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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지식

1948년 여순사건, 군인들의 반란

by 소시민스토리 2024.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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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여순사건, 군인들의 반란

1948년 10월 19일 밤, 제주 4.3 사건 진압 출동 명령을 받은 여수 14 연대가 진압 거부를 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경찰과 우익인사를 살해하고 5시간 만에 여수를 장악한 군인들은 다음날 바로 순천까지 장악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어렵게 창설된 군이 국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것이다. 

 

1947년 3월 1일 제주 3.1절 기념 행사가 있었다. 약 3만 명의 제주도민이 군집했다. 기마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차이는 사고가 발생했다. 경찰은 모른 채 지나갔고 군중들은 분노했다. 사과를 요구하면서 도민들이 경찰서로 몰려 갔는데 경찰서를 습격한다고 생각한 경찰이 발포를 했다.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제주도민들은 파업으로 항의했고 미군정은 참여자를 체포했고 갈등은 증폭됐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주도로 제주도민들이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남한 단독 선거와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하며 봉기한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5.10 총선거에서 제주 2개 선거구가 무효된다. 제주도는 좌익의 섬으로 낙인 찍힌다. 

8.15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제주 소요는 계속됐고 이승만 정부는 강력 진압 의지를 선택했다. 이에 여수 14 연대에 제주 진압 명령이 내려졌다. 

 

14 연대 반란군 작전 전개과정

여순(여수. 순천) 사건은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 거부로 시작된다.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여수 14 연대 소속 남로당원들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3발의 예광탄을 신호로 작전이 개시됐다. 

예광탄은 발사됐을 때 궤적을 확인할 수 있게 빛을 내며 날아가게 만든 탄환이다. 

반란군은 가장 먼저 병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했다. 무기고에는 미군에서 지급한 M1소총과 60mm 박격포,일제에 썼던 99식 소총이 3,000정이 있었다. 

M1 개런드 (Grand)소총은 미군에서 제작 후 1936년부터 양산한 반자동 소총이며 7.6mm의 구경으로 파괴력이 강했다.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쓰였다. 

99식 소총은 1939년 일제가 개발한 육군 소총으로 탄환 직경을 7.7mm로 키운 후기종이다. 발포 후 다시 총알을 넣어 장전하는 볼트액션 방식을 사용한 99식 소총이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자체적으로 총기를 생산할 여력이 없었다. 미군은 M1 소총을 지급했고 일제가 남긴 소총을 미군이 탄환에 맞게 개조해서 한국군에 지급했다. 화약고에는 56만 발의 탄환이 있었다. 

 

저녁 7시 50분 비상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약 2,700명의 14 연대원이 연병장에 집합했다. 그날 저녁 10시에 예정되어 있던 제주 출병이 앞당겨졌다고 생각하고 출동 준비를 하고 모였다. 

반란을 계획했던 남로당원 지창수 상사가 연단에 뛰어들어 외친다. 

"지금 경찰이 처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군 반란은 시작됐다.

 

반란군은 10월 20일 새벽 1시 여수 경찰서를 습격한다. 반란군과 경찰이 약 2시간의 시가전을 벌인다.

10월 20일 새벽 3~3시 30분 여수 경찰서를 점령한다. 10월 20일 새벽 5시 여수 읍사무소 및 시내 주요 기관을 점령하고 인공기를 내건다. 10월 20일 오전 순천역에 도착하고 순천에 파견되어 있던 남로당원 홍순석 중위가 이끌던 14 연대 2개 중대(200~300명)와 반란군이 합류한다. 순천 경찰과 대치를 하게 된다. 순천경찰은 반란군에 맞설 추가 병력 증원 요청을 한다. 광주에서 지원병력 4 연대가 오지만 순천경찰 편에 서지 않고 14 연대와 합류를 한다. 현재 대한민국 국군에는 '4'가 들어간 연대 번호는 없다. 여순반란의 주동 세력이 4 연대, 14 연대로 4에 반란의 이미지가 생겨서 쓰지 않는다. 

반란군은 만 하루도 안 돼 여수.순천을 점령했고 3개 부대로 재편한다. 순천 서쪽에는 벌교. 북쪽으로는 학구, 동쪽으로는 광양으로 나선다. 3일째는 벌교를 향해서 가게 되고 4일째는 전남 동부의 6개 군을 장악하게 된다. 

 

반란군은 정부 수립 직후 혼란한 틈을 파고들었고 행정조직도 허술했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장악하자 남로당 중앙의 지시, 북한 개입 등 사전 철저한 계획설이 제기된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없다. 만약 중앙에서 계획을 했다면 여수는 한반도 남쪽에 위치해서 최남단으로 고립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에 반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는 지리적 어려운 위치에 있다. 

 

지창수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우발적이었다. 제주도에 출동해 총을 쏘지 않는 것도 명령 불복종이 된다.

총구를 제주도에서 정부로 돌린 것이다. 창군 직후부터 계속된 군인과 경찰 간 갈등이 있었다. 

1946년 국립 경찰 조직도에 해방 이후 고위직 경찰 중 82%가 조선 총독부 출신이었다. 군은 일본 육사, 만주군에서 나온 사람들이 군의 한 축을 차지했지만 군 내에는 광복군 출신, 중국군 출신까지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학생들도 잡힐 위기가 되자 많은 학생들이 입대를 했다. 1948년 10월 당시 아직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1962년 5월 10일 주민등록법이 제정되었다. 군 창설 직후여서 군 병력 확충이 급선무였다. 미 군정은 정치적 중립을 강조해서 입대자 사상검증을 진행하지 않았다. 

 

정부 수립 두 달 만에 군사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통치력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아직 UN에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UN이 승인한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려 했다. 1948년 12월 25일 소련군은 북한에서 철수하기 때문에 미군도 철수해야 했다. 여순 사건이 터지자 미군은 철수를 하지 않는다. 1949년 6월에 미군이 철수했다. 

 

여순사건에서 이승만 정부는 정적을 제거하기 좋은 기회로 본다. 반란군의 주장은 분단 정부 반대와 통일정부 수립이었다. 김구 선생은 반란군과 같은 주장을 했다. 이승만은 김구와 남로당을 엮으려 했고 김구 개입설을 퍼뜨려 여순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정부 반란군 진압 과정

1948년 10월 21일 군은 광주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서울을 방위해야 하는 수도권의 부대는 제외하고 대전 이남의 모두 부대를 전남 지역으로 투입한다. 창군 이후 제대로 된 전투경험이 없던 군은 연대급 이상 부대의 합동작전은 전무했다. 따라서 지휘 계통이 혼란이 왔고 통신 장비도 미비했다. 아군끼리 싸우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우여곡절 끝에  10월 22일 순천을 탈환했다. 10월 24일 보성, 벌교를 탈환했다. 반란 진압의 핵심지역인 여수는 지형적으로 탈환이 쉽지 않았다. 연이은 여수 상륙 작전이 실패한다. 이를 계기로 전문적으로 상륙작전을 수행할 부대의 필요성을 느낀다. 1949년 4월 15일 해병대가 창설된다. 

 

여순 사건을 계기로 군이 변화한다. 여수이 지형적 특성상 육지와 해상 합동작전을 전개해야 탈환이 가능했고 10월 27일 여수 탈환에 성공한다. 이후 지리산 일대로 들어간 반란군 토벌 작전을 전개했다. 

반란 8일만에 반란군은 진압됐다. 반란군은 지주와 지역 유지, 관료 등을 살해했다. 순천 경찰서장은 구타 후 산 채로 화형 당했다. 벌교는 대지주와 소작인 갈등이 이전부터 심했다. 반란군은 인민위원회 재판으로 우익인사를 처형했다. 진압군은 이런 반란군 가담자 색출과 폭력 행위를 당연한 응징으로 여겼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반란 가담자, 주민들 대상 부역자를 색출 심사를 한다. 

 

여수서국민학교 운동장에서 부역 혐의자를 색출했고 이들 중 89명을 처형했다.(1948.10) 

명확한 기준없이 진행된 색출 과정에서 부역자였지만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고 개인적 감정으로 지목을 당해서 처형된 사람도 있었다. 

부역자 색출의 심사기준이 있었다. 총을 소유한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머리를 짧게 자른 자, 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반란 때 여수를 장악한 인민위원회가 나눠준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자를 색출했다.

 

이승만대통령은 1948년 11월 4일에 담화문을 발표한다. 

"모든 남녀 아동까지라도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제거하고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복종해서 이러한 비행이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

군법 재판에 따라 처벌해야 하지만 여순사건에서는 재판 없이 즉결 처분을 했다. 

 

 

반란군이 숨어 있던 지리산 부근 주민들은 더욱 곤란을 겪었다. 낮에는 진압군이 와서 부역자를 색출했다. 밤에는 반란군에 의한 처형과 식량 수탈이 있었다. 빨치산 물자 제공 차단을 위해 마을을 불태우기도 했다. 

주민들을 강제로 마을을 떠나야 했다.

1949년 11월 11일 전남도청의 피해 조사 결과 사망자 11,000명, 가옥 파괴 1만 호 이상, 이재민 삼십만 명이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조사 결과 (2005) 반란군에 의한 민간인 사망 152명, 군경에 의한 민간인 사망 2,117명이었다. 피해자 중에는 연좌제가 두려워 피해 사실을 숨긴 경우도 다수였다. 전체 희생자 수는 더욱 늘어날 수 있다. 

 

반란 이틀 뒤 여수.순천에 대한민국 최초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 하 군법 재판을 맡은 김완룡 군법무관이 여수로 내려간다. 이승만대통령은 "임자가 한 달 안에 그 빨갱이들 전부 다 재판해서 토살 하고 올라오라, 그럼 계엄령을 해제하겠다"라고 지시한다.

1948년 10월 21일 최초의 계엄령은 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선포된다. 계엄법 제정은 1949년 11월 24일이다.

이후 군 내부에서도 공산주의자 색출이 이루어진다. 2개월 동안 진행된 여순사건 관련 숙청 군인 결과 재판 2817명, 사형 410명, 무기징역 563명이었다. 오전 재판에 오후 사형이었다. 이후 한국전쟁까지 군인 숙청은 지속됐고 총 처형 인원은 확인이 불가하다. 

 

박정희대통령은 당시 소령으로  군 내부 남로당 총책을 맡고 있었다. 숙군 수사과정에서 전향하면서 군 내부 남로당원 명단을 제공한다.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을 감형된다. 당시 대위 김창룡, 백선엽 장군, 제임스 하우스만 미 군사고문이 박정희 소령 구명 운동을 한다.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를 졸업했고 성적이 좋아서 일본 육사를 거쳤다. 엘리트 군인이었으며 박정희 소령이 모든 좌익 명단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군 내의 숙청 작업이 빨리 이루어질 수 없었다. 

 

여순사건 이후 사회 전반에 걸쳐 반공 교육이 본격화된다. 국가보안법은 1949년 12월 1일 공포됐다. 

국가보안법은 반국가활동을 규제해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제정한 법률이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다. 

여순사건 당시 순천역 철도원 장환봉 씨는 반란군 협조 협의로 총살됐다. 2020년 1월 20일 72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민간인이 학살된 여수시 만성리에는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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