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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대한민국 성씨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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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성씨는 언제부터 있었을까 

대한민국 전체 성씨는 5,582개이다.(2015년/통계청 조사 기준)

김씨 22%, 이씨 15%, 박씨 8%이며 최씨 5%, 정씨 4%, 강,조,윤,장,임씨는 2%이며 나머지는 기타 성씨이다. 

 

 

기타 성씨에는 곡,관,뇌,려,목, 미, 범, 비, 빈, 순, 시, 어금, 엽, 좌, 증, 초, 총, 풍, 형 등등이 있다.

전체 성씨 중에서 순수 한국 성씨는 약 300개이다. 대한민국 5명 중 1명은 김씨이다. 김.이.박.최씨가 대한민국 인구 절반을 차지한다. 

 

성씨와 본관이 같으면 유대감을 느낀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성씨를 가지고 있다. 성씨와 본관은 존재와 소속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해 준다. 지금은 성씨를 가진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과는 달리 고려 초기까지 성씨가 있는 사람이 적었다. 성씨를 가진 것은 특권이었다.

 

높은 신분에 있던 사람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다. 왕부터 성을 사용한다. 진흥왕의 이름이 북제서에 김진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을 김 씨로 하고 이름을 진흥이라 한 사람이 처음 출현했다. 진평왕은 김진평, 진덕여왕은 김진덕으로 쓴 기록이 나온다. 경주 김씨가 된다. 경주에서 신라의 왕이 성을 사용하고 진골이 사용하고 6두품이 사용하고 5두품, 4두품, 3두품, 2두품, 1두품까지 성씨를 사용하게 된다. 신라시대 당시 성이 있었던 사람 대부분은 경주에 거주했다. 경주가 본관이 되는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보다 먼저 성씨를 사용했다. 성씨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중국에는 있고 우리에게 없는 것은 중국의 선진문화가 성씨(姓氏)였다. 높은 신분부터 차례대로 성씨가 보급된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부터 성씨를 사용했다. 공자의 성은 공(孔)씨이다. 이름은 '구(丘)'이다.

삼국시대 중국과 교류가 빨랐던 순서로 성씨를 사용했다. 고구려, 백제보다 신라가 늦게 성씨를 사용했다. 장보고도 중국에서 성을 가져왔다. 장보고(張保皐)의 본명은 궁복(弓福)이었다. 원래 이름 궁복의 궁(弓) 자가 들어가면서 당나라에서 흔했던 성씨 장(張)씨를 붙여 장보고 (張保皐)가 되었다. 

 

930년 안동에서 벌어진 고창전투에서 견훤에게 큰 승리를 거둔 왕건은 승리 공신이었던 안동 세 호족의 공을 치하한다. 왕건은 개국 이후 고려 개국 공신들과 호족들에게 성씨를 하사하는 사성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지금까지 사용되는 우리의 성씨가 뿌리내리는 순간이었다. 

927년 공산전투에서 왕건을 구한 사람 신숭겸은 원래 성이 없었고 이름은 '능산'이었다. 왕건이 평산 신씨를 주면서 신숭겸이 되었다.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된다. 

신숭겸은 927년 견훤과의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갑옷을 바꾸어 입고 대신 전사했다. 

 

전의 이씨의 시조도 왕건에게 성을 하사 받았다. 왕건이 후백제를 징벌하러 가던 도중 금강을 못 건너고 있을 때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준 사람에게 '이도'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도는 전의 이씨의 시조가 된다.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과 각지 호족에 성씨를 하사한다. 나누어 준 성을 토성(土姓)이라고 한다. 토土는 지연.지역이고 성姓은 혈연이다. 토와 성이 합쳐지면 본관本貫이 발생한다. 왕건의 토성분정 (土姓分定)이라 부른다. 

토성분정(土姓分定)은 940년 왕건이 지방 유력 계층에 성씨와 함께  그들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하사하였다. 

 

우리나라 본관의 많은 수가 고려 초기에 시작됐다. 940년 왕건은 지방 행정 단위의 이름을 고친다. 940년 3월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등급을 정한다. 주부군현 아래 향,소,부곡, 진, 역, 장, 처를 두어서 지역의 등급이 정해진다. 지방 호족들은 살고 있는 지역에 따라 고려 안에서 자신의 등급이 매겨졌다. 주州에서 성을 받은 사람이 있고 부곡에서 성을 받은 사람이 생기게 되면서 사람들은 높은 등급의 지역에서 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것을 막기 위해 고려시대에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고려인들은 자기 거주 지역(본관)에 묶여있어야 했다. 고려인들은 어디 사느냐에 따라 신분이 정해졌다. 

 

성으로 나누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토성제도는 지배층에 이점이 많았다. 토성을 받은 세력은 자기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통치가 가능했고 중앙정부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지배층의 논리로 토성은 정착이 된다. 토성 정책은 상하. 군신 관계를 명확히 다지는 계기가 됐다. 왕건은 토성土姓을 주고 호족들의 충성을 얻었다.  왕건은 통치수단으로 성씨를 활용한 것이다. 

 

 

 

고려가 후백제와 전쟁할 당시 왕건에게 저항한 사람들(목주)에게도 성씨를 하사했다. 우, 마,상, 돈, 장씨를 하사한다. 소, 말, 코끼리, 돼지, 노루를 뜻한다. 장씨는 獐으로 써야 맞으나 場으로 기록되어 있다.

짐승성을 하사 받은 목주 사람들은 백제에 우국충정을 다한 사람들을 표시하는 성이 되었다.

 

천방지축마골피는 천민의 성씨라는 근거는 없다. 왕건이 지방 호족들에게 내린 토성 중 일부일 것이다. 조선 후기 성씨를 가지지 못한 사람이 이들 성씨를 가져다 쓴다. 아마도 다수가 가장 평범한 성씨를 골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한 성씨가 아니며 나중에 가짜로 만들어진 성씨일 가능성도 적다.

고려 시대 인구 절반을 차지하는 일반 평민 (그 당시 용어로 백정이라 불렀다)은 대부분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다. 고려에서 백정(白丁)은 일반 평민을 뜻한다. 고려에서 백성(百姓)은 백가지 성을 뜻한다. 따라서 고려의 백성 (百姓)은 성씨를 가진 일부 지배층을 뜻한다. 

고려 말기에는 천민을 제외하고 많은 수의 평민들도 성씨를 사용했다. 그러면서 조선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사람을 백성(百姓)으로 부른다. 

 

1392년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이씨의 조선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고려 왕실 세력 개성 왕씨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개경에 살던 왕씨들을 강화도. 거제도에 유배 보낸 후 이성계는 그들을 제거한다. 왕씨 150여 명을 몰살했다. 

개경사람들은 이성계를 미워해서 이성계 목을 비튼다고 생각하고 떡을 비틀어서 먹었는데 이것이 조랭이떡이다. 이성계는 개성 왕씨들을 수장했고 조선 각지 흩어져 있는 왕씨를 찾아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몰살한다. 왕씨를 숨겨준 사람들까지 벌한다. 

 

성씨는 자유롭게 창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나라는 적은 수의 성씨가 유지되었다. 일본은 성씨가 약 30만 개여서 성씨만으로 구별이 가능하다. 미국은 성씨가 약 100만 개 정도이다. 

2015년 기준 우리나라 성씨 약 5천 개는 최근에 많아진 것이다. 한국으로 귀화하려면 창성창본이 필요하다. 

2000년 귀화한 구리 신씨의 시조는 신의손이다. 

 

고려에서 조선을 거치면서 평민들의 성씨 사용이 증가했다. 조선시대 노비를 제외한 대부분의 백성이 성씨를 사용한다. 

가문의 역사와 혈통을 담은 족보를 이용한 크고 작은 사기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족보를 위조해 토지개발 보상금을 가로채는 경우도 있다. 선산이 개발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조상의 묘라고 사칭해 대규모 토지 보상금을 가로채기도 했다. 족보는 분묘 보상금을 위한 증명 서류로서 효력을 가진다. 족보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된다.

 

족보는 한 가문의 역사책이다. 조상이 누구이며 조상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으며  뼈대 있는 가문의 족보는 희귀한 비석의 문장이 있기도 하다. 이럴 경우 역사적 사료의 가치를 가지기도 한다. 

족보는 기본적으로 시조를 중심으로 시작해서 모든 후손을 망라해 기록한다. 족보가 있어야 같은 조상을 가진 사람끼리 알아볼 수 있다. 족보를 통해 가문의 결속을 다졌다.

타인과의 관계를 밝히는 족보는 조선시대에는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족보의 구성에는 가문의 의의나 내력 등을 기록하는 서문이 있다. 시조에 얽힌 내용이 있고 계보표가 있다. 

족보는 가로선 한 줄은 한 세대를 기록했다. 아들에서 아들로 한 페이지에 여러 세대를 함께 기록한다.

고창전투 승리 공신 권행을 시조로 한 안동 권씨 족보는 중국 명나라 성화 연간에 제작했다고 해서 '안동권씨성화보'로 부르며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족보 중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이름옆에 작은 글씨로 주로 관직명을 설명했다. 여부라고 쓰여진 것은 딸의 남편, 사위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안동권씨성화보'의 특이점이다. 아들만 기록하는 조선 후기 일반적 족보와는 다르다. 딸 자리에 사위이름을 기록했다. 아래로 가면 아들과 사위 이름이 섞여 있다. 아들, 딸(사위)을 출생순서로 기록했다. 

총 9천여 명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사위를 기록하면서 사위 성씨가 기록되어 족보에 오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안동 권씨는 약 300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안동 권씨와 결혼한 남성과 그 자손이며 그 자손과 결혼한 남성과 자손이다. 안동 권씨 성화보에는 혼인 관계로 엮인 모두를 기록했다. 

 

고려 시대에는 상속. 제사에 아들. 딸 구분이 없던 시기였다. 우리나라 족보는 혼인 관계가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안동 권씨 성화보에는 딸이 재혼을 하면 재혼 여부를 족보로 확인이 가능하다. 여부 女夫는 전남편, 후부後夫는 재혼한 남편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시대 때도 이혼이 가능했다. 보통 장인 집에서 사위가 처가살이를 한다. 안동권씨 권준과 그의 두 아들이 모두 고려 후기 첨의부의 정 2품 관직, 찬성사를 지냈다. 

첫째 사위는 시중, 둘째 사위는 정승을 지냈다.  시중, 정승은 고려시대 가장 높은 관직이다.

권준의 손녀는 고려 제27대 왕 충숙왕의 비가 된다. 또 다른 자손은 고려 제28대 왕 충혜왕의 비가 된다. 

안동권씨는 고위 관직자 가문으로 왕비까지 배출한 대단한 집안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성씨를 가진 것이 특권이었다면 조선시대에는 족보가 있다는 것이 특권이 된다. 양반만이 족보를 만들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족보 위조가 유행했다. 전문적으로 위조해 주는 직업까지 성행했다. 

이런 일이 생기는 기본적인 바탕에는 족보 없던 사람들도 족보를 만들 수 있는 환경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경제가 발달하면서 평민과 천민의 경제적 상승으로 신분 상승 욕구가 생겼다. 족보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면서 족보 위조 공급이 늘어났다. 

반면 몰락하는 양반이 많이 생긴다. 원칙적으로 3대 이상 벼슬을 못하면 양반 자격이 박탈당한다. 조선시대 신분의 상하 이동이 가능해진 사회가 되었고 족보를 새로 만드는 장사가 성업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 비일비재하게 족보 위조가 일어났다. 순조 7년 대규모 족보 위조 사기단이 발각된다. 

"이씨 성을 가진 자가 본관을 종잡을 수 없이 바꾼 다음 보책 단자를 받아 낸 사람들을 일일이 조사해 내어 보고한 것이 166인입니다"-승정원일기 中순조 7년(1807) 7월 

심지어 왕실 족보(전주 이씨)마저 위조되었다. 

 

조선후기 양반이 되면 군역 면제를 받는다. 양반의 군역 면제는 임진왜란 이후부터였다. 백성들은 군역의 부담이 버거웠고 어떻게든 군역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신분 상승 노력은 물론 불법 족보 위조도 감행하게 된다.

 

양반들만 가지고 있었던 족보는 일반 백성들에게 보편적으로 확산된다. 성씨를 선택할 때 뼈대가 있는 유명한 가문의 익숙한 성씨를 가지고 싶어 했다. 김, 이, 박, 최 성씨를 많이 선택하게 된다. 조선후기에는 모두가 양반이 된다. 1894년 갑오개혁에 노비제도가 혁파된다. 1920년 일제 강점기 가장 많이 출판된 책은 족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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