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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정치와 결탁한 정치깡패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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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결탁한 정치깡패  

1961년 5월 21일 사회정화의 일환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깡패들의 참회 행진이 시작됐다. 그리고 깡패들의 맨 앞에는 암흑세계는 물론 정치권력 앞에서도 주먹을 휘둘렀던 전 동대문파의 보스, 이정재가 있었다.

깡패는 영어,갱(gang)과 패거리가 합쳐져서 깡패가 됐고 한국전쟁 때부터 사용했다는 설이 다수다.

 

조폭은 조직화된 폭력집단이라는 뜻이다. 조직폭력은 1~4기까지 나뉜다. 1기는 일반적으로 낭만파시기라고 말하고 일제강점기~한국전쟁이전까지이다. 집단폭력보다는 1:1로 싸웠다. 연장을 사용하지 않고 뒤에서 공격은 금지했다. 1기 낭만파 깡패는 약한 사람을 돕는 협객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표 1기 깡패는 김두한, 구마적 고희경, 신마적 엄동욱, 쌍칼 김기환, 스라소니 이성순 등이 있었다. 

 

2기 깡패는 한국전쟁이후 ~이승만 정권 시기 권력과 결탁한 정치 깡패 시대였다. 3기 깡패는 5.16 군사정변~1990년 이전 시기에 규모를 키운 전국구 시대 깡패였다. 

4기는 90년대 범죄와의 전쟁이후 규모가 커지면 노출 위험이 커지므로 조직 규모를 축소하고 합법을 가장해서 벤처기업이나 사채에 관여한다. 겉으로는 기업가 모습을 갖춘다. 

 

 

권력과 결탁한 깡패

권력자들이 권력 유지를 위한 가장 낮은 수단으로 불법적인 폭력집단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동원하거나 협박한다. 50년대 정치에 동원된 불법 폭력 집단을 정치깡패라고 한다. 대표적인 정치깡패는 이정재였다. 

이정재는 전국씨름대회 3회 우승자로 황소를 독차지했다. 동대문 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했다. 동대문 시장에서 깡패들과 마찰이 있었고 이정재가 제압하면서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가장 큰 깡패 집단, 동대문 시장파의 보스로 등극한다. 

 

1955년 1월 29일 오후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동대문파 중간보스 김동진이 영화를 보고 나오다 총격테러를 당한 것이다. 이 총격으로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범인은 동대문파 소속 이석재였다. 김동진의 테러를 지시한 사람은 같은 동대문파의 보스 이정재였다. 

당시 깡패의 주 수입원은 미국 부대에서 경매로 미군 물자를 싼 값에 빼돌려 비싼 값에 되파는 것으로 수입이 많았다.

 

동대문파의 중간보스 김동진은 자신의 몫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따로 조직을 만든다.

단성사 총격사건은 미군 군수물자를 둘러싼 동대문파 내의 이권다툼으로 인해 벌어진 총격테러였다. 

이정재에게 들통이 났다. 이 과정에서 보복을 당한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폭력조직 내부의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사건 조사 과정 중에 김동진은 음모가 있다고 폭로를 한다. 이승만 대통령에 반대하는 정치인들 40명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자신은 거부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보복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동진 씨가 밝힌 바에 의하면 이모 씨(이정재)가 ...중략...정계 요인 40여 명의 명단이 기입되어 있는 도표를 제시하고 이들을 치워버릴 계획이니 협력하여 달라고 요청'

-<경향신문 1955.2.1>

 

'김태선 씨...(중략) 신익회, 조병옥, 장택산 씨 ....40여 요인들의 명단이 기입'

-<경향신문 1955.2.2>

명단에는 서울시장 김태선을 비롯해서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 조병옥,조봉암 등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 김동진이 수세에 몰린 것을 빠져나가고자 자작극인지를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암살명단에 대한 증거는 김동진 증언뿐이었다. 겱국 이정재는 암살 혐의로 구속되었지만 며칠 지나서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된다. 그만큼 정치인과 깡패의 유착이 강했다는 증거이다. 이정재 뒤에는 이승만 정권의 이인자 이기붕이 있었다.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와 가까운 사이였다.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이기붕은 정치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정치 깡패를 만들었고 눈에 들어온 인물이 동대문에 있었던 이정재였다. 

이정재는 이기붕의 손을 덥썩 잡았고 바로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는 이기붕에게 문안 인사를 했다. 

이기붕은 이정재에게 자유당의 감찰부 차장 직함을 준다. 감찰부는 조직 구성원의 비리. 부정행위를 감시한다. 따라서 감찰부 차장을 맡긴 것은 믿는 사람이었다는 증거이다.  이기붕과 이정재 관계는 더욱 유착된다. 

 

<이정재 관련 주요 정치폭력 사건>

이갑성의 보디가드 테러

자유당 서울시당 위원장 선출장에서 무력시위

야당계 후보자 등록 서류 탈취 및 선거운동원 테러

자유당 총무부장 임홍순 테러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 당시 국회 방청석에서 무력시위

자유당창당동지간담회 발기회 난입

민주당 윤보선 강연회 방해

진보당 서울시당 및 경기도당 결성대회 난입 테러

장충당공원 야당 시국강연회 난입 테러

4.18 고려대생 습격 

 

이정재는 야당 탄압을 주로 했지만 자유당 내에서의 이기붕의 권력 강화 작업을 위한 테러도 했다. 

이기붕은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이정재는 뒤에서 일을 처리하면서 유착관계는 더욱 단단해졌고 권력 유지는 지속되었다. 

 

1954년 3월 이기붕은 자유당 서울시당 위원장 후보로 나선다. 선출장에 80명의 대의원이 있었는데 이정재는 깡패 50명을 동원해서 이기붕을 찬성하는 사람은 손들라고 한다. 이기붕이 선출됐다고 선언하면서 행사를 끝내버린다. 불법과 폭력을 동원해서 이기붕의 권력을 뒷받침한다. 

 

이기붕의 입지가 점점 커지자 1955년 7월 자유당의 일부 의원들이 자유당 창당동지 간담회라는 이름으로 反 이기붕 집회를 연다. 이 소식을 들은 이정재가 깡패들과 함께 집회장에 쳐들어오면서 집회현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만다. 이때 이정재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김두한이었다. 김두한은 당시 국회의원 신분이었다. 1954년 종로구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김두한은 反 이기붕 계열이었다.

 

 

김두한은 1918년 생이며 이정재는 1917년 생이다. 일촉즉발이었던 김두한과 이정재의 대결은 집회 해산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깡패 이정재가 국회의원과 맞짱을 뜨려고 했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 깡패의 위세가 대단했다는 것이다. 

 

깡패와 정치가 야합한 역사는 광복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한반도는 무정부 상태가 되면서 좌우 대립이 극심했다.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지지가 취약했던 우익세력은 권력을 잡기 위해서 청년단을 조직해서 정치 투쟁에 참여시킨다. 광복 후 우익청년단은 대한민주청년동맹, 서북청년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단이었다. 

우익청년단의 주요 임무는 좌우합작운동 방해, 좌익인사 테러하는 것이었다. 대한민주청년동맹 중심에는 김두한이 있었고 감찰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청 별동대를 조직해 좌익 진압에 나섰다. 

 

1946년 9월 총파업은 미군정 시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임금인상 등을 요구, 전국규모의 총파업을 실시했다. 총파업 진압에 대한민청 별동대 김두한이 투입되었다. 좌익 활동을 분쇄하는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북 청년회는 이북 출신 폭력배가 중심이었다. 이화룡(이후 명동파의 주목), 스라소니 이성순이 대표인물이었다. 서북청년단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청년단체 중 가장 반공 성향이 강했다. 4.3 사건 등 민중 봉기 진압에 적극 개입했다. 탄압하고 진압하는데 가장 적극적으로 동원이 됐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기 때문에 광복 직후 남한에서 활동한 미국의 첩보부대 CIC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가졌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단(국청)에는 서울시 동부특별단부 단장 이정재가 있었다. 동부특별단부의 일부 단원은 동대문파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다. 전쟁 후 3개의 우익 청년단은 대한청년단으로 통합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 세력을 모두 활용해서 종신집권을 이루려 했다. 광복 직후부터 시작된 정치 폭력의 역사는 정치 깡패 이정재를 탄생시키는 연결고리가 된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산, 경무부장 조병옥은 우익청년단에게 테러를 독려하기도 했다. 경찰이 요구할 때 동원되고 우익청년단의 불법 행동을 묵인한다. 

1957년 정치 깡패의 존재가 드러나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1957년 5월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反 자유당 시국강연회가 열렸다. 시국강연회 두 번째 연설자로 나선 사람은 민주당 조병옥 위원이었다. 그 순간 괴한들의 난동으로 집회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테러는 권력과 결탁한 정치 깡패의 존재가 수면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1958년 총선을 앞두고 자유당은 정치적 위기를 느낀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대중적 지지를 야당이 끌어낸다. 1956년 대선 결과는 부정선거였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 약 504만 표, 조봉암 약 216만 표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했다. 1958년 자유당의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분위기를 바꾸고자 총선 승리를 위해 선거법 개정을 시도한다. 자유당은 야당 후보가 등록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후보등록 기탁금을 30만환에서 100 만환으로 늘리려 한다.  입후보하기 위해서 추천인 서명이 필요했는데 후보등록 추천인 수를 200명에서 500명으로 늘리려 한다. 

 

야당 후보에게는 불리한 개정안이었다. 장충당 시국강연회는 선거법 개정에 항의하여 야당이 개최한 反자유당 집회였다. 최소 2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조병옥 의원이 연단에 올라서자마자 '저놈 죽여라'를 외치면서 유리병 조각, 플라스틱 물통까지 투척했다. 집회 경비 책임자는 김두한이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깡패가 몰려들어 막지 못했고 경찰들은 괴한에 대항한 대학생들을 연행한다. 안전상 문제가 있다며 집회를 해산시킨다. 정치깡패가 투입되어 혼란스럽게 만들면 부상자가 발생하고 경찰은 개입해서 안전을 핑계로 전체를 해산시킨다. 궁극적으로는 야당 집회를 방해하는 것이 목적이다. 

 

1957년 5월 27일 동아일보에 현장 사진이 실렸다. 유지광(이정재의 사돈), 이석재(단성사 권총 범인,이정재의 6촌 동생) 등이 사진에 찍여서 이정재파의 불법 정치 개입이 대중에게 드러나게 된다. 이정재가 폭동대가로 받은 것은 밀가루 15만 포대였다.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약 4천6백만 환(현재 추정 가치는 약 8억 7천만 정도)이었다. 난동 가담한 깡패는 설렁탕 두 그릇 식권과 200 환을 받았다. 200 환은 택시 기본요금 정도였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깡패라는 존재를 인식하게 됐고 언론에서도 본격적으로 '깡패'가 등장한다. 

정치에 깡패를 이용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게 된다. 정치 깡패의 불법 행위가 발각되며 여론은 악화된다. 여론을 잠재울 희생양이 필요했고 동대문파 행동대장 유지광을 구속시킨다. 그러나 여론은 여전히 들끓었고 폭력조직 계보를 공개한다. 

 

경찰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57년 서울의 깡패는 청계천을 경계로 활동했다. 청계천 북쪽은 이정재파가 있었고 청계천 남쪽은 이화룡파가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이정재파와 이화룡파는 세력 다툼을 치열하게 한다. 깡패들은 '남북전쟁'이라 불렀다. 이화룡파는 구성원이 이북 출신이 다수였고 이정재파는 이남 출신이 다수였기 때문에 남북전쟁이라 부른 것이다.

 

이화룡파는 시공관을 중심으로 명동지역을 잡고 있었고 주특기가 박치기였다. 각 세력의 우두머리들은 나름대로 싸움의 주특기가 있었다. 중앙극장은 신의주 출신의 정팔이 장악하고 있었고 씨름꾼 출신이었다. 정팔은 고향선배인 스라소니 이성순을 불러들인다. 명동파는 세력이 확장되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이화룡 파는 정치권력과 유착하지 않고 경제적인 이익을 좇는다. 

 

이정재파는 정치권력에 빌붙는 양상을 보인다. 이정재는 광장시장을 중심으로 세력이 형성이 되었다가 이후 종로까지 세력을 확장시킨다. 이정재가 세력을 확장시킨 낙원시장과 종로 2가는 원래 김두한의 구역이었는데 김두한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그 부하였던 심종현에게 넘겼다. 김두한의 주특기는 상대의 어깨를 붙잡고 양발로 차는 것이었다. 심종현은 주먹으로 종로의 일인자가 됐다. 

 

자유당 감찰부 차장이었던 이정재를 비호하기 위해 자유당은 강력하게 항의했고 내무부장관이 나서서 계보 작성한 경찰관을 문책한다. 계보가 발표된지 1주일도 안 돼서 폭력조직을 수사하던 경찰 특수계는 해체된다. 

자유당과 정부는 깡패를 깊이 조사하다가 자신들과의 연결 고리가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경찰에게 압력을 가해서 정치테러를 은폐한다. 

 

자유당의 은폐로 정치깡패는 기세가 더 등등해진다. 이정재는 고향 이천에서 1958년 총선에 출마를 계획한다. 이정재는 이천 주민 경조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자유당 이천군당 위원장에 취임하고 환갑잔치를 열어주고 면장들에게는 자전거를 한 대씩 사준다. 아이들에게 고무줄 놀이 하라고 고무줄을 나눠주기도 했다. 

고무줄을 주면서 노래까지 가르쳤다. "이번에는 이정재, 이정재를 뽑아요" 

 

이정재의 뒷배경은 이기붕이었고 이기붕은 자유당 내에서 이정재를 통해서 입지를 다졌다. 

1958년 총선에서 서울시 서대문구 출마를 계획했다. 야당에서 강력한 라이벌 김산 후보가 출마했고 여론은 야당에 동조적이었다. 그러자 서대문구에서 물러난 이기붕은 이정재 텃밭 이천 출마를 결심한다. 

이기붕은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고 타격을 입었었다. 국회의원으로 2인자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정재가 기반을 다진 덕에 이천 당선이 유력했던 상황이었다. 이정재는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또한 이기붕은 이정재 국회 진출을 막아야 했다. 여태까지 청년단을 1,2년 이용 후 해체했다가 다시 만들고 이용하고 해체하고를 반복했다. 이번 기회에 이정재를 처 내고 다른 세력을 수하로 만들려는 속셈도 있었다. 

 

이정재는 이기붕의 배신에 화가 났다. 이기붕은 당장 협조하지 않으면 조직을 없애버리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이정재는 후보 마감 20분 전에 후보 등록을 포기하고 이천에서 이기붕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다. 

이기봉과 이정재의 야합은 결렬된다. 이기붕은 배신당한 이정재가 폭로를 할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이정재에게 경찰 치안국장 자리를 제안했으나 이정재는 거절한다. 이정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종로평화극장 뒤에 폐가를 구입한다. 종료 폐가를 헐고 집을 지어 야인 생활을 시작한다. 동대문파 보스는 유지한다. 이름만 보스였고 실상은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이기붕은 새로운 수하로 정치깡패 임화수를 불러들인다. 임화수는 대중.연애 사업에 관심이 많아서 관여한다. 문교구 장관자리까지 노리는 야심가였다. 하지만 글을 못 읽었다. 1958년 기준 한국의 문맹률은 4.1%였다. 이정재는 주먹으로 부역했지만 임화수는 자유당 집회에 연예인을 동원했다.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의 환심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화.예술계의 문화예술인은 혹독하게 다룬다. 

희극배후 김희갑을 반공예술단 행사 참여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구타한 사건이 있다. (김희갑 구타사건 1959년) 전치 3주 이상 상해를 입었고 임화수는 구속감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등에 없는 임화수는 벌금 3만 환을 내고 풀려난다. 

 

민심은 악화되고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책은 이해할 수 없었다.1958년 12월 자유당은 국가보안법을 날치기 통과시킨다.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하는 시위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을 안정시키고 반공 국가 체제 유지를 위해 대한반공청년단을 결성한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청년조직으로 보였지만 1959년 자유당이 이듬해 3.15 정부통령선거를 위해 조직한 청년단체로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청년단이었다. 단원의 대다수가 깡패였고 1959년 말 단원 수가 135만 명까지 증가했다.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깡패들은 사복 차림으로 평소에는 거리를 청소하는 등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다가

싸움이나 범법 행위에는 청년 단복을 입고 행패를 일삼았다. 

 

단복을 입고 있으면 경찰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다. 폭력이 공권력의 비호를 받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1959년 대한민국에서 불법 정치폭력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 폭력을 계속 이용했다. 심지어 조직까지 커졌다. 임화수는 대한반공청년단의 종로구단 단장을 맡았다. 4.18 고대생 습격사건(1960년 4.18)을 벌인다.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하는 고려대생을 정치깡패가 습격한다. 1960년 4.19혁명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된다. 이승만 정권 붕괴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승만 정권 이후 정치깡패들은 5.16 군사정변 이후 사회정화 목적으로 정치깡패는 체포한다. 불법으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는 자기 합리화가 필요하고 그중 하나가 사회정화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다. 

군사정부는 깡패들을 잡아다가 행진을 시켰다. 군사재판에서 A,B,C급으로 깡패를 분류한다. A급 깡패는 사형선고를 하고 사형을 집행한다. 이정재와 임화수가 사형선고를 받았다. 

1970년대에는 야당 전당대회에서 정치깡패가 다시 등장한다. 신민당 각목 사건.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이 일어났고 깡패들이 각목을 들고 야당 전당대회에 난입한다. 1980년대까지 불법 정치폭력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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