꼽히는 것은 보름달 아래의 타지마할이다. 

 

 

 

타지마할은 1631년~1648년 약 20년에 걸친 대공사로 지어졌으며  "최고의 궁전'이란 뜻이다.

당대 선진국 페르시아에서 초빙된 건축가 '우스타드 아흐메트 라호리'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전문 기술자들을 초빙됐다. 수많은 기술자 중 석공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타지마할 축조에 연간 2만 명의 인력이 동원되었다. 문 밖에는 석공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며 대대손손 타지마할을 축조했다. 

타지마할과 같은 아름다운 건물을 다시 만들 수 없게 하려고 인부들의 손목을 잘랐다고 하는 이야기는 기록을 찾을 수 없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다. 

 

타지마할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가장 큰 이유는 완벽한 대칭미였다. 타지마할 기둥이 살짝 기울어졌다. 북인도 지역은 히말라야산맥과 가깝다. 알프스-히말라야 조산대로 잦은 지진이 발생하는 지역으로 43m가 되는 기둥이 안쪽으로 넘어지면 무덤 훼손 가능성이 높았다. 기둥이 무너져도 밖으로 넘어질 수 있게 바깥쪽으로 2도 기울여서 설계했다. 

 

 

뭄타지 마할의 관이 있는 곳은 문을 통해 건물 내부로 출입이 가능하다. 1층 실내 공간에 관 주변을 둘러싼 8각형의 아름다운 울타리가 있고 그 안에 관이 있다. 두 개의 묘석은 가묘이다. 실제 관은 지하에 있는 같은 모양의 묘석이 있고 그 밑에 있다. 

타지마할 전체에서 대칭이 맞지 않은 유일한 공간이다. 건축 당시 오직 뭄타즈 마할만을 위한 무덤이었다. 대칭을 위해 뭄타즈 마할의 관은 정중앙에 위치한다. 남편 샤자한 황제는 아들의 반역으로 폐위가 되었다. 6대 황제 아우랑제브는 어머니의 묘당이 크게 있으니 아버지도 그냥 같이 모시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변변한 장례도 없이 아내 뭄타즈 마할의 옆에 묻는다. 

 

화장은 인도의 힌두교식 장례 풍습이다. 무굴제국은 중앙아시아에서 파생된 이슬람 왕조다. 주로 매장을 했다. 

 

까딱은 인도에서 시작된 춤으로 인도의 8가지 고전 무용 중 하나이다. 까탁의 어원 "까타'는 '이야기꾼'이라는 의미이다. 인도의 중부. 북부의 힌두 사원과 마을에서 신의 이야기를 전했던 무용 예술이다. 무굴제국은 힌두교 성격을 가진 까탁 댄스를 궁정 예술로 편입시켰다. 전폭적인 지원을 했고 일부 귀족들은 직접 까탁댄스를 추기도 했다. 무굴제국의 지배층 대부분은 이슬람교도였지만 피지배층은 대부분 힌두교도였다. 

무굴제국은 최고위직까지 힌두교도 귀족들도 진출했다. 황제와 막역한 사이가 되기도 한 귀족도 있었다.

무굴제국은 이슬람교와 힌두교도가 유연하게 공존했다. 

 

 

샤자한 황제가 타지마할을 야무나 강가 바로 옆에 지은 이유는 수로와 연못이 있는 물이 흐르는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차하르 박'이라고 불리는 바둑판 모양의 정원은 그 자체로 이슬람 경전, 코란에서 '천국'을 상징한다.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 교리에 따라 타지마할의 장식은 아라베스크 문양과 코란 경전 문구로 주로 새겨져 있다. 코란 문구들은 심판의 날과 천국에 대한 약속을 의미한다. 생생하게 표현된 꽃문양들도 천국을 상징한다. 타지마할은 지상에 구현한 이슬람의 천국인 것이다.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이슬람교도를 위한 이슬람식 무덤이지만 구석구석 힌두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는 인물과 동.식물을 벽에 새기지 않는다. 타지마할에는 일반 이슬람 건축물과는 다르게 벽면에 꽃무늬를 피에트라 두라 방식으로 새겨 넣었다.  피에트라 두라는 대리석을 파내어 필요한 색의 보석을 깎아 홈에 끼워 넣는 방식이다. 타지마할 벽면을 장식한 다양한 색의 보석들은 염색이 아니라 자연석이다.

 

 

빨간색의 보석은 가넷.루비이고 녹색은 중국에서 수입한 보석, 옥이었다. 전 세계에서 수입된 화려한 보석들을 사용했다. 금은 건물  안팎에 500kg 이상 사용되었다. 

 

무굴제국의 경제력은 어마어마했다. 인도 무역선들은 힌두스탄의 물품을 실론. 모잠비크. 몰디브 제도 등지로 실어 보내고 엄청난 양의 귀금속을 싣고 힌두스탄으로 돌아왔다. 모든 무역의 결제 수단은 금이었다. 무굴제국은 인구는 약 1억 5천만 명이었다. 당시 무굴제국은 인구 20만 명 이상의 대도시가 9개 이상 있었다.

같은 시기 유럽은 파리, 런던, 나폴리 세곳 정도였다. 무굴제국은 세계 GDP 1~2위로 세계 최강 부국이었다.

 

 

엄청난 경제력으로 소비 역시 활발했다. 왕족과 귀족들은 사치품 보석 소비가 많아 보석 세공 기술이 뛰어났다. 무굴제국은 영토가 넓어서 막대한 세금이 발생한다. 샤자한 황제가 끝없이 원정을 떠나 정복 전쟁을 벌이는 것은 무굴제국의 안정적인 재정 상태를 위해서였다.

 

자신을 신의 그림자라고 자처한 무굴제국의 황제 샤자한이 직접 앉았던 공작 왕좌는 루비,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진주 등 보석 230Kg이 촘촘히 박혀있다. 왕좌를 만드는 데 1톤 이상의 금이 사용되었다. 공작 왕좌는 제작 기간은 무려 7년이 걸렸다. 샤자한이 황제가 되자마자 제작을 지시했고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간 공작 왕좌였다. 초록색 사파이어로 제작된 공작이 의자의 기둥을 감싸는 모양이다. 다이아몬드를 왕좌 꼭대기에 장식했는데 페르시아어로 '빛의 산'이라 불리는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였고 186캐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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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무굴제국의 초대 황제 바부르가 인도에 가서 황제에 즉위한 후 얻게 된 것으로 이후 무굴제국의 황제에게 대대로 전해졌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에는 저주가 스며들어있다. 코이누르를 가진 사람은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하지만 최악의 불행을 함께 경험할 것이다라는 저주를 가지고 있다. 무굴제국을 지배했지만 아내를 잃고 아들에 의해 폐위된 샤자한은 쓸쓸하게 타지마할을 보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공작 왕좌는 타지마할 건축 비용의 2배였다. 

 

19세기 무굴제국은 사라지고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코이누르 다이아몬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건네진다. 코이누르 저주는 신과 여성에게 예외가 된다.  코이누르 왕관은 영국의 여왕. 왕비들이 공식 행사에 착용한다. 현재 코이누르는 186캐럿이 아니라 105.6캐럿만 남았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쳐진 이후에 광채를 위해 추가 세공 작업 후 왕관 십자가 정중앙에 위치시켰다.  코이누르로 만든 왕관은 영국 공식 행사 때만 착용하고 평소에는 런던탑에 보관한다. 

무굴제국을 지배한 샤자한 황제는 아내를 위해 세기의 건축물 타지마할을 건축했고 자신을 위해서는 2배나 비싼 공작 왕좌를 만들었다.

 

샤자한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건축물을 지었다. 타지마할을 짓고 난 후 델리에 붉은 성과 새로운 수도 샤자하나바드를 건설했다. 샤자한 사후 세 번째 아들 아우랑제브가 왕위에 오르고 50여 년 재위하면서 무굴제국의 영광을 누린 마지막 황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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